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69)- 법 안의 자유가 공화다
키케로(BC 106~BC 43)의 <국가론>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헌법 제1조 1항의 내용이다. 대한민국은 우리의 강토 위에서 명멸했던 숱한 국가 가운데 그 어떤 나라보다 빛나는 역사와 성취를 만들어 냈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국가의 주인으로 등장한 최초의 근대국가라는 그 점만으로도 건국의 업적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공화국의 토대가 되는 ‘민주’와 ‘공화’의 가치를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까? 나아가 그 가치를 얼마나 내면화하고 현실 사회에서 구현하고 있을까? ‘민주’만 강조되고 ‘공화(共和)’는 실종된 모습이 우리의 자화상은 아닐까?

일찍이 공화의 가치를 고민하고, 이를 구현하고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사람이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였다. 그의 국가관과 철학에서 ‘공화’의 가치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이 배어있는 책이 바로 <국가론>이다.

키케로는 로마 최고의 문장가이면서 걸출한 웅변가이자,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넘어가던 로마 정치사 한가운데서 결연하게 공화정을 수호하려 애쓰던 정치가였다. 그는 혼합정체론 및 자연법 개념을 받아들인 스토아 철학에 심취한 로마의 지식인 모임이었던 스키피어 서클의 멤버들 간의 대화를 기록하는 방식으로 <국가론>을 저술했다. 당대 최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지도층 간의 대화라는 허구의 기법을 통해 키케로 자신의 철학을 표현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저술의 ‘대화법’ 형식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이 책은 1819년에 재활용된 양피지에 이중으로 기록된 부분적인 필사본들이 우연히 발견되어, 고전학자들이 번거로운 화학처리 및 분리, 판독과정을 통해 어렵게 발간했다. 그나마 그 분량도 원저의 약 4분의 1에서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고 추정된다.

이런 까닭에 책의 중간 중간 빠진 부분이 많고, 당시 <국가론>을 인용했던 다른 문헌의 내용을 삽입함으로써 원저의 소실된 부분을 보충하고 있다. 이로 인해 독자들이 키케로의 주장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국가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라

이 책은 모두 6권으로 나누어져 기술되었다. 키케로는 서문과도 같은 이 책의 서두에서 국정에 참여하는 정치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낸다. 나아가 현자라면 언제든지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도록 요청받을 수 있으므로 '시민의 일(res civilis)'에 대한 지식을 갖출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 공동체에 기여해야 할 지식인의 책무를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키케로가 지식인의 정치참여를 고귀한 활동으로 본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와 같다.

“조국은 우리의 정신, 재능, 예지 중에서 가장 많고 큰 부분을 조국 자체의 유익을 위해서 담보로 잡고 나서 나머지가 있을 경우에 우리에게 사적인 용도로 되돌려주도록 한 것이다.“ 그의 말에서 자신의 유익보다 조국의 유익을 우선시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의 정신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 키케로 흉상, 1세기 중반 작품, 로마 카피톨리노 박물관 ⓒ박경귀
키케로의 국가의 기원에 대한 생각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국가란 ‘법에 대한 동의와 유익의 공유에 의해서 결속한 다수의 모임’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결합은 인간의 연약함 때문이라기보다, 자연스런 군집성(congregatio) 같은 것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국가의 형성은 인간 본연의 속성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귀결인 셈이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를 지탱할 ‘법에 대한 동의와 유익의 공유’야말로 그가 존중하는 공화(共和)의 가치 가운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국가의 바람직한 정체에 대해 키케로는 스키피오의 입을 빌어, 왕정, 귀족정, 민주정 등의 장점과 폐해를 논한다. 결국 이 세 가지가 ‘동등함을 유지’하는 국가체제, 즉 혼합정의 상태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집정관과 원로원, 민회가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로마의 공화정이야말로 ‘체제, 질서, 규율의 면에서’ 최상의 국가 양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 로마의 건국과정과 고대 로마 왕들의 치적을 상고하면서 공화정의 탄생과정을 상기시킨다. 이 부분에서 로마의 왕정기에 이미 운 좋게도 이미 공화정의 싹이 움트는 환경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법 안의 자유가 공화(共和)다

