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와 달리 이승만은 ‘민주주의 가치’ 훼손하지 않았다
자유경제원은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이라는 주제로 연속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 제3차 토론회는 11일 자유경제원 5층 회의실에서 “이승만은 부정선거로 당선됐다는데?”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토론자로 참석한 남정욱 교수(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는 “이승만을 독재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 것은 한 가지로 충분하다. 당시 자유당 정권 시절 언론에 대한 통제가 있었느냐고 되물으면 그만”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4.19 당시 언론은 대통령의 말을 실시간으로 반박했고 사진까지 실어가며 자유롭게 자기 목소리를 냈다. 세상에 어떤 독재자가 언론을 놔두고 독재를 실현하는가. 언론 자유가 보장된 독재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사사오입은 정쟁의 논리였지 민주주의의 훼손은 아니었다. 이승만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신봉했고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훼손하지는 않았다”라고 강조했다.

아래는 남정욱 교수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 남정욱 교수

양자였던 이인수가 하와이로 아버지를 뵈러 간 것은 1961년 12월이었다. 큰 절에 함박웃음을 지은 아버지는 곧이어 국내 사정을 물었다. 아들이 “젊은이들이 반공을 하겠다고 하니 잘 되지 않겠습니까?” 대답하자 아버지는 정색하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그 잘 돼간다는 말을 믿지 말거라.” 아버지의 그 ‘잘 돼간다’는 말은 아마도 ‘서대문 경무대’를 염두에 둔 회한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먼 이국땅에서 이승만은 실정에 대한 잘못된 정보로 국정을 그르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1960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둔 이승만은 85세의 고령이었다. 당시 한국 남성의 평균 수명이 54.9세였으니 상당히 장수한 편이다. 그러나 건강은 별로 좋지 못했다. 노회한 정객은 노쇠한 대통령이 되어 일주일에 한 두 차례 국무회의를 주관하는 게 전부였다.

나머지는 이기붕을 중심으로 주요 장관 몇이 국정을 끌고 나가는 형태였는데 이기붕도 건강이 좋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보행성 운동 실조로 주로 의자에 앉아있어야 했으며 일어날 때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심각한 언어 장애를 겪고 있어 의사소통에 문제가 많았다. ‘서대문 경무대’는 이기붕이 아니라 자유당 강경파의 다른 말이었다. 이들이 가장 우려한 것은 대통령의 유고로 정권이 민주당으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조병옥과 장면이 당의 주도권을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두 사람이 공히 원하는 것이 부통령 지명이라는 사실이었다. 직접 선거로 이승만과 맞붙어 이길 자신이 두 사람에게는 없었다.

그들에게 권력 추구는 시간과의 싸움이었고 불확실한 대통령보다 확률 높은(!) 부통령이 더 탐나는 자리였던 것이다. 여당인 자유당이 무리수를 던지게 된 절실한 까닭이다.

80대 중반의 대통령 후보와 60대 중반의 부통령 후보가 출마했다. 민주당에서 조병옥은 장면에게 패배했고 영양가 없는 대통령 지명을 받았다. 실속 있고 생명력 있는 부통령 지명은 장면의 차지였다. 선거에서 이승만은 총투표수의 88.7%를 얻었고 이기붕은 822만 5천표를 얻어 185만 표를 획득한 장면 후보를 눌렀다.

이기붕이 문제였다. 심각한 부정선거였다. 총책임자는 내무장관 최인규로 그는 야당의 유세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게 일요일에도 등교를 강요하는 등 문제를 키워나갔다. 2월 28일 대구의 경북고등학교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선거 당일은 부정의 절정이었다. 농촌에서는 노골적으로 3인조 공개투표가 이어졌다. 군대의 투표자는 실제 인원의 120%였다.

찍은 사람은 없는데 표는 나왔고 국민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민주당의 텃밭인 마산과 대구에서 이기붕이 압승을 거둔 것은 미숙한 시나리오 작가가 쓴 최악의 설정이었다.

3월 15일 선거 당일 마산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진다. 시위 도중 고등학생 김주열이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다. 경찰은 김주열을 바다에 내다 버렸고 시신이 떠오르면서 시위는 격화되기 시작한다.

이승만은 병원으로 달려가 부상자들을 위로했다. “젊은이들이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 학생들의 손을 잡고는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되었어?

부정 선거를 왜 해?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 젊은 학생들은 참으로 장하다.” 4월 26일 이승만은 측근인 김정렬의 보고를 듣고 이렇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내가 그만 두면 한 사람도 안 다치겠지?” 김정렬은 눈시울을 붉히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세를 파악하고 민심을 읽은 이승만은 즉각 사임한다.

