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임창규 기자]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변수'로 급부상했다.

국민연금이 24일 SK C&C와 SK의 합병에 반대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에도 반대하고 나설 개연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게 된 탓이다.

삼성물산의 현재 지분 구조로 봤을 때, 10.15% 지분을 보유한 1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찬성 없이는 합병 통과가 사실상 불투명하다. 삼성그룹의 우호 지분은 KCC의 5.96%를 포함, 19.95%로 합병안 통과를 위해 확보해야 할 최소한의 지분으로 평가되는 47%의 절반에 못 미치는 상황이다.

그간 금융투자업계는 SK C&C-SK 합병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성격에 유사성이 있다는 점에서 국민연금이 SK C&C-SK 합병에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에 초미의 관심을 둬왔다.

두 건의 합병 모두 그룹의 정점에 있는 지주회사 재편의 성격을 띠고 있고 합병 비율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시장 일각에서 합병 비율이 최태원 회장 일가의 지분이 높은 SK C&C에 유리하다는 불만이 나왔던 가운데 국민연금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가 이날 합병 비율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하면서 SK C&C와 SK의 합병에 반대하기로 한 것은 자못 의미심장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 회장 일가의 지분이 상대적으로 낮은 SK 주주에게 이번 합병이 불리하다는 점을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가 비록 완곡한 어법이지만 정면으로 제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반기를 든 엘리엇은 시가를 기준으로 산출된 1대 0.35의 합병 비율이 자산 가치가 큰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하다고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엘리엇은 법정 공방에서 이번 합병의 진정한 목적이 제일모직 최대 주주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총수 일가에게 삼성전자 지분 등 삼성물산의 자산을 우회적으로 이전하기 위한 시도라고 공격하기도 했다.

과거 재무적 투자자로서의 성격이 강했던 국민연금이 최근 인수·합병 등 주요 경영 사안에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추세도 향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최근의 사례로는 작년 11월 삼성중공업과 삼성엔지니어링의 합병 계획이 주식매수청구권의 대량 행사 때문에 무산된 적이 있다. 주주총회 직전 양사 주가가 주식매수청구권 행사가보다 낮게 형성된 것을 계기로 국민연금이 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한 것이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국민연금의 결정은 국내 연기금과 자산운용사 등 국내 기관의 의결권 행사 방향에도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이날 SK C&C-SK 합병 반대 결정의 파장이 클 것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한 자산운용사의 고위 관계자는 "오늘 합병 비율 문제를 명확히 언급한 것으로 봐서는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며 "교수 등 외부 위원으로 구성된 의결권전문위원회가 상당히 '독립적'인 판단을 내린 것으로 보여 삼성그룹 처지에서는 큰 불확실성을 안게 된 셈"이라고 말했다.

다만 일부 유사한 요소가 있더라도 SK C&C-SK 합병과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별개 사안이라는 점에서 국민연금의 이날 결정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전주곡으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라는 목소리도 여전히 만만치 않다.

합병 반대에 따라 초래될 결과가 SK C&C-SK 합병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크고 제일모직 주식도 상당량 보유한 것으로 추정되는 국민연금이 삼성물산이나 제일모직 어느 한 쪽의 주주로서만 결정을 내리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백광제 교보증권 연구원은 "SK 합병 건은 국민연금이 반대한다고 무산될 것이 아니지만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건은 훨씬 더 민감하다"며 "국민연금이 반대할 것이라고 보기에는 이르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