키케로는 집정관에게 권한을, 원로원에는 권위를, 인민에게는 충분한 자유를 보장하는 체제로서의 공화정이 국가를 지속하게 한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최상, 최하, 중간 계층의 모든 사람이 합의와 화합을 이룰 때 정의롭게 되고, 그것이 국가의 ‘안전띠’가 된다고 본 것이다. 그가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제정(帝政)으로 옮겨가려던 카이사르,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대결했던 이유도 이런 신념에 기초한다.

   
▲ 로마 카피톨리노 박물관의 내부 회랑에서 내려다 본 포로 로마노(Foro Romano)의 황혼의 전경이다. 이 곳은 로마 공화정의 정치 활동의 중심지였다. ⓒ박경귀

   
▲ 로마 공화정의 정신은 ‘로마의 원로원과 인민’을 뜻하는 약자 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로 표상된다. 로마 공화정 시기에 이 표어는 로마 공화정부를 이르는 문장(紋章)으로 널리 쓰였다. 사진은 포로 로마노에 남아 있는 유적지에 SPQR이 새겨진 모습이다. ⓒ박경귀
키케로는 인민의 자유가 자의에 따라 이루어질 때 방종이 되므로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계약의 형태로 국가가 형성된다며, 남에게 불의를 가하지도 자신이 겪지도 않는 상태가 바람직하며, 인민들 사이에 공평, 정의, 신의가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이런 길로 인도하는 것이 올바른 이성과 자연에 부합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신성한 법, ‘하늘의 법’이 모든 국가들의 보편적 통제의 수단이 되어야 하며 이에 복종하지 않을 경우 파멸과 대가가 따른다고 말한다. 이런 대목에서 17세기 정치철학자 홉스와 로크의 국가의 기원에 대한 관념이나 자연법 사상에 영향을 주었음을 느낄 수 있다.

키케로는 라일리우스의 입을 빌어 법을 무시하는 대중의 위험성을 ‘잔인한 짐승’에 빗대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 2천년의 시대를 넘어 지금의 우리 사회에 적용해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떻게 대중이 주인 노릇하는 상태 속에 국가라는 이름이 생기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오. … 법에 대한 합의로 억제되지 않는 자들은 인민이 아니기 때문이오. 오히려 인민이 한명의 사람처럼 모일 때는 참주나 다름없는데, 이 경우가 더욱 무서운 법이지요. 왜냐하면 인민의 모습과 이름을 흉내 낸 것보다 더 잔인한 짐승은 없기 때문입니다.”

키케로는 국가의 구성원인 인민들이 자신들을 통치할 법에 대해 합의가 필요하고 이런 법이 없다면 국가가 존속할 수 없다고 보았다. 특히 그는 자연적인 정의의 존재를 부정하고, 오히려 정의는 진실하고 영원하며 보편적인 법 안에 내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면서도 자유야말로 건전한 사회질서를 이루는 주요한 요소로 보았다. 법을 제정하는 목적도 자유를 평등하게 공유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며 법치를 강조한다.

키케로의 정치철학에는 플라톤과 달리 현실 정치인의 관찰과 체험이 진하게 배어있다. 키케로의 <국가론>은 로마 공화정을 수호하고자 헌신하던 현실 정치인의 고민과 당시 지배층의 시각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특히 공화주의의 가치 철학의 뿌리가 된 개념들이 많이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자유 민주 정치사상 연구에도 유용한 시사를 준다. 키케로가 강조한 공동체를 우선하는 법질서와 ‘법 안의 자유’와 같은 공화(共和)의 가치야말로 명색이 ‘민주공화국’인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가장 절실한 가치이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국가론>, 키케로 지음, 김창성 옮김, 한길사(2007), 3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