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1966년 작품 ‘침묵(沈默)’은 명저가 늘 그렇듯 시대의 유산으로 전해진다. 기독교 자양분이 부족한 일본에서 동토개화(凍土開花)한 침묵은 기독교 경전에 비정할 만큼 기독교 문학의 정수로 추앙받는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을 배경으로 인류의 영원한 질문 중 하나인 “종교를 통해 인간의 구원받을 수 있을까”를 묻고 대답한다. 그러나 정답을 내놓지는 않는다.

국내 알려진 건 책과 함께 영화가 큰 역할을 했다. 침묵을 원작으로 제작된 두 개의 버전 중 2016년 마틴 스코세이지가 감독하고 리암 니슨이 주연한 영화 ‘사일런스’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영화는 1600년대 초반 일본 선교에 나선 포르투갈 출신 가톨릭 신부 3명이 일본 정부(막부)의 극한 박해를 맞는 각각 다른 모습을 그린다. 죽음 앞에서 끝내 응답하지 않는 신(神)으로 인해 절망하는 이들과 침묵으로 응답하는 신의 소리를 듣는 이들의 선택은 깊은 울림을 주었다. 특히 “영웅적 순교만이 진정한 신앙인가”하는 질문은 영화가 끝나도 여운을 남겼다.

영화에 몰입하는 이들의 머리를 떠나지 않는 건 다양하고 잔인하게 이어지는 고문 장면이다. 막부는 순교하려는 자에게 죽음을 내린다. 하지만 이들은 칼날이 번뜩이는 찰나의 순간을 통해 삶이 경계를 넘어 죽음에 이르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삶을 부정하고 싶은 극한의 고통과 두려움을 강제한다. 발가벗겨진 채 바닷가 십자가에 매달린 이들은 썰물이 밀려와 자신들을 익사시킬 때까지 긴 시간 동안 죽음의 공포와 마주한다. 화형당하는 이들이 울부짖는 소리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도 귀에 쟁쟁하다. 거꾸로 매단 후 머리에 상처를 내고 서서히 목숨을 빼앗는 장면은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를 다시금 묻게 한다. 

   
▲ 고문에 앞서 순교자를 색출하는 ‘후미에(踏み絵)’가 시행된다. 기독교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줄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가 새겨진 성상이나 그림을 밟고 지나게 하는 방식이다. 사진은 영화 사일런스의 한 장면.


고문에 앞서 순교자를 색출하는 ‘후미에(踏み絵)’가 시행된다. 기독교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줄 세우고 예수 그리스도가 새겨진 성상이나 그림을 밟고 지나게 하는 방식이다. 신자가 아닌 사람은 무심히 밟고 지나지만 신자의 경우 밟지 못할 것이라는 발상이다. 순진한 발상이지만 신앙한다는 게 순수한 것이라 신자들은 차마 성상을 밟지 못하고 눈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한 후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다. 

한국 정치는 후미에를 애용한다. 권위주의 정권의 치하에서 살아남은 사상범들이 작성한 사상전향서와 형제지간이다. 유신의 시대를 거치며 학생운동에 나섰거나 통일운동에 나섰던 이들은 자발적이거나 비자발적으로 사상전향서를 작성하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누구는 좁은 취조실에서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고백서를 썼다. 또 다른 누구는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지는 현실 속에 자신의 생각이 바뀌었다는 회한을 글에 담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전향서 이후에도 시시때때로 ‘자신의 머릿속을 공개하는’ 후미에를 행해야 했다. 현재 대한민국 정치를 주도하는 여야의 정치인 중 다수가 경험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현실 정치가 후행하고 격쟁으로 치달을 때 후미에는 자주 등장한다. 뒷걸음을 많이 칠 필요 없이 올해 벌어진 여야의 대표적 정치 이슈를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여당인 국민의힘 소속 나경원 전 의원은 1월 초 당 대표 선거에 나서려 선거캠프까지 꾸렸으나 불출마를 선언했다. 여론은 “사퇴한 것이 아니라 사퇴당했다”고 해석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강한 힘이 작용하자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던 나 전 의원은 갑자기 공공의 적이 됐고 맥없이 낙마했다. 이 과정에서 50명에 이르는 국민의힘 초선의원들은 “나 전 의원이 대통령의 뜻을 왜곡했다”며 불출마를 촉구하는 취지로 성명서를 발표, 나 전 의원 낙마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시대가 시대인 만큼 나 전 의원의 낙마 과정은 온라인 사회관계망을 통해 숨가쁘게 전파됐다. 페이스북 등을 통해 당초 20여 명으로 시작한 성명서 동참의원들이 50명으로 늘어나는 과정도 생생하게 전해졌다. 48명으로 확정됐던 참여 의원 수는 막판 2명의 강한 청원으로 50명이 됐다. 성명서 참여 의원이 늘어나면서 여의도에는 흉흉한 소문이 잇달았다. 성명서에 불참한 의원들은 내년 총선에서 공천이 불가하다는 내용이다. 국회의원의 아킬레스건이자 존재 이유를 건드리자 수많은 의원이 “나경원은 나쁘다”는 후미에를 거쳐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는 전언이다. 

야당인 민주당도 후미에라는 후행 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재명 대표의 체포동의안 처리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근저에 후미에가 자리잡았다. 역사 후행적인 후미에가 민주당 내부에서는 ‘수박 가려내기’의 탈을 썼다. 이 대표의 강성지지층은 민주당 국회의원 가운데 이 대표 체포동의안에 반대하지 않은 의원들을 겉은 파랗지만 속은 빨간 수박 같은 국짐(국민의힘 비하 표현)의 첩자라고 주장한다. 이 대표 체포동의안이 부결로 처리된 후 온라인에는 “수박, 국짐 첩자 7적 처단하자”는 7명의 명단과 이미지가 퍼졌다. 이 명단에는 미국에 체류 중인 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는 물론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포함됐다. 

앞서 이재명 대표의 강성 지지자들인 ‘개딸(개혁의 딸들)’은 30여 명을 수박으로 지목했다. ‘부결에 투표했는지 밝히지 않은 의원 29명’에게 후미에를 요구했다. 의심받는 의원 중에는 SNS 등을 통해 자신은 이 대표 체포동의안에 부결 투표를 했노라 선언했다. 황급히 성상을 밟은 것이다. 과거 후미에의 주체가 체제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이었다면 민주당의 경우는 대표를 지키겠다는 친위세력이 주어다. 이들은 민주당 권리당원이 대부분으로 그동안 민주당의 각종 당무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이들은 각종 선거에서 민주당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주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찍히면 문자 테러나 18원 입금의 공포와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다.

후미에 정치는 민주주의 정치에 암적 존재다. 역사를 퇴행시키고 국론을 소아적 이익에 함몰시킨다. 대표적인 뺄셈 정치로 불구대천의 정적을 양산한다. 극단적 정쟁으로 편향성을 가중시켜 사회적 에너지를 소모한다. 무엇보다 국가와 사회에 있어 정치의 영역은 축소되고 상대를 악마화하고 멸절시키겠다는 증오만 살을 찌운다. 결과는 공멸이다.

미디어펜= 김진호 부사장
[미디어펜=김진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