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 토론회 '탈북학생을 통해 본 사회주의 경제의 허구'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지난 6월 30일 자유경제원 5층 회의실에서 <탈북학생을 통해 본 사회주의 경제의 허구>를 주제로 제5차 청년 토론회를 개최했다.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탈북자의 수가 2만5000명에 이르렀다. 이 중에는 대한민국에서 초·중·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다니는 학생도 여럿이다. 김씨 왕조 외에는 모두 다 배고픈 곳에서 탈출한 이들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 대한민국에 넘쳐나는 ‘사회적’이란 이름의 용어들, 각종 무상 시리즈, 평등을 지향하는 정책들은 탈북학생들의 눈에 더욱 기이하게 보일 것이다. 자유경제원은 사회주의를 몸소 경험해온 탈북학생들과 함께 사회주의 경제의 허구에 대해 논하는 장을 마련했다.


‘사회주의경제는 왜 실패할 수밖에 없나’를 주제로 개최된 1부는 탈북자 출신인 백요셉 사무국장(인사이드NK)이 발제를 맡았다. ‘북한의 지하경제가 시장경제다’를 주제로 펼쳐진 2부에서 탈북학생 서옥별(동국대 경찰행정학과) 양 발제를 맡았다.


한편 이번 토론회는 탈북학생과 남한학생이 함께 참여해 더욱 의미가 있다. 자유경제원 현진권 원장의 사회로 진행된 1부 토론회에는 서울여대 언론홍보학과 김가영 학생, 연합경제금융포럼 이진영 대표, 충북대 경영학부 최종부 학생이 토론자로 참석했다.

자유경제원 전희경 사무총장의 사회로 진행된 2부 토론회는 남북동행 김지연 사무국장, 북한인권학생연대 유은실 기획국장, 한국대학생포럼 여명 회장이 토론자로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아래 글은 서울여대 언론홍보학과에 재학중인 김가영 양의 '사회적·평등·무상이라는 미신을 경계하라'는 토론문 내용이다.

Ⅰ. 서론

최근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각계 부문을 물들인 몇 가지 키워드들이 있다. 바로 ‘사회적’ ‘평등’ 그리고 ‘무상’이다. 이 용어들은 금세 약자를 보호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대안처럼 급부상했다. 이에 대해 반론이라도 제기하면 마치 정의를 외면한 이기적인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사회적’ ‘평등’ 그리고 ‘무상’이라는 용어가 그 개념 자체로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사회 구성원간의 연대의식이나 공동체정신이 가지는 긍정적인 힘을 무시할 수 없으며, 평등이라는 개념이 있기에 부당한 차별에 항거도 할 수 있다. 무상 역시 자원만 넘쳐난다면야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문제는 이 용어들이 본래 개념 그대 로 현실에 적용되기 어렵다는 점이다. 한정된 자원,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이성과 행동, 정보의 제한 등 현실 사회가 갖고 있는 속성 때문에도 그렇고, 이 용어를 활용하는 사람들의 오용 때문에도 그렇다.

우리는 사회주의 경제에 관한 교훈을 불과 몇 십 년 전의 과거로부터, 그리고 오늘날 의 북한으로부터 충분히 얻고 있다. 그래서 ‘사회적’ ‘평등’ ‘무상’ 등의 용어에 무비 판적으로 현혹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직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사회주의라는 실패작에 기대를 걸어보는 이들이 존재한다. 이에 본 토론은 ‘사회적’ ‘평등’ ‘무상’과 같은 개념들이 오용되고 남용되는 한국, 그리고 사회주의의 허구를 온전히 경험한 북한을 통해 ‘사회주의 경제는 왜 실패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 자유경제원 주최 '탈북학생을 통해 본 사회주의 경제의 허구'라는 주제로 열린 제5차 청년 토론회에서 서울여대 언론홍보학과에 재학중인 김가영 양이 '사회적·평등·무상이라는 미신을 경계하라' 내용의 토론문을 발표하고 있다.
Ⅱ. 본론