   
▲ 이승만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신봉했고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훼손하지는 않았다. /사진=자유경제원

이승만은 두 개의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했던 그는 자신이 대한민국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기한 없는 영원은 아니었다. 물리적 노화가 그의 마음 속 기한을 한없이 늘려갔다. 루스벨트, 처칠, 아데나워, 드골처럼 그는 자기 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휴식이 필요하니 여러 가지 도전과 일의 부담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60년에는 물러나는 게 어떻겠냐는 로버트 올리버의 말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것 참 더 바랄 것 없는 이야기구려. 그러나 투쟁은 누가 맡아 해 줄 것이오?”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한 이승만을 영접하기 위해 오중정 영사가 트랩을 올라갔다. 노부부는 맨 가운데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영사가 인사하자 이승만은 반가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기 좀 쉬러왔어. 한 3주일 쉬고 갈 거야.” 진담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귀국하여 이화장에서 다시 정치 인생을 재개할 계획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대목에서 이승만을 비난해서는 곤란하다. ‘독립선언’과 ‘재팬 인사이드 아웃’을 쓰던 명민함과 현실 감각을 여든의 나이까지 강요하는 건 생물학적으로 타당하지 않은 주문이다.

또 하나의 잘못된 정보는 자유당 강경파들로부터였다. 자유당 강경파들은 민심을 차단하고 정보를 왜곡했다. 듣기 좋은 말에 장사 없는 법이다. 이승만의 귀는 달콤하고 기분 좋은 정보에 익숙해졌다. 이승만이 들은 세상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살기 좋은 곳이었고 국민들은 이승만을 칭찬하고 받드는데 열심이었다.

내무부 장관에 원칙주의자였던 김일환을 발탁한 것은 선거를 공정하게 치루겠다는 이승만의 자신감이자 의지였다. 58년 9월 경북 영일을 재선거를 선거 부정으로 판단, 자유당 당선자를 당선 무효 시킨 김일환의 결정을 이승만은 지지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자유당 강경파들을 경악시켰고 ‘최후에 써먹을 총알’이라는 얘기를 듣던 최인규의 등장을 앞당겼다. 이승만은 자유당 강경파들의 설득과 주장을 끝까지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경파들은 김일환에게도 압박의 수위를 높였다. 짧은 재임 중 이승만에게 두 차례나 사직서를 제출한 것이 그 반증이다. 꼿꼿한 성품에 이기붕을 제치고 대통령에게 직보를 했던 뚝심의 김일환이 휘청거린 것을 보면 그 수위를 짐작할 수 있다. 마침내 이승만은 자유당 강경파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각하와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인사입니다.” 이승만의 판단력은 마지막 순간 흔들렸다.

그렇게 43세의 최인규가 내무장관의 자리에 오른다. 최인규는 1919년생으로 경성고등상업학교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졸업하고 당시 일반인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미국 뉴욕대학교 상과를 졸업한 인텔리였지만 권력 앞에서는 별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는 지방 자치 단체장들을 모아놓고 “세계 역사상 대통령 선거에서 소송이 제기된 일이 있느냐? 법은 나중이고 일단 당선시키고 봐야 한다.

콩밥을 먹어도 내가 먹고 징역을 가도 내가 간다.”는 무식한 세계관을 피력했다. 그는 그 좋은 머리를 참 단순하고 나쁘게 썼고 기어이 자유당 정권을 몰락시킨다. 이승만은 자신이 더 오랫동안 대통령에 있어야 한다고 믿었고(물론 목표는 통일) 자유당은 그런 이승만을 우산으로 삼아 영원히 권력의 꿀물을 빨아먹고 싶었다. 그 좋지 않은 결합이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에서 독재자라는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빌미가 되었다.

이승만을 독재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는 것은 한 가지로 충분하다. 당시 자유당 정권 시절 언론에 대한 통제가 있었느냐고 되물으면 그만이다. 4.19 당시 언론은 대통령의 말을 실시간으로 반박했고 사진까지 실어가며 자유롭게 자기 목소리를 냈다. 세상에 어떤 독재자가 언론을 놔두고 독재를 실현하는가. 언론 자유가 보장된 독재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사사오입은 정쟁의 논리였지 민주주의의 훼손은 아니었다.

이승만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신봉했고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도 그것을 훼손하지는 않았다. 그 가치에 대한 신봉이 존경으로까지 이어진 건 아니지만. /남정욱 숭실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