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71)-시민적 덕성이 공화정을 꽃 피운다
마키아벨리(1469~1527)의 <로마사 논고>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마키아벨리에겐 그의 대표작 <군주론>의 영향으로 ‘마키아벨리즘’의 창시자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마키아벨리즘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권모술수를 뜻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하지만 이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부당한 오해에서 비롯된 측면이 많다. 그가 이상적인 정치를 몰라서 외면했던 것은 아니다. 정치체계의 작동과정에서 이상과 합리성보다, 오히려 추악하고 냉혹한 요인들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생존법을 제시한 것이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정치적 처방이 냉혹한 것이 아니라, 정치의 장 그 현실 자체가 부조리와 냉혹함을 내포하고 있는 게 아닐까. <군주론>에서 표면적으로 읽히는 마키아벨리의 사상과 달리, <로마사 논고>는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 정치철학의 진면목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마키아벨리는 분열된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공화국 가운데 상업과 가내수공업이 발달했던 피렌체 공화정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외교관이자 행정가였다. 그는 피렌체 군주였던 로렌조 메디치에게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통치의 복안으로서 <군주론>을 헌정함으로써 냉혹한 군주정의 신봉자로 오인되어 왔다.

   
▲ 마키아벨리 초상, Santi di Tito(1536–1603)작, 피렌체 베키오 궁 소장

강한 시민군이 공화정을 지킨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적 자유의 관념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사람이다. 실제로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에 스며있는 그의 정치사상의 핵심을 관통하는 뚜렷한 관념은 ‘자율’과 ‘자유’의 관념이다. 마키아벨리는 자율을 국가의 목표로 할 때, 그 이상의 현실적 모델을 로마의 공화정으로 설정했다. 그는 피렌체 인들에게 고대 로마 공화정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려 했다.

그가 티투스 리비우스의 <로마사> 10권에 대한 평설로 이 책을 쓴 의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마키아벨리는 단순히 로마사의 논평에 머물지 않고, 당시 피렌체의 정치상황에 견주어 로마 공화정이 주는 탁월한 교훈을 발견하려 애썼다.

이 책은 모두 3권으로 이루어진다. 제1권에서는 로마 건설 과정의 여러 상황에 나타난 로마인들의 정책결정과 개혁의 사례를 설명한다. 그는 로마가 왕정, 귀족정, 민주정의 장단점을 잘 혼합한 형태로서 인민, 원로원, 집정관 체제의 공화정을 갖추었기에 균제와 균형 속에 도시국가의 발전이 가능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건실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인민의 부패와 국가의 배은망덕을 경계하고, 법률의 준수와 충실한 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실제로 피렌체 공화국의 시민군 창설을 추진하기도 했다.

   
▲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시민군 창설을 주장한 육필 원고, 군주론 집필 50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및 특별전시회(2013년 11월 22일, 국립중앙도서관 특별전시실) ⓒ박경귀

제2권에서 그는 로마의 국력이 급격하게 팽창하고 번영하게 된 요인을 분석한다. 자유로운 공화정부에 대한 자발적 애착심이 형성되고, 적대국들을 연맹으로 포용해나가는 유연한 외교정책과 식민지 이주자 지원정책이 ‘팍스 로마나(Pax Romana: 로마의 평화)’에 기여했음을 여러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특히 미키아벨리는 로마군의 강고한 용기, 엄격한 규율과 보병중심의 효율적인 전술을 칭송한다. 그를 통해 그는 조국 피렌체 군대의 무력함을 대비시킨다. 물론 로마의 이러한 흥성에 로마인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포르투나(fortuna: 운명, 행운)의 도움도 적지 않았음을 상기시킨다.

15세기에서 16세기까지 이탈리아는 독일,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등 주변 군사강국의 끊임없는 침입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이런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자국의 시민군조차 갖지 못하고 외국 용병에 치안과 국방을 의존하던 16세기 초 이탈리아의 안이함과 무능을 통탄했다. 그가 시민군에 기초한 강력한 군대를 가졌던 로마 공화정의 영광을 더욱 그리게 한 이유다.

   
▲ 로마 공화정의 시민 생활의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노 유적지 전경이다. ⓒ 박경귀

시민의 덕성이 공화정을 꽃 피운다

제3권에서는 로마인들의 어떤 행동이 로마를 유지시키고 더욱 위대하게 만들 수 있었는지 그 밑바탕이 된 여러 덕목을 발굴해낸다. 열거하는 사례들은 규범적 차원을 넘어 현실적인 기여를 만들어낸 동인들이다. 그래서인지 <군주론>에서 제시한 내용들과 맥락적으로 유사한 대목도 많다.

로마의 역사 속에 나타난 실제사례를 통해 동기와 과정보다 상황적, 현실적 처방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사례를 냉철하게 제시했다. 국가 전복 음모에 대한 대처방법, 적을 기만하는 전투 방식, 대규모 군대의 통솔 등에서 때로 무자비하거나 기만적인 수법이 오히려 효과적일 수 있음을 상고해준다.

하지만 로마를 융성하게 했던 밑바탕이 된 근본 덕목은 시민과 정치가 모두에게서 나왔다. 우선 로마 시민들의 청빈함과 자유를 존중하는 자세는 높이 평가할만했다. 또 공화정의 정치지도자들이 시민들의 공적인 봉사활동을 명예롭게 해줌으로서 공공선을 장려한 점도 주효했다.

여기에 훌륭한 법치와 강력한 군대의 뒷받침이 상승작용을 해서 로마의 융성을 이끌 수 있었음을 마키아벨리는 곳곳에서 역설한다. 우리가 표방하는 ‘민주공화국’의 모습은, 마키아벨리가 희구하던 시민적 덕성이 넘치는 가운데 자유, 공공선, 법치가 조화를 이루는 로마 공화정의 참모습과 얼마나 닮아있을까?

마키아벨리는 한없이 유약했던 조국 피렌체와 사분오열된 이탈리아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로마 공화정의 부활을 꿈꿨다. 그는 로마 공화정의 훌륭했던 정치제도와 정치가, 시민들이 보여준 공공적 덕성, 즉 비르투(virtu)의 부활과 고양이 이탈리아 통일의 씨앗이 되리라 믿었다. 또한 자신이 그 과정의 기여자가 되고자 진력했다.

로마는 시민적 덕성과 정치지도자의 절제와 지혜가 어우러질 때 최고의 공화정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충만할 때 로마는 융성했다. 하지만 시민적 덕성과 지도층의 책무를 방기하고 제국주의의 교만에 빠지기 시작하면서 로마는 쇠퇴하고 종국에는 멸망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가 황제정으로 넘어간 이후의 역사는 주목하지 않았다. 그는 로마 공화정이 꽃피던 시기의 바람직한 시민의 모습과 훌륭했던 통치의 사례를 이탈리아인들에게 들려줌으로써 그들을 각성시키고자 분투했다. 그가 로마의 역사에서 읽어낸 숙고의 지혜와 열변이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마키아벨리는 시대와 역사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과 지혜를 가졌음에도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비운의 정치 철학자이자 행정가였다. 하지만 <로마사 논고>속에서 그가 고민하던 공화주의의 철학과 가치는 현대까지 정치철학의 시원이 될 뿐만 아니라 공화정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데 필요한 지적 자극을 끊임없이 만들어 낸다. 위정자에게 단 한 권의 고전을 권하라면 필자는 제일 먼저 <로마사 논고>를 꼽겠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로마사 논고>, 니콜라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 외 옮김, 한길사(2003), 5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