1) ‘사회적’ ‘평등’ ‘무상’은 어떻게 왜곡되고, 또 어떻게 실패하는가

최근 ‘사회적’이라는 용어가 인기다. ‘연대의식’ ‘공동체’ 등의 개념과 유사하게 쓰이면서 이를 현대사회의 문제를 ‘함께’ 극복해가자는 뜻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막상 ‘사회적’이라는 용어가 쓰이는 경우를 보면 시장경제의 원리를 반박하는 데에서 활용될 때가 많다. 정의, 권리, 책임 등의 명사를 꾸미는 관형어로 사용되면서 대중들이 생각하는 ‘사회적’이라는 개념을 왜곡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사회적 책임’이라는 용어는 ‘사회’를 책임의 주체로 설정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는 구제적인 대상이 아니다. 즉 무언가를 책임질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미신은 궁극적으로 개인의 당연한 책임마저 국가에게 떠넘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국가의 확대를 교묘히 조장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개인이 가난과 실업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조차 ‘사회적 권리’로 상정해 그 권리를 충족시킬 책임을 국가에게 전가하는 일도 벌어진다. 시장에서의 소득분배를 정의롭지 못하다고 보고 국가가 개인 및 기업의 소득을 세금으로 가져간 뒤 재분배를 해야 한다고 보는 ‘사회적 정의’ 개념이 대표적이다. ‘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자활기업’ ‘농 어촌공동체회사’ 등 시장경제 원리를 부정적으로 보고 ‘사회적 경제’라는 개념을 앞세 우는 조직들도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다.

가난과 실업, 건강, 재산 등 모든 분야가 다 사회적 책임이라면 그 누가 부정적인 상 황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일 하겠는가. 자신의 책임과 역할을 사회에게 돌리고, 사회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길 기대하는 나라는 앞날이 밝지 못하다. 게다가 국가가 개입하면 할수록, 국가가 커지면 커질수록 개인의 자유와 책임은 줄어들고 궁극적으로 존엄성마저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을 살 때 비 로소 개인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으며, 사회 역시 건강하게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다. 경제적 비효율성과 인간 존엄성의 후퇴를 드러낸 사회주의 경제의 민낯을 통해 우리는 이미 ‘사회적’이라는 용어의 미신을 확인한 바 있다.

한편 ‘평등’의 진정한 의미도 되짚어봐야 한다. 우리 헌법 제11조에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명시돼 있다. 우리 는 이러한 근대적 평등사상을 ‘기회 균등’ ‘약자 보호’ 등을 실현하는 데 활용해왔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평등’의 근대적 개념이 ‘같은 결과’를 뜻하는 것으로 왜곡되고 있다. 어떤 경우든, 어떤 사람이든 항상 균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절대적 평등론자’들도 등장했다. 절대적인 평등은 있을 수 없다는 게 주류의 학설이다. 우리 헌법재판소도 초기 판례를 통해 ‘헌법 제11조 제1항에서 정한 법 앞에서의 평등 원칙은 결코 일체의 차별적 대우를 부정하는 절대적 평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차별대 우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뜻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 의 평등’ ‘절대적 평등’을 주창하는 이들은 타인의 자유나 권리를 빼앗아서라도 사람 들 간의 평등을 맞춰야 한다고 우기기 일쑤다.

참고해볼 만한 사례로 프랑스의 소득 재분배 정책이 있다. 2013년 프랑스 정부는 연간 100만 유로(약 14억 원) 이상의 고소득자에게 75%의 세율을 적용하는 ‘부자세’를 도입했다. 프랑스의 부유층은 거세게 반발했고, 부자세를 피하기 위해 국적을 옮기는 고소득자들도 증가했다. 프랑스로서는 부자세 정책을 통해 재정적 고통을 분담하고 경제적 격차를 줄이려 했던 것이지만, 그 책임을 부유층에게 과도하게 떠넘기면서 국부 유출이라는 더 큰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설령 부유층의 돈을 쉽게 나누어 쓸 수 있었다고 해도, 부자들이 돈을 벌 의욕을 상실함으로써 장기적으로 사회는 큰 침체에 빠졌을 것이다. 법 앞의 평등이 아닌 결과의 균등에 집착한 결과다.

