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불위 특권행세 툭하면 민생 팽개치고 개점휴업 각성해야
   
▲ 김흥기 교수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법 개정안 거부권 파장이 거세다. 박 대통령이 현 정치권 전체를 싸잡아 비판했더니 오히려 여야는 의사일정을 내려놓고 이참에 놀자는 식이다.

새누리는 ‘친박 대 비박’으로 진영을 나눠 다투고, 새정치는 의사일정을 보이콧 했다. 특히 새정치는 ‘심판받아야 할 사람은 대통령 자신’(문재인)이라거나 심지어 박 대통령을 프랑스 혁명기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 같다(이종걸)”고 맹비난하고 나섰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세월호 이후 어려운 경기가 계속되어 올해 경제성장율 3%마저 불확실하며 메르스와 가뭄으로 온 국민이 불안하고 고통 받는 와중에 누구 하나 국민에게 석고대죄 하는 사람이 없다. 하나같이 TV 등 매체에 출연하여 자신 편을 두둔하거나 다른 편을 비난하는 얘기뿐이다. 여당 내의 줄서기와 눈도장 찍기 그리고 야당의 무개념 비판만이 난무한다. 그래 이게 바로 우리 정치판이지 싶다.

정치권에 몸담은 사람 모두는 일국의 대통령 입에서 ‘배신’이라는 듣기 거북한 단어가 나온 이때에 ‘신뢰’라는 두 글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봐야 한다. 신뢰를 뜻하는 영어단어 trust는 ‘편안함’을 뜻하는 독일어 trost에서 왔다. 신뢰가 없으면 불편하고 힘들다. 속지 않으려 눈을 부릅떠야 하고 마음을 줘서는 절대 안 된다. 여기저기 평판을 물어봐야 하고 곳곳에 경비견을 둬야 할지 모른다.

‘자본주의 시장’이건 ‘민주주의 정치판’이건 무릇 사람이 모이고 무언가 거래되는 시장에서는 신뢰가 없으면 탐색과 거래비용이 증가하고 이는 왕왕 시장의 비효율을 초래한다. 정치 무관심, 불신, 냉소, 혐오가 만연한 대한민국이 바로 비효율의 정치로 홍역을 앓고 있다. 국회가 필요한 법을 제 때 만들지 않으니 나라꼴이 엉망이다. 이럴 바엔 국회를 해산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정치와 정치인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한다.

시급한 민생법안 외면하는 함량미달의 국회가 행정입법도 손대겠다고 나서더니 야당은 국회법 개정안이 폐기될 경우 행정부의 위임입법 까지 국회 입법과정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논의 중이란다. 참으로 가관이다. 이번 사태를 ‘입법부 대 청와대’의 대결구도로 몰아붙이는 작태는 치졸하다.

   
▲ 대통령이 현 정치권 전체와 특정인(유승민)을 배신자라고 지칭했다. 한마디로 ‘나쁜 놈(들)’이라고 낙인(stigma)을 찍은 것이다. ‘선거에서 심판해 달라(=혼내 달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옳건 그르건 고도의 정치공학이건 아니건 이참에 정치인들은 정치의 막중한 사명을 자각하고 반성하고 거듭나야 한다. 사진은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오른쪽)와 유승민 원내대표/사진=연합뉴스

유승민 원내대표가 납작 엎드린 게 마치 입법부 힘이 약해서 그런 것으로 국민들에게 비치게 하려는 저의가 아닌가. 작년 4월 이후 우리는 국회의 힘이 얼마나 센지 여실히 알게 되었다. 국회가 일을 안 하면 나라가 멈출 지경이다. 무소불위의 특권을 행세하면서 툭하면 개점휴업하고 ‘하라는 일은 안하고 하지 말라는 건 가지가지 하는’ 정치권의 무능과 부패를 놓고 볼 때 입법부의 권능을 더 이상 강화해서는 안 된다. 그렇잖아도 의회 독재나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상품과 서비스의 품질이 떨어지면 다른 상품을 구매하거나 대체품을 찾게 된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치권의 신뢰는 땅바닥에 떨어진지 오래인데 불량 정치인과 정당에 대해서는 대체 해결방법이 없다. 오죽하면 선진국 국회의원 수입해 오자고 할까. 정치에 대한 불신은 대한민국에 만연해 있다.

국민은 정치와 정치인을 공히 신뢰하지 않는다. 선거 전에는 허리를 굽히다가 당선되면 나 몰라라 하는 몰염치한 인간, 부정부패를 일삼는 일당이란 불신이 깔려있다. 우습지만 정치인도 국민을 신뢰하지 않는다. ‘무지몽매한 별 볼일 없는 군중’ 정도로 치부한다. 또한 여당과 야당 정치인들 사이에도 기회주의적 당리당략만 있지 참된 신뢰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정치판은 ‘정치의 존재의의’ 자체를 불신하며 ‘만인 대 만인의 불신’을 그 특성으로 한다.

대통령이 현 정치권 전체와 특정인(유승민)을 배신자라고 지칭했다. 한마디로 ‘나쁜 놈(들)’이라고 낙인(stigma)을 찍은 것이다. ‘선거에서 심판해 달라(=혼내 달라)’고 노골적으로 표현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옳건 그르건 고도의 정치공학이건 아니건 이참에 정치인들은 정치의 막중한 사명을 자각하고 반성하고 거듭나야 한다. 언제까지 반성 않고 ‘남 탓’만 해댈 것인가? 비좁은 당리당략과 사리사욕을 떠나 대승적 국익(national interest)을 고민하고 늘 국민의 삶의 질 개선과 국민행복 방안부터 강구해야 옳다.

거창한 정치개혁의 구호만 난무한 지금 여야 정치권은 구태를 혁파하고 진정성 있는 정치신뢰를 쌓는 일에 집중하기를 촉구한다. 특권을 대폭 내려놓고 ‘일하는 국회’의 모습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 병기와 식량을 포기하더라도 신뢰를 지켜야 국가가 유지된다는 공자의 경구는 오늘날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신뢰가 없으면 정치도 없다.

오는 7월21일 국회에서 제정한 인성교육진흥법이 시행된다. 학생들이 아닌 ‘국회의원부터 인성교육 받고 사람 돼야한다’는 조롱이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내년에 총선이다. 그때는 유권자들에게 또 뭐라고 할 것인가? 따로국밥 국회는 필요 없다. 여민동락의 국회 모습을 기대해본다. /김흥기 모스크바 국립대 초빙교수, '태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