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2021년)을 맞은 떠들썩함이 잦아든 대한(大寒) 즈음이었다. 추위로 몸을 잔뜩 움츠린 늦은 밤, 사진 한 장이 눈길을 잡았다. 소낙눈이 펑펑 내리던 서울역 광장의 아침 풍경이었다. 사진 속 남성은 다른 남성에게 외투를 입히고 지퍼를 올려주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주 평범한 장면이었지만 사진 설명을 읽고 또 읽으며 새벽까지 뒤척였다. 

후에 ‘노숙인과 신사’로 명명된 사진은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허름한 행색의 노숙인이 지나는 이에게 “너무 추운데 커피 한잔 사주세요”라는 요청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노숙인의 요청에 신사는 오만 원을 꺼내 건넸다. 환대는 이어진다. 외투를 벗어 그에게 입혀주었고 장갑도 벗어주었다. 노숙인의 요청에 대한 신사의 환대는 종교적 엑스터시까지 느끼게 했다.

   
▲ ‘노숙인에게 외투·장갑 벗어준 시민’ 찍은 한겨레신문 백소아 기자는 2021년 한국자협회가 시상하는 제365회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일상의 평범한 스케치 속에서 만난 특별한 순간’을 길어 올린 역작으로 평가된다.

눈 속에 펼쳐진 경이로운 장면은 우연의 가면을 쓰고 세상에 전해졌다. 사진기자는 “처음에는 무엇을 찍었는지 실감치 못했다”고 고백했다. 찰나가 영겁을 설명하는 순간은 담아낸 기자는 서울역사에서 나와 광장을 열심히 뛰었으나 신사는 사라진 뒤였다. 기자는 또다른 주인공인 노숙인은 만날 수 있었다. 노숙인은 한겨울 추위와 맞서 얇은 수면 바지와 얇은 운동화 그리고 초록색 군복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로 붐비는 서울역 광장이었지만 노숙인의 아픔을 공감하고 요청에 응답한 이는 신사밖에 없었다. 신사는 끝내 익명으로 남았다.

지난 14일 국회에서 김예지 의원(국민의힘, 비례대표)의 대정부질문이 있었다. 그가 정치적 거물도 아니고 나라를 흔드는 폭로를 예고했던 것도 아니어서 여론의 관심은 심드렁했다. 하지만 김 의원의 대정부질의와 정부의 응대는 지금까지 많은 화제와 여진으로 이어진다. 시각장애인인 김 의원은 안내견의 도움을 받아 단상에 섰다. 그는 물고기 ‘코이’이야기로 질의를 시작했다. 코이는 넓은 바다에서는 1m까지 자라지만 어항에 갇히면 어항의 크기에 따라 몸집이 작아진다고 설명했다. 김 의원은 장애인이 코이와 다름없음을 조용한 목소리로 웅변했고 울림은 컸다.

   
▲ 지난 16일 김예지 의원이 국회에서 한덕수 국무총리와 한동훈 법무부 장관 등 정부 관계자를 상대로 대정부질의를 했다. 김 의원의 질의가 끝난 후 여야 국회의원 모두가 따뜻한 박수로 화답했다.

김 의원은 단상에서 법무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소환했다. 이에 장관과 국무총리는 시각장애인인 김 의원을 배려해 “법무부 장관 나와 있습니다”, “국무총리 나와 있습니다”라고 화답했다. 이 장면에서 울컥한 사람은 여성 호르몬이 넘치는 이들이나 정치적 지향이 비슷한 사람들만의 감정일까? 아닌 것으로 보인다. 김 의원의 질의가 끝나자 여야 국회의원 모두는 뜨거운 박수로 공감을 표현했다. 박수는 장애인인 그를 향한 배려만이 아니라 잊고 있던 정치의 본질을 자각케 한 고마움의 표시이기도 할 것이다.

