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68)- 망국으로 노예가 된 트로이 왕녀들
에우리피데스(기원전 484?~406?)의 <트로이아 여인들>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모든 전쟁은 패자에게 잔혹하다. 그리스 군에게 함락된 트로이 인들에게 역시 그랬다. 고대 전쟁의 특징은 패자의 모든 재물과 전리품이 승자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완전한 승자독식(勝者獨食)이다. 당연히 패전국의 백성들은 승자의 노예가 되는 게 관행이었다. 승자독식은 패자에겐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된다.

​화려한 궁정생활에 젖어있고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왕족과 귀족 역시 승자들 마음대로 분배되거나 제비뽑기를 통해 배분되었다. 전사였던 남성들은 대부분 도륙되고, 여성과 어린이들은 승전 공로의 우선순위에 따라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 노예로 배속된다. ​

이 작품은 트로이가 멸망한 이후에 트로이 왕비 헤카베와 공주 카산드라와 폴뤽세네, 왕자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 파리스 왕자의 아내 헬레네에게 덮친 비운의 운명을 그리고 있다.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미 알고 있듯이, 트로이 전쟁의 발단은 절세의 미인인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눈이 맞아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 데에서 비롯되었다.

파리스가 헬레네를 트로이로 납치했다고 판단한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당시 최고의 세력을 떨치고 있던 친형 미케네 왕국의 아가멤논에게 트로이를 정벌하자고 부추겨 전 그리스 연합군을 모아 전쟁을 개시한다. 하지만 트로이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고전을 하다 ‘트로이 목마’ 작전을 통해 10년 만에 가까스로 트로이 왕성을 함락시킨다. 기원전 13세기 중반의 일이다. 불멸의 고전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이 트로이 전쟁의 전모를 자세히 전하고 있다.

   
▲ 트로이 왕성의 성곽 유적, ⓒ박경귀

   
▲ 트로이의 인근 도시 카낙칼레에 전시되고 있는 영화 ‘트로이’에서 사용된 목마 ⓒ박경귀

아무튼 트로이가 함락되자, 트로이 왕가의 여인들 또한 모두 승자의 노예가 되어 뿔뿔이 흩어진다. 나라가 망하면서 가족도 해체된 것이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왕비 헤카베는 오뒷세우스의 몫이 된다. 딸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의 첩으로 배정되고, 작은 딸 폴뤽세네는 죽은 아킬레우스를 달래기 위해 제물로 바쳐진다. ​

헥토르의 정숙한 아내 안드로마케는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의 첩이 된다. 안드로마케의 아버지 에에티온(Eetion)은 아킬레우스에 죽임을 당했다. 에에티온이 다스리던 트로이 인근의 플라코스(Plakos) 산기슭에 있던 도시 테바이는 트로이 전쟁의 와중에 아킬레우스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에에티온은 그 때 아킬레우스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런 마당에 남편 헥토르마저 아킬레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니 안드로마케에게 아킬레우스는 철천지원수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안드로마케가 그 원수의 아들의 노예가 되다니 이는 더 할 수 없는 치욕이었을 것이다.

이런 비극은 이미 헥토르에 의해 예견되었었다. <일리아스>에는 전투에 나서는 헥토르를 말리는 안드로마케와 헥토르의 눈물겨운 이별의 대화가 가슴을 적시는 대목이 나온다. 안드로마케는 눈물로 헥토르의 발길을 잡는다.

“당신은 어린 자식과 머지않아 과부가 될 이 불행한 아내가 가엾지도 않은가 봐요. 머지않아 아카이오이족이 모두 당신에게 덤벼들어 당신을 죽이게 될 테니 말예요. 내가 만일 당신을 잃게 된다면 땅속으로 들어가는 편이 내게는 더 나을 거예요.”

하지만 트로이를 구해야 할 소명은 안고 있는 헥토르는 트로이의 멸망과 안드로마케의 비운의 운명을 예견하면서도 전쟁터로 나아갔다.

“언젠가는 신성한 일리오스와 훌륭한 물푸레나무 창의
프리아모스와 그의 백성들이 멸망할 날이 오리라는 것을.
그러나 트로이아인들이 나중에 당하게 될 고통도,
아니 헤카베 자신과 프리아모스 왕과 그리고 적군에 의해
먼지 속에 쓰러지게 될 수많은 용감한 형제들의 고통도,
청동 갑옷을 입은 아카이오이족 가운데 누군가 눈물을 흘리는
당신을 끌고 가며 당신에게서 자유의 날을 빼앗을 때
당신이 당하게 될 고통만큼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소.“

헥토르가 예견했던 왕가의 여인들은 그리스인들의 노예가 되었다. 노예가 된 여성들은 남성들의 첩이 되거나 다른 노예와 똑같이 가사 노동에 시달리게 된다. 헤카베는 이런 불행을 만든 헬레네를 비난하고, 신이 들린 카산드라가 아가멤논과 강제로 결혼하게 되면, 아가멤논을 죽이고 그의 가문을 파괴하여 아버지 프리아모스와 오빠 헥토르의 원수를 갚게 될 것이라고 공언한다.