이처럼 ‘결과의 평등’ ‘절대적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평등’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전혀 공정하지 못할뿐더러, 사회의 힘을 잃게 만든다. 인간은 본디 남보다 더 잘 살고 싶은 경쟁심과 ‘내 것’을 우선시하는 이기심을 갖고 태어난다. 애초에 균등한 결과가 보장돼 있다면 그 누구도 열심히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노력하는 이유는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남보다 더 나은 결과를 얻기 위함이다. 정당한 보상이 주어져야 최상의 결과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생기고 결과적으로 경제가 발전한다. 실제로 ‘결과의 평등’ ‘절대적 평등’을 우선시했던 나라들은 경쟁력을 잃고 정치 권력의 거대화로 몰락해갔다. 소득 재분배를 지나치게 주장하는 현 시점의 한국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평등’과 함께 ‘무상’이라는 개념이 가져온 파장도 엄청나다. 복지 분야가 특히 ‘무상’의 마법에 빠져 정신 차릴 줄을 모른다. 복지의 재원은 분명 한정돼 있는데, 모든 복지를 모든 국민에게 동일하게 배급하는 것만이 이상적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무상급식, 무상보육 등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배급하는 사회주의적 방식은 정부적자를 누적시키고 부채를 부풀리는 일등 원인이다. 지금에야 증세에 대한 별다른 진전이 없다지만, ‘무상’을 앞세운 정책이 지속되면 결국 국민의 세금은 폭등하게 될 것이다. 즉 ‘평등’과 ‘무상’을 앞세운 복지는 사회를 몰락시키는 길이다.

‘사회적’ ‘평등’ ‘무상’이라는 미신의 힘이 꽤 큰 지 여전히 여기저기서 사회주의적 요소가 다분한 일들을 추진하려고 한다. 역사가 알려준 실수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사회주의의 함정에 빠져 개인의 자유를 위축시키고 몰락의 길로 걸어갔던 국 가들의 뒤를 밟지 않도록, 우리 사회를 드리운 ‘사회적’ ‘평등’ ‘무상’의 그림자를 경 계해야 한다.

   
▲ 자유경제원에서 열린 '탈북학생을 통해 본 사회주의 경제의 허구' 제5차 청년 토론회.
2) 북한의 경제가 증명하는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


발제에 이어 본 토론에서도 북한의 경제가 증명하는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 원인에 대해 간략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북한의 경제는 6.25전쟁 이후 경제 복구 과정▲1970년대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계획 경제의 비효율성▲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발생한 대아사▲과거 전통 북한경제체제의 모습에서 상당히 벗어난 현재 상황으로 그 변천 과정을 설명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북한 경제의 실패 원인을 자연 재해나 만성적인 자원 부족, 분단 직후부터 시작된 기근 등으로 오해하기도 하나 이는 실제와 다르다. 해방 이후, 남북한이 분단될 당시만 해도 북한은 남한에 비해 노동력이나 자원상황 등 모든 부문에서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반세기만에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한 것은 북한이 선택한 경제시스템, 즉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 때문이다.

분단 이후, 북한 정권을 잡게 된 김일성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를 채택하고 폐쇄적인 자급자족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당시 북한은 같은 공산권 국가였던 소련이나 중국,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와 비교해도 매우 전형적인 중앙집중적 사회주의 경제체제였다. 사유재산은 일절 금지됐으며, 북한 내에서 생산되는 부는 모두 국가가 소유했다. 외부 경제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취지로 무역 대신 자급자족을 택했으며, 경제와 관련된 모든 계획을 중앙정부가 통제했다.

사유재산이 금지되고 개인의 경제활동마저 중앙정부의 계획 하에 이뤄지니 북한의 근로자들은 일을 하는 기쁨도, 보람도 얻을 수 없었다. 인센티브도 없으니 그 누구도 솔선수범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고 그 결과 노동생산성은 급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모든 물자를 북한 내부에서 조달하는 일 역시 자원의 한계라는 측면과 비용을 고려했을 때 무역보다 더 나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행한 물품과 서 비스의 ‘무상배급’은 금방 바닥나기에 이르렀고, 오늘날과 같이 뇌물만이 횡행하는 결 과를 초래했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북한의 경제사를 보면 ‘사회적’이라는 용어의 허구, ‘평등’ 의 왜곡이 가져오는 비극, ‘무상’이라는 허황된 미신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자유시장경제의 대안을 찾는답시고 굳이 사회주의 방식을 재확인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Ⅲ. 결론

결국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실패는 인간의 이성만으로 이상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오만에서 비롯됐다고 정리할 수 있다. 엘리트 조직으로 이루어진 정부조차 현 실 세계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었으며, 그러한 불완전한 제도로 사회를 통제하려던 욕심은 개인의 자유를 축소시키고 각종 부정부패만을 초래했다.

여전히 자유시장경제체제를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자유시장경제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도 많을뿐더러, 예상치 못한 난제를 던질 때도 잦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로의 회귀는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다. 사회주의라는 이름을 교묘히 숨긴 우리 사회의 몇 가지 미신들을 경계하고 더욱 진보적인 대안을 찾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