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정 기자
[미디어펜=김소정 기자]“새빨간 거짓말.” 남한 언론이 앞다퉈 보도해온 북한 고위층 망명설에 대해 북한이 입을 열었다. 북한이 남한 언론을 비난한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명확한 팩트 확인까지 해주니 머쓱해진 것도 사실이다.

북한은 8일 조선중앙통신에서 “남조선의 보수언론들이 탈북자 감투를 씌어놓은 그 장령은 지금 이 시각에도 마식령스키장 건설사업을 현장에서 지휘하고 있다”고 밝혔다. 고위층 탈북 소식 중 가장 ‘핫’했던 “별 셋의 박승원 상장이 남한에 있다”는 남한 언론에 일격을 가한 것이다.

그러면서 조중통은 “황당무계하기 그지없이 북한체제 불안정설을 악랄하게 유포시키고 있다”며 남한 언론을 마음껏 조롱했다.

이 같은 북한의 반응을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정부도 때맞워 “북한 장성 망명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말 그대로 ‘뒷북’ 반응이다.

이쯤 되니 열흘 가까이 북한 고위층 망명설 보도가 지속된 상황을 지켜본 정부의 입장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하다. 최소한 백그라운드 브리핑에 충실해 언론의 판단을 도와야 했기 때문이다.

소문이 일파만파 확산될 때 팩트 확인 요청을 받은 정보 당국은 “대북 정보라서 확인해줄 수 없다”고 했고, 정부는 “정보 사항이라 확인이 안된다”고 했다. 현영철 전 인민무력부장 처형 때처럼 국회에서 정보위원회도 열리지 않았다.

언론은 연일 북한 고위층 탈북 소식을 릴레이식으로 보도했다. 새 보도가 나올 때마다 탈북 인사가 추가됐다. 김정은 비자금을 관리하는 중앙당 39호실 간부, 군수공업 관장 제2경제위원회 인사, 군의 상장과 대장까지.

일부 방송에서는 탈북자 해설이 곁들여지면서 분위기는 더욱 고조됐다.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후속 보도도 잇따랐다. 미국의 한 북한 전문 매체는 “북한 당국이 해외주재원들을 줄줄이 소환하고 있다”고 전했다. 북한 고위층 탈북 러시에 해외 주재원 소환 소식이 겹치면서 급기야 ‘붕괴 전조’란 말이 기사 제목으로 등장했다.

미국 북한 전문 매체는 다시 “북한을 흔들려는 언론 플레이”라고 보도했다. 드디어 침묵하던 국내 일부 언론이 “북한 고위층 탈북 사실은 근거가 없다”고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또 다른 언론은 이 문제에 좌파·우파까지 거론하면서 “국내 언론이 해외 언론의 음모론에 동조한다”고 질타했다.

   
▲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사진=연합뉴스
북한 고위층 망명설은 이목을 모으기에 충분한 소재인 것은 맞다. 현 체제를 전망할 수 있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지경까지 되자 자칫 언론에 대한 불신을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생겼다. 사실 고위층 탈북 러시 보도는 북한 내부에서 특히 간부들의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실상을 안다면 참으로 어리둥절한 것이었다.

아무리 북한 사회에서 핸드폰 이용자가 급증하고, 장마당이 성행하면서 사람들의 왕래도 다소 증가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정작 고위층 간부들의 이동은 곳곳에 설치된 초소에서 번호판 조회로 엄격하게 감시되고 있다고 한다. 김정은 공포정치가 아무리 위협적이라고 하더라도 북한 내에 있는 당과 군부의 최고위 간부들이 탈북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외에서 외화벌이 일꾼으로 활동하던 인물 중에서 간혹 망명자가 나온 경우도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북한 당국은 해외 주재원의 가족 일부를 평양에 남겨두는 식으로 망명을 막고 있다.

해외 주재원 소환도 그렇다. 북한은 국가기관마다 해외지사를 두고 있고 여기서 조달하는 외화로 국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정기적으로 일꾼들을 국내로 소환해 사업 진행 상황을 체크해왔다.

특히 최근 완공된 평양 순안국제공항이나 김책공대 자동화연구소 건설에다 오는 10월10일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까지 완공을 목표로 한 평양 쑥섬에 건설 중인 과학기술전당까지 줄줄이 건설사업이 벌어지고 있으니 앞으로도 외화를 조달하는 해외일꾼들은 빈번하게 평양을 드나들 것이다.

물론 지난 장성택 처형 이후 해외 주재원으로 있던 측근들을 대거 소환한 일이 있어 이번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한 점도 없지 않다. 고위 간부 한명이 처형되면 측근들이 줄줄이 숙청되거나 함께 처형되는 일이 반복되다보니 측근들 중에는 망명을 꿈꾸는 이들도 있을 법하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9일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김정은 집권 후 70여명이 처형됐다”며 “이는 집권 초기 같은 기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10여명을 처형한 것에 비춰볼 때 7배에 달한다”고 했다. 이는 지난 5월 국정원이 밝힌 내용과 같다. 김정은의 공포정치가 극에 달한 것은 분명해보인다.

하지만 북한 문제가 종종 선정적으로 다뤄지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김정은 일가에 대한 근거없는 소문이나 추측이 난무하고, 북한 실태를 매도하거나 북한 인사들을 지나치게 희화할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북한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외부정보의 유입이 가장 유력하다. 북한 당국도 여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을 수 없고, 일반 간부들과 주민들이 외부정보에 노출될수록 이를 막는 것은 역부족이다. 김정은이 갈수록 성행하는 장마당을 근절시키지 못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하지만 북한으로 유입되는 외부 정보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면 이에 대한 주민들의 기대감도 급속도로 낮아질 것이 분명하다. 북한의 실상이, 주민들의 형편이 우리가 판단하고 상상해온 것과 많이 다를 수가 있다. 정부와 언론은 물론 탈북자사회도 북한 문제를 다룰 때 조금 더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전부가 아니고, 우리에게 통일의 과업은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