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맥·학연·지연·사상적 폐쇄성속 '침묵의 카르텔' 형성

[미디어펜=이서영 기자] 대한민국 대표작가 신경숙의 ‘표절’ 문제가 점점 무게를 더해가고 있다. 그런데 가면 갈수록 이 사안 안에 대한민국 문학계의 제반 문제들이 포함돼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신경숙이라는 작가가 지니고 있는 상징성만큼이나 그녀의 표절 문제가 한국 문학계의 여러 병폐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 16일 ‘국가의 사생활’이라는 작품으로 알려진 작가 이응준에 의해서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신경숙의 1996년 단편 ‘전설’의 특정 구절과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의 표현에는 겹치는 부분이 있다. 특히 ‘기쁨을 아는 몸’ 등의 절묘한 표현이 동일하게 반복된다. 독자들은 충격에 빠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번 문제제기가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비롯됐다. 이미 15년 전인 2000년 무렵 한 문학평론가에 의해 같은 문제가 제기됐는데도 출판사 창비와 소설가 신경숙, 그리고 또 다른 평론가들은 이 문제를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이것이 창비, 신경숙 등이 한국 문학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커다란 존재감과 유관하다면 지나친 해석인가?

   
▲ 신경숙 표절 논란. /연합뉴스 TV캡쳐
한국문학이 많은 독자들로부터 외면 받기 시작한 건 꽤 오래된 일이다. 물론 여기에는 ‘시대의 변화’라는 이유도 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있는 시대, 활자보다는 영상의 영향력이 더욱 부각되면서 문학의 존재감이 응축된 건 전 세계적 조류이긴 하다.

허나 한국의 경우 그 위축이 도드라지게 심했다. 여기에는 한국문학이 스스로 독자들에게 사랑받기를 거부하는 듯 보였다는 정황도 한몫을 담당했다. 일반적 한국인들의 고뇌나 고민을 담아내기보다는 특정 소수만을 위한 폐쇄적 담론 - 이를테면 노동문제나 계층문제 등에만 지나치게 천착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현대소설의 주인공들은 죄다 백수 아니면 편의점 알바생들”이라는 자조적 농담이 유행하는 사이 한국 소설은 점점 독자들과 멀어지고 있었다.

작가-독자 간의 연관성이 흐릿해질 때 그 공백을 메우며 ‘현명한 중간자’ 역할을 해줄 수 있는 건 평론가 집단이다. 한국 문학계의 슬픔은 바로 이 평론가 집단들이 그저 ‘거수기’ 역할이나 하면서 가히 주례사 수준의 칭찬만을 늘어놓는 존재로 전락했다는 데에도 존재한다. 출판사-소설가-평론가 간의 권력함수가 작동하면서 자유로운 비평과 자유로운 집필에도 어느 정도 제약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문학계가 다른 어떤 분야보다 폐쇄적인 곳이 되어버렸다. 표절 문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는 건 다른 분야에선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다. 만약 K팝 분야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그 가수-작곡가는 활동을 이어가기 힘들어졌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자정작용이 존재하느냐 부재하느냐가 바로 한국문학과 K팝의 위상 차이로 이어지는 것이다.

신경숙 표절에 대해 검찰 고발이 이뤄지자 문학계 내부에서 나온 목소리는 상징적이다. ‘이것은 문학의 일이므로 문학계 내부의 자정작용에 맡겨야 한다’는 식의 불평이 나온 것이다. 이는 모든 사안에 있어 ‘문학은 예외’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20년 가까이 시간이 흘러도 진행되지 않은 자정작용이 갑자기 지금 와서 이뤄진다는 것도 어불성설 아닌가?

한국문학이 창비의 백낙청 등을 비롯한 몇몇 ‘파워맨’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고 있다는 건 알만 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일이다. 자유로운 경쟁이 자리해야 할 곳에 인맥과 학연, 지연, 사상적 폐쇄성 등이 꽉꽉 들어찰 때 문학은 더 이상 문학이 아니게 된다. 슬프게도 한국 문학의 현주소가 바로 그러하다.

문학은 모든 예술의 근간이 돼야 마땅한 분야다. 뒤늦게 부각된 신경숙 표절 건이 명명백백하게 처리됨으로써 대한민국의 예술이 그 기초를 튼튼히 하게 되는 계기를 얻게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미디어펜=이서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