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72)-의붓아들을 사랑한 파이드라의 저주와 테세우스 가문의 파멸
에우리피데스(BC 484?~BC 406?)의 <힙폴뤼토스>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그리스 신화와 전설에는 비정상적인 사랑과 도착된 사랑이 인간을 파멸시킨 다양한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다. 도착된 사랑의 압권은 파시파에(asiphae)의 사례다. 그녀는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의 왕비였다. 그녀는 불행하게도 황소에게 비정상적인 욕정을 품는다. 미노스 왕은 포세이돈의 도움을 받아 크레타의 왕이 되었지만, 포세이돈이 보낸 황소를 탐내어 제물로 바치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포세이돈은 파시파에가 그 황소에게 욕정을 품게 만들었던 것이다. 포세이돈은 파시파에에게 맺어져서는 안 될 사랑으로 가슴앓이를 하도록 벌을 내린다.

그러나 사악한 파시파에는 자신의 도착된 욕정을 천재 발명가 다이달로스의 도움을 받아 기어코 해소하고 만다. 왕비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다이달로스가 실제와 똑 닮은 암소를 만들어 파시파에가 그 안에 들어가 황소와 교접하게 했던 것이다. 인륜을 어긴 일탈의 결과 반인반우(半人半牛)인 괴물 미노타우로스가 탄생하게 된다. 훗날 아테나이의 영웅 테세우스는 크레타 섬의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고, 미노타우로스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아테나이의 열네 명의 소년 소녀들을 구하게 된다.

   
▲ 파시파에와 황소의 비정상적인 교접의 결과 탄생한 괴물 미노타우로스이다. <미노타우로스>, 그리스 원작을 로마시대에 복제한 작품이다.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고 미궁을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운 이는 파시파에의 작은 딸 아리아드네였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 공주가 준 실꾸러미를 풀며 미궁으로 들어갔다가 그 실을 따라 안전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테세우스는 생명의 은인인 아리아드네 공주와 함께 아테네로 귀환하는 도중에 그녀를 낙소스 섬에 내려 두고 온다. 테세우스의 사랑의 배신에 대한 대가는 훗날 아리아드네의 언니 파이드라가 대신 해 갚아 준 것인지도 모른다. 테세우스가 아들 힙폴뤼토스를 잃게 되는 것도 이와 연관된 운명의 장난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테세우스의 배는 아테네를 향해 돌아오지만, 자신이 살아 돌아올 경우 검은 돛 대신 흰 돛을 달기로 아버지와 한 약속을 깜박 잊어버렸다. 아들이 살아 돌아오길 학수고대하던 아이게우스 왕은 검은 돛을 그대로 달고 오는 테세우스의 배를 보고 아들이 죽었다고 절망한 나머지 수니온 곶에서 스스로 바다로 몸을 던져 죽는다.

크레타 섬의 미노스 왕가에 9년마다 바치던 소년 소녀 공물의 악습의 고리를 끊은 테세우스는 아테네의 영웅이 되고 자연스럽게 아버지를 이어 왕위에 오른다. 그런데 불행히도 미노스 왕가와의 악연이 이어진다. 테세우스는 아마존 여인족의 여왕 힙폴리테를 납치하여 아내로 삼고 아들 힙폴뤼토스(Hippolytos)를 얻었다. 그리고 힙폴리테가 죽자 크레타의 왕 미노스와 왕비 파시파에의 큰딸 파이드라(Phaedra)를 아내로 맞았던 것이다. 작은 딸 아리아드네를 아내로 삼을 뻔 했던 미노스 왕가와의 인연이 다시 이어진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인연으로 마무리되지 못했다.

테세우스의 아내 파이드라가 의붓아들인 힙폴뤼토스를 짝사랑하게 되면서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힙폴뤼토스는 여인에 대한 사랑에 무관심했고, 숫총각으로 지내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 고결한 청년이었다. 그가 처녀 신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한 반면,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아프로디테가 ‘사랑의 힘’을 업신여기는 힙폴뤼토스를 그냥 내버려둘 리가 없다. 그녀는 응징을 공언했다.

“햇빛을 보는 자를 가운데 내 힘을 존중하는 자는 나도 명예를 높여주지만, 내게 오만한 생각을 가진 자는 내가 반드시 넘어뜨리노라.”

