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방민준의 골프탐험(66)-김세영 캐디 퇴출과 골프의 정신

첫 출전한 전인지(21)가 매직 쇼를 펼치며 우승컵을 거머쥔 LPGA투어 세 번째 메이저대회 US 여자오픈에서 김세영(22)의 캐디는 본 라운드에 나서기도 전에 대회장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루키로서 이미 2승을 올려 강력한 우승 후보 중의 한 명이었던 김세영은 그동안 그에게 큰 힘이 되었던 캐디 폴 푸스코가 규정을 위반한 비신사적 행위로 대회장에서 쫓겨나 부랴부랴 새로운 캐디를 구했지만 공동42위로 상위권 진입에 실패했다.

외신을 종합해보면 폴 푸스코가 대회가 열리기 이틀 전인 지난 7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랭캐스터의 랭커스터 컨트리클럽에 있는 USGA(미골프협회) 사무실에 들어가 US여자오픈의 홀컵 위치가 담긴 코스 셋업 관련 내부서류를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하다가 USGA 직원에 적발됐다. 이곳은 USGA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으로 대회가 열리기 전까지는 홀컵 위치 등 코스관련 자료는 공개되지 않는다.

푸스코의 촬영을 목격한 USGA 관계자는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을 삭제토록 한 뒤 상부에 보고했고 바로 푸스코에게 대회 캐디 자격 박탈과 함께 대회장 퇴출명령이 내려졌다.
푸스코는 김세영을 만나기 전엔 오