김 의원은 정치권이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는 ‘검수완박’을 질의에 올렸다. 그러나 정치적 수사나 상대를 향한 공격은 없었다. 오히려 장애인이 가진, 비장애인은 실감치 못하는 법의 미비를 지적했다. 김 의원은 검수완박의 맹점으로 ‘고발인 이의신청권 폐지’의 문제를 제기했다. 학대받은 장애인이 적시에 방어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인 우리의 현실을 직시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이 학대의 경우 대부분 제3자의 고발로 수사가 시작되는 게 현실인데 고발인 이의신청권 폐지로 장애인의 피해가 회복되기 어렵다는 지적이었다. 여야 국회의원 모두 공감했다. 민감한 ‘검수완박’의 허점이 지적되는데도 야당석에서 그 흔한 야유 한마디가 나오지 않았다. 김 의원의 대정부질의는 내용보다 정치의 본질을 여야 국회의원에 자각시키는 기대치 않은 큰 성과로 기억될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점자로 된 질의서는 길을 잃은 우리 정치권이 근본을 회복하는 안내서가 아닐까.

지난 16일 서울아산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주석중 교수(59)가 교통사고로 숨졌다. 주 교수는 수술 시간에 맞춰 인근 자택에서 병원으로 출근하던 중 덤프트럭에 참변을 당했다. 외과의사로서 환자를 돌보기 위해 병원 근처로 이사까지 했다는 소식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 했다. 그런데 죽음이란 숨어있던 것들을 빛 가운데 드러내는 사건인가 보다. 영결식이 열린 사흘 간 알려진 고인의 생애는 사어(死語)가 돼가는 ‘박애(博愛)’를 되살리기에 충분했다. 
 
주 교수는 의대 졸업 후 1998년부터 서울아산병원에서 36년을 근무한 국내 대표적 흉부외과 전문의다. 요즘 의료진 부족사태를 겪는 대동맥질환 수술에서는 ‘대체 불가능한 의사’로 평가받는다. 무엇보다 환자를 우선하는 그는 병원에서 10분 거리로 이사까지 하면서 새벽 응급콜을 받으면 곧바로 병원으로 향했던 모습은 두고두고 회자 된다. 언론에 따르면 고인은 아산병원 소식지에 “수술 후 환자가 회복될 때 가장 큰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고 수술할 때까지 힘들었던 일을 모두 잊는다”는 글을 남겼다.

   
▲ 불의의 교통사고로 숨진 고(故) 주석중(59) 서울아산병원 흉부외과 교수의 영결식이 20일 서울 송파구 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엄수됐다. 고인의 죽음은 전문의로서뿐 아니라 환자에게 헌신한 품성으로 많은 이들의 안타까움을 샀다.

고인을 기억하는 이들은 전문의로서 그의 탁월한 능력과 함께 의사로서 품성을 잊지 않는다. “남을 먼저 배려하던 주 교수의 자상함에 주 교수 주위는 평온했다”, “선생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환자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고, 환자들에게 새로운 생명과 위안을 전달했다”는 추모사는 고인의 성품을 대변한다. 

어쩌면 노숙인을 환대한 신사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일지 모른다. 끝내 익명으로 남아서인지 모르나 야만의 시대를 사는 인간을 불쌍히 여긴 신의 현현일지 누가 알겠는가. 이런 모습이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라고 일깨우는 신(神)일지 모를 일이다. 노숙인 또한 이 시대 인간이 가진 약함인 결핍을 드러내 질문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신을 찾아 거리와 산을 헤맸지만 신은 거기에 없었다. 고통받는 인간, 구원이 없을 것 같은 장소, 모두가 외면한 순간에 신(神)은 그 곳에 있었다.

김예지 의원은 평생 시각 장애를 갖고 살아왔다. 평범한 이의 눈에는 불행의 그림자가 보인다. 비장애인의 눈에 비친 장애인의 불편함은 곧 불행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김 의원이 자신의 문제가 아닌 공동체를 걱정하고 미래를 이야기한다. 삶에 지친 이들의 이해관계를 이용한 약탈적 정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보기 힘든 정치 언어다.

고인이 된 주석중 교수는 삶은 헌신이었다. 헌신은 타인을 대상으로 한다. 그가 가진 흉부외과 전문의로서 명성은 오래 남을 것이다. 그보다 그가 보여준 성실과 헌신은 훨씬 더 오랫 동안 기억될 것이다. 

목마름을 해결하는데 바다가 필요하지 않다. 환하지만 어두운 시대, 이들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과 같다.

미디어펜= 김진호 부사장 겸 주필
[미디어펜=김진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