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주권 구현, 75년 헌정사 첫 투표 1948년 5.10 총선거→제헌국회 구성 성공
자유민주적 가치 담은 헌법·민주공화국·삼권분립 등 근대국가 기틀 세운 '기적'
   
▲ 정치사회부 김규태 차장
[미디어펜=김규태 기자] 75년 전 1948년 5월 한반도에는 하나의 기적이 있었다. 바로 1948년 5월 10일 열렸던 대한민국 제헌 국회의원 선거(5.10 총선거)다. 2023년을 살아가는 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투표권의 첫 행사'였다.

선거 4원칙이란 현대 자유민주국가가 대의민주제, 선거제로 채택한 보통선거·평등선거·직접선거·비밀선거 4대 원칙을 말한다.

현재 기준으로 한국 국민 모두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이자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는 유일한 순간인데, 그 투표권이 나라가 건국되기 전 모든 국민에게 주어진 것이다.

1945년 8월 일제의 항복은 조선인이 스스로 얻어낸 결과가 아니었다.

미드웨이 해전을 시작으로 원폭 투하에 이르기까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하고 미군에 항복한 일본이 본토로 물러나면서 1945년 8월 한반도에는 남북 각지에 미국과 소련이 들어와 군정을 시작했다.

미국의 제안으로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됐고 이후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문 '한국 문제에 관한 4개항의 결의서'에 따라 미소 공동위원회가 설치된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1947년 8월 12일 결렬됐으나, 미국의 제안으로 한반도 문제는 같은해 9월 23일 유엔총회 본회의로 채택되었다.

유엔 정치위원회에서 선(先)정부수립(건국)-후(後)외국군철수를 주장한 미국과 정반대 입장을 고수한 소련이 대립한 가운데, 유엔은 미국측 제안을 찬성 43표-반대 6표-기권 4표로 최종 채택하였다.

결국 1947년 10월 14일 제2차 112번째 유엔 총회에서 찬성 43표로 결의안이 가결됨으로써, 1948년 3월 내에 9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했다.

   
▲ 2012년 제헌절인 7월 17일 서울 중구 장충동 자유총연맹 광장에서 대형 태극기가 우남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동상 너머로 펄럭이고 있다. 자유총연맹은 이날 오전 35m 높이의 게양대에 가로 6m, 세로 4m 크기의 대형 태극기를 걸고 제64주년 제헌절 기념행사를 열었다. /사진=연합뉴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서 첫 총회를 가진 것은 1948년 1월 12일이다.

정작 진짜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소련의 주유엔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가 소련 점령 하에 있는 북한에 임시위원단의 입경을 거부하고 나선 것이다. 한반도 총선거에 대한 유엔의 집행 및 감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분단의 시작이다. 여기서 남한 정치지도자들의 입장이 갈라졌다.

우남 이승만은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 내에서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김구와 김규식은 기존 태도를 바꾸어 38선 이남에서 치를 수 있는 남한만의 총선거에 대해 반대하고 나섰다.

남북 분단이 코 앞이었던 이런 상황에서 총선거 실행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은, 당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의장으로서 방한했던 쿠마라 파드마나바 시바샹카라 메논이다.

메논 의장은 당시 주중 인도대사로 근무하다가 임시위원단 일원으로 내한한 인도 명문 가문 출신 외교관이었다.

그는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여부를 놓고 여론이 찬반으로 갈려 한달간 팽팽하게 맞섰던 1948년 2월 19일, 유엔 소총회에 참석하여 임시위원단 의장으로서 한반도 사정을 설명하고 "유엔은 빈 손으로 조선을 떠날 수 없다"고 밝혔다.

메논 의장은 "남조선에 수립될 수 있는 별개 정부가 총회의 결의에서 규정된 바와 같은 중앙정부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보다 의견이 일치한다"며 "우남 이승만은 전설적인 국민적 지도자다"라며 '남한에서의 총선거'를 승인해 줄 것을 촉구했다.

이 연설에 움직인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활동 가능한 남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가결하고 나선다. 총선거 실시를 위한 마지막 도장이 찍힌 순간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메논 의장을 움직인 것은 우남 이승만이었다.

메논 의장은 유엔 소총회에 참석하기 전 이승만의 거듭되는 설득에 마음을 움직여, 미국 하지 중장의 의도나 중립노선인 인도 정부의 훈령을 묵살하고 이승만의 노선을 채택하도록 연설한 것이다.

   
▲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1948년 5.10 총선거 포스터. /사진=연합뉴스

유엔 소총회의 총선거 실시 가결 이후는 일사천리였다.

총선거를 위한 선거법은 총 5차례 수정을 거친 끝에 선거권(투표권)은 만 21세 이상인 모든 국민에게 부여되었다. 피선거권은 만 25세 이상인 모든 국민에게 인정되었다.

또한 일본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나 일본제국의회의원이었던 자, 판임관 이상자, 경찰관-헌병-헌병보, 고등관 3등급 이상자, 고등경찰이었던 자, 중추원 부의장-고문-참의 등에게는 피선거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선거법 1조는 성별, 재산, 교육, 종교의 구별 없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고 있다고 규정하기도 했다.

무기명 투표 및 투표의 비밀을 보장하고, 1선거구에서 1인을 선출하는 소선거구제로 확정했다. 선거구는 인구 15만명 미만을 1개구로 하여, 총 200개 선거구를 결정하였다.

등록한 의원 후보자는 자유로이 선거에 관한 선전을 할 수 있었고, 일선 공무원은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다.

바야흐로 보통선거·평등선거·직접선거·비밀선거라는 선거의 4대 원칙 모두가 지켜진 총선거가 된 것이다.

대한민국을 규정지은 국민 주권의 첫 발현이자 첫 투표권의 행사. 1948년 5.10 총선거에서 198명의 제헌 국회의원이 뽑혔다.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 당시 기념식 전경. /사진=미디어펜DB


제1당은 55석으로 24.43%를 득표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였다(이승만 총재). 제2당은 29석으로 12.17%를 득표한 한국민주당이었다(김성수 수석총무).

이후 의원 200명으로 제헌국회가 결성되어 7주에 걸쳐 7월 17일 대한민국 제헌헌법을 완성했고, 이 헌법을 토대로 4주 뒤인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한다. 한반도 최초의 근대 자유민주국가를 건국하는 순간이다.

이 모든 것이 국민 95%가 투표에 참여해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주권을 행사한 5월 10일 그 날에 기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