아마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아들 에로스에게 명하여 파이드라에게는 사랑의 불길을 일으키는 황금 화살을, 힙폴뤼토스에게는 사랑을 거부하는 납 화살을 쏘게 했을 것 같다. 독신의 순결한 생활을 숭상하는 멋진 청년 힙폴뤼토스에게 의붓 어머니 파이드라는 격정적 짝사랑을 품는다. 하지만 그녀의 사악한 사랑은 테세우스 가문의 파멸을 예고한다.​

파이드라는 애욕에 사로잡혀 몸부림친다. 오랜 상사병을 이기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기에 이른다. 파이드라는 어머니 파시파에의 삐뚤어진 애욕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나보다. 파이드라를 안타깝게 여긴 유모는 힙폴뤼토스에게 파이드라의 구애를 전하고 만다. ‘재앙의 뚜쟁’이 역할을 한 것이다.

힙폴뤼토스는 유모의 사악한 유혹을 질타하며 아버지 테세우스의 침상을 범하는 패륜을 단연코 거부한다. 유모가 자신이 전해 준 비밀을 지키겠다는 맹세를 저버리지 말아달라고 간청하자 단호하게 꾸짖는다. 평소 여인들을 멀리하는 힙폴리토스의 성정은 파이드라의 사악한 유혹을 받자 급격하게 여성혐오로 치닫는다.

“맹세를 한 것은 혀고, 내 마음은 명세하지 않았소.”

파이드라는 어쩌다 이토록 가혹한 사랑의 열병을 앓게 되었단 말인가. 여성을 멀리하고 남녀 간의 사랑의 힘을 업신여긴 힙폴뤼토스에 대한 아프로디테의 ​징벌 탓인가? 그녀는 테세우스와 사이에서 낳은 두 아들 데모폰(Demophon)과 아카마스(Acamas)의 어머니가 아닌가. 아테네의 영명한 왕 테세우스의 왕비로 든든한 두 아들을 둔 남부러울 게 하나도 없었던 한 여인에게 가련한 사랑의 덫은 놓은 이는 누구일까. 인간이 파멸을 인지하고도 파국을 향해 스스로 빠져 들어갈 때 비극성은 배가된다. 파이드라는 자신의 왜곡된 사랑이 어떤 파멸을 불러올 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했다.


   
▲ 파이드라가 죽어가는 모습이다. 유모와 시녀가 충격과 시름에 빠져있는 모습이다. <파이드라(Phedre)> Alexandre Cabanel (1823–1889), 1880 作.
추악한 구애가 의붓아들 힙폴뤼토스로부터 차갑게 거부당하자 파이드라는 주체할 수 없는 수치심에 목을 매 자살한다. 하지만 깨끗이 죽었으면 그녀의 죄악은 숨겨졌을지도 모른다. 힙폴리토스의 순결한 영혼을 더 이상 더럽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에로스의 짓궂은 시험의 탓으로 여기고.

하지만 그녀는 죽으면서까지 자신의 구애를 거절한 고귀한 심성을 가졌던 힙폴뤼테스를 모함하는 파렴치한 짓을 하고야 말았다. 힙폴뤼토스가 자신을 범하려 했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서찰을 테세우스에게 남긴 것이다.

​서찰을 읽은 테세우스는 아내의 죽음의 원인이 아들 힙폴뤼토스의 패악에 있다고 믿고 거세게 아들을 몰아 부친다. 테세우스는 포세이돈에게 아들을 죽여 달라고 기원한다. 그리고 아무런 죄가 없음을 호소하는 아들을 오히려 아비를 능욕한 파렴치한이라고 규정하고 저주하며 아테네에서 추방한다. 포세이돈은 테세우스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기로 이미 약속한 바가 있었다. 그 첫 번째 소망이 자신의 아들의 아들을 죽이는 있인데도 말이다.

힙폴뤼토스는 슬픔과 자괴감을 못 이겨 거친 암벽이 이어진 스키론 해안으로 미친 듯 마차를 몰았다. 이 때 포세이돈이 보낸 괴물이 바다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에피다우로스를 향해 질주하던 힙폴뤼토스의 마차가 전복되며 치명상을 입는다. 테세우스는 아들의 사고 소식을 듣고 자신의 저주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가슴이 후련함을 느끼지만, 한편으론 아들의 불행에 짐짓 마음이 흔들린다.