훗날 그녀의 저주는 끔찍하게 실현된다.​ 아이스퀼로스는 비극 작품 <아가멤논>에서 카산드라가 아가멤논의 첩이 되어 미케네 왕성으로 끌려가서 저주하는 내용과, 아가멤논이 자신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비참하게 살해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이 극도의 불행에 휩싸이면 불운을 초래한 사람에게 원망을 퍼붓는 것은 당연하다. 트로이의 비극적 멸망을 초래한 원흉으로 헬레네가 지탄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트로이의 왕비 헤카베와 헬레네는 헬레네를 죽일 수 있도록 인계받은 남편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 앞에서 설전을 벌인다. 헤카베는 헬레네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헬레네는 메넬라오스에게 목숨을 구걸한다. 헬레네가 메넬라오스에게 목숨을 구하기 위해 늘어놓는 궁색하고 치졸한 변명이 주목을 끈다. ​

트로이 전쟁의 비극의 씨앗은 분명 헬레네에게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눈이 맞아 사랑의 도피를 했던 것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탓으로 돌리는 무책임하고 뻔뻔한 변명을 한다. 배신감과 분노에 사로잡힌 남편 메넬라오스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헬레네의 주장은 정말 얼토당토않은 얘기들이다. ​

자신의 도피 행각의 원인을 파리스를 낳은 헤케베에게 때문이라고 하고, 프리아모스가 불행의 씨앗이 될 파리스를 어릴 적에 죽이지 않은 것이 두 번째 원인이란다. 황당한 논리다. 게다가 자신의 미모 때문에 끌려 간 것이지, 자신이 스스로 달아난 것이 아니라고 둘러댄다.

   
▲ ​<파리스를 따라간 헬렌>, Benjamin West(1738–1820), 1776년 작, American Art Museum 소장

​​특히 이런 모든 일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아프로디테의 운명적 개입으로 빚어진 것이라고 변명한다. 자신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얘기다. “신들의 잘못을 내게 돌리지” 말라는 그녀의 읍소는 어처구니가 없다. ​

메넬라오스는 수많은 그리스 전사를 죽게 만든 10년 전쟁의 원인 제공자 헬레네를 죽이려 했지만, 미모를 잃지 않은 그녀의 자태와 그녀의 애걸복걸에 마음이 흔들려 결국 굴복하고 만다. 메넬라오스는 그녀를 그리스로 데려가기로 한다. 이 와중에 헥토르의 어린 아들은 후환을 두려워하는 그리스 군에 의해 성벽 아래로 던져져 처참하게 죽게 되고, 손자의 장례를 준비하는 헤카베의 가슴은 찢어진다. ​

반면 트로이 최고의 용사였던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와 시어머니 헤카베 사이에는 갈등과 저주가 아닌 위로와 삶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안드로마케는 차라리 죽은 공주 폴뤽세네가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헥토르를 사랑했던 정숙한 안드로마케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남편을 죽인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의 첩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혔던 것이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랑이에요. 하지만
죽은 그녀가 살아있는 저보다 더 행복해요.”

​수치심에 절망하는 안드로마케에게 시어머니인 헤카베는 용기를 주려 애쓴다.

“아가, 죽음과 삶을 혼동해선 안 된다.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삶에는 그래도 희망이 있으니까.”

​오히려 헤카베는 안드로마케에게 네옵톨레모스의 사랑을 받아 어린 아들을 잘 길러 훗날 트로이를 부활시킬 수 있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헥토르의 아들을 죽여 이들의 희망의 싹을 자른 것이다. ​

참혹한 살육의 전쟁보다 살아남은 자들이 받게 되는 구차한 삶의 고통과 가족의 해체로 인한 깊은 상처가 전쟁이 만들어내는 더 큰 비극이다. 에우리피데스는 이런 전쟁의 참상 속에서 인간들이 비참한 상황을 어떤 식으로 대하고, 또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얼마나 비겁해 질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

에우리피데스는 자유를 상실하는 자들이 겪게 되는 비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또 자식과 남편에 대한 숭고한 사랑을 보여주는 한편, 목숨을 구걸하는 경멸스런 인간상도 함께 대비해 준다. 그리스 인들에게 전쟁이 만들어내는 필연적인 비극을 통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교훈을 주려한 것 같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133-3: <트로이아 여인들(Troiades)>, 《에우리피데스 비극전집 Ⅰ》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2011, 2쇄), 6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