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서 장관까지, 그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당대 최고의 문인들을 비판한 <우상의 파괴>로 등장해 초대 문화부 장관의 자리에 오른 이어령. 그의 사회 참여 정신과 순수문학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여정, 그리고 초대 문화부 장관에 올라 이루어 낸 업적들까지 KBS1 <한국현대사증언 TV자서전>에서 토요일 오전 6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돌아본다.

▶열렬한 참여문학가에서 돌연 순수문학가로
“사회 참여를 끊고 문학은 문학으로서 독립되어야 한다. 절대 정치에 이용당하거나 시녀가 되지 마라. 장사가 되는 사회문학, 그것은 문학을 오히려 해치는 것이다.”

『새벽』의 편집위원을 맡아 활발한 사회 참여 활동을 보여준 그가 돌연 순수 문학으로 돌아섰다. 남북 이데올로기 문제를 최초로 다룬 소설인 최인훈의 <광장>을 게재하는 등 참여 문학의 선봉장이었던 그가 대표적 참여 시인 김수영과 ‘불온시 논쟁’을 벌이며 참여 문학에 등을 돌리고 만다. 참여 문학의 흥행의 수단으로 성행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는 이어령. 문학사 최대의 사건인 김수영과의 불온시 논쟁을 통해 진정한 문학에 대한 그의 견해를 세세하게 파헤친다.


문학의 자유와 문학의 확대를 이끈 이어령
▲문학의 자유와 문학의 확대를 이끈 이어령



▶문학의 자유를 외치며
1966년 7월, 그가 재판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박정희 군부 정권이 들어선 이후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던 시절, 미군의 만행을 다룬 소설 <복지>로 인해 작가 남정현이 구속됐다. 희대에 반공법 필화 사건으로 알려진 남정현 구속 사건에서 문학의 자유를 역설했던 이어령. 그는 ‘달을 보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있다’는 비유로 당대 독재 정권을 비판했다.

“글 쓰는 사람으로서 글 쓰는 사람이 저렇게 재판 받는데 가서 글의 자유를 이야기해야지. 한없이 떨리고 두렵지만 문학을 지키기 위해서 갔죠.” 정승처럼 꼿꼿한 이어령도 독재 정권에 맞서는 것이 두려웠다는데… 문학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힘썼던 시간들과 『문학사상』으로 만인의 문학을 이루고자 했던 그의 흔적을 살펴본다.


▶88올림픽 기획, 초대문화부 장관.... 문화행정가 이어령.
“세상에, 올림픽을 하다니 정말 가슴이 뛰는 거예요. 이렇게 극적인 것은 세계 역사상 없다. 이걸 내가 좌시할 수 없다고 생각했죠.”

1988년 또 다른 변신을 꾀한 이어령은 문화행정가로 우리의 앞에 섰다. 서울올림픽의 개·폐막식 총 연출을 맡아 성공적으로 이끌어낸 이어령은 그 실력을 인정받아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재탄생한다. 장관으로서 국립 국어원을 발족하는 한편, 일본식 한자어를 고쳐 우리말의 본질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현재 예술인의 산실이 된 한국예술종합학교 역시 그가 이루어냈다. 각종 부처에서 반대했으나 단 5분 만에 판세를 뒤집어 그는 드디어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설립한다. 대한민국의 문화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힘썼던 이어령을 확립하기 위해 힘썼던 이어령을 만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