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지적 거인' 복거일 선생의 지식 탐구에는 끝이 없다. 소설과 시, 수필 등의 왕성한 창작활동을 하면서도 칼럼과 강연 등으로 대한민국이 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방대한 지적 여정은 문학과 역사를 뛰어넘는다. 우주와 행성탐구 등 과학탐구 분야에서도 당대 최고의 고수다. 복거일 선생은 이 시대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창달하고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장경제 학파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고 있다.

암 투병 중에도 중단되지 않는 그의 창작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은 지금 '세계사 인물기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디어펜은 자유경제원에서 연재 중인 복거일 선생의 <세계사 인물기행>을 소개한다. 독자들은 복거일 선생의 정신적 세계를 마음껏 유영하면서 지적 즐거움을 누릴 것이다. 이 연재는 자유경제원 사이트에서도 볼 수 있다. [편집자주]

 

   
▲ 복거일 소설가

사람은 누구나 우아하게 살고 싶어한다. 우아한 삶이야 물론 여러 가지 모습을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는 우아한 삶은 아마도 서양의 기사도(騎士道)를 따르는 것일 터이다.

중세 서양의 모범적인 기사들처럼, 명예를 귀하게 여기고, 약한 사람들을 감싸고, 적에게 너그럽고, 위험한 처치에서 용감하게 나서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특히 복잡한 도시에서, 그런 삶을 실제로 살 수는 없다. 최소한의 공공 정신을 발휘하기 위해서도, 때로 우리는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기사도가 제대로 실천됐던 세상은 없었다. 기사도가 나온 중세 서양에서도 그것은 사람들의 실제 행동과는 거리가 먼 이상적 규범이었다. 동양에서 기사도에 가장 가깝고 비교적 잘 정리된 규범은 일본의 ‘부시도(武士道)’인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도 사정은 비슷하다.

일본에서 무인들이 득세한 것은 12세기 말엽 가마쿠라에 바쿠후가 들어선 때부터였다. 그러나 부시도가 무사들의 규범으로 정립된 것은 18세기 중엽 유학자 야마가 소코오(山鹿素行 1622~1685)에 의해서였다. 그리고 부시도는 무인들의 실제 삶과는 거리가 멀었고, 특히 14세기 무로마치 바쿠후 시대엔 이미 하극상의 풍조가 널리 퍼졌었다.

우이한 삶은 그렇게 어렵고 드물다. 보통 사람들에게도 어렵지만, 현실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해야 하는 공인들에겐 더욱 어렵다. 그러나 역사를 살펴보면, 평생 기사도를 실천하면서 큰 업적을 남긴 공인들도 있다.

대표적인 예는 흔히 살라딘(Saladin)이라 불리는 살라딘 유수프 이븐 아유브(Salah-al-din Yusuf ibn Ayyub, 1138~1193)다. 살라딘이 살았던 때는 십자군 운동(Crusade)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로, 그는 평생 회교의 수호자 노릇을 했다. 그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회교도들을 이끌고 십자군들이 세운 지중해 연안의 예루살렘 왕국에 맞서 줄기차게 싸웠다.

마침내 1187년 그는 북부 팔레스타인의 하틴에서 예루살렘 왕국이 총동원한 군대를 완파했고, 그 결정적 싸움에서 패배함으로써 십자군 운동은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다. 여섯 해 뒤 살라딘은 죽었지만, 그가 세운 ‘아유비드(Ayyubid)왕조’는 13세기 전반까지 중동을 다스렸다.

“장군으로서 그는 조심스러웠고, 전술가라기보다는 전략가였다. 행정가로서의 그는 그의 시대보다 훨씬 앞섰었다. 그러나 그가 우뚝 선 것은 자연인으로서였으니, 그의 적들에 대한 그의 가사도적 태도는 동양에서 아직 읽히는 낭만적 문학 작품들을 낳은 매력으로 그를 감쌌다, 십자군들의 유럽인들이 이교도에게 한 약속을 깨뜨리는 것을 불명예로 여기지 않는 일이 흔했음을 생각하면, 이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라고 영국의 군인이자 전쟁사가였던 존 폴러(John Frederick Charles Fuller, 1878~1966)는 살라딘을 평했다.

살라딘의 실제 모습은 여러 일화들에서 잘 드러난다. 다음 일화는 전형적이다. 레이날드 드 샤티용(Reynadld de Chatiallon)은 요르단을 지배하던 강자였는데, 휴전 조약을 어기고 거듭 회교도 대상들을 습격한데다가 회교 성지들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1182년에 살라딘은 그를 치러 나섰다.

그러나 레이날드의 근거지인 케락은 난공불락의 요새여서, 살라딘은 이미 한 차례의 공격에서 실패한 터였다. 마침 예루살렘 왕국의 공주가 결혼하는 날이어서, 이번엔 기습 작전이 성공했다. 그래서 레이날드와 그의 기사들은 가까스로 성 안으로 물러났고, 성 둘레의 외호(外濠)위에 세워진 도개교(跳開橋)를 들어올릴 시간도 없어서, 기사 하나가 도개교 위에 서서 지키는 사이, 수비군들은 그 뒤에서 다리를 톱질해서 끊고 있었다.

성은 곧 공격군에게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때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레이날드가 살라딘에게 결혼 케이크 한 조각을 보내자, 살라딘은 그 케이크를 거절하지 않았다. 이어 신혼 부부가 머무는 탑에 해가 가지 않도록 하라고 궁수들과 포병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집중하지 않았으므로, 결국 살라딘의 공격은 실패했다. 하틴의 싸움에서 완승함으로써, 살라딘은 쉽게 예루살렘을 얻을 수 있었다. 예수살렘에 입성한 뒤, 그가 거기 살던 기독교인들에게 내건 조건은 놀랄 만큼 관대했으니, 사람마다 금 열 냥을 보석금으로 내라는 것이었다. 이어 그는 그 돈을 내지 못한 사람들을 모두 풀어줬다. 제1차 십자군 원정에서 기독교 군대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그들은 사흘동안 수만 명의 회교도들을 죽였다.

그 끔찍한 기억이 아직 모든 회교도들의 마음속에 생생했으리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보인 너그러움은 한결 두드러진다. 이교도와 힘든 싸움을 하던 국왕이 그렇게 너그럽고 우아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를 흐뭇하게 한다.

그런 흐뭇함을 더욱 알차게 하는 것은 그런 기사도적 행동이 궁극적으로는 그의 성공을 도왔으리라는 생각이다. 지도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산은 높은 평판이니, 그것이 없으면, 누구도 사람들을 이끌 수 없고 큰일을 할 수 없다. 비록 우리가 살라딘을 따르기는 어렵지만, 그런 인물이 실재했다는 생각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은 얼마나 시원하고 든든해지는가.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