   
▲ <힙폴뤼토스의 죽음>, Jean-Baptiste Lemoyne the Elder(1679–1731), 1715년 作, Louvre Museum 소장, 사진 Marie-Lan Nguyen.

   
▲ ​마차를 타고 달리다 전복되어 축게 되는 힙폴뤼토스의 상황을 그렸다. 그의 얼굴 표정에 격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힙폴뤼토스의 죽음>, Lawrence Alma-Tadema(1836–1912), 1860년 作.
때마침 테세우스 앞에 힙폴뤼토스가 숭배하던 아르테미스 여신이 나타나 힙폴뤼토스의 무고함과 파이드라의 간계를 알려준다. 또한 “증거도 예언자의 목소리도 기다리지 않고, 또 숙고해”보지 않고 서둘러 아들을 저주하여 죽음으로 내몬 테세우스의 경솔함을 꾸짖는다. ​

테세우스가 조그만 신중했었더라면 아들의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테세우스는 파이드라의 비열한 계략에 속아 신심이 두터워 순결한 생활을 하던 아들의 진정성을 외면했던 것이다. ​지혜롭던 영웅 테세우스도 역시 사랑에 연약한 보통 사내였던 것이다. 아내를 범하려 했다는 충격적인 패륜을 사실로 단정하고 격정에 사로잡혀 힙폴뤼토스의 해명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미 분노와 광기에 사로잡힌 테세우스에게 힙폴뤼토스가 자신의 순결함을 입증할 방법은 아무 것도 없었다. 노여움과 배신감에 치를 떠는 테세우스는 이미 합리적 판단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인의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는 나약한 남성의 속성을 힙폴뤼토스에게도 ​그대로 대입시켰다. 테세우스는 처녀성을 생명처럼 숭배하는 아들의 가치관과 정신세계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들의 경건하고 고결한 심성을 너무나 몰랐다. 그러니 그저 여자에 쉽게 빠져들 수 있는 뭇 남성의 행태로 아들을 재단하려 했다.

테세우스가 조금만 더 침착하고 신중하게 사건의 전말을 따져보았더라면 파이드라의 서찰에 담긴 저주의 간계를 간파해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인간이 한번 굳게 의심하기 시작하는 순간, 합리적 이성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도 남녀 간의 사랑의 문제에 관한 것일 때 더욱 그렇다. ​

사건을 전말을 알게 된 테세우스는 죽어가는 아들에게 용서를 빈다. 저승으로 떠나기 전에 힙폴뤼토스는 아버지를 용서하며 고결한 심성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충족되지 못한 빗나간 애욕이 만들어낸 파이드라의 간교한 계략은 자신의 파멸과 함께 힙폴뤼토스까지 죽음으로 내몰았다. 팜브파탈 파이드라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이 비극의 와중에서도 힙폴뤼토스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려 했고, 죽어서도 아버지를 살인의 죄책감에서 풀어주었다. 그는 죽음을 맞았지만, 그의 순결한 정신과 심성은 결코 파이드라가 추악한 욕망과 간교한 계략으로도 온전하게 파괴할 수 없었던 셈이다. ​

테세우스는 무용이 뛰어나고 심성까지 고결했던 훌륭한 장수감인 힙폴뤼테스를 잃었다. 이는 아테네에게도 엄청난 손실이었을 것 같다. 그런 탓인지 얼마 후에 테세우스가 에레크테우스의 증손자인 메네스테우스에게 왕위를 빼앗긴다. 게다가 테세우스는 스키로스 섬으로 쫓겨났고 결국 그곳의 왕 리코메데스에게 살해되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한다. 뒤틀린 사랑의 저주가 테세우스 가문을 파멸시킨 것이다.

아테네의 왕국과 자신을 보호해줄 훌륭한 아들마저 잃어버린 것은 테세우스가 격정에 사로잡혀 이성적 판단을 그르친 후과(後果)가 아닐지 모르겠다. 어쩌면 멀리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면, 크레타에서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도록 돕고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미노스 왕의 공주 아리아드네의 은혜와 지순한 사랑을 내팽개친 테세우스에게 복수의 여신이 내린 죄값인지도 모르겠다. /박경귀/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힙폴뤼토스>, 《에우리피데스 비극전집 Ⅰ》에우리피데스 지음, 천병희 옮김, (2011, 2쇄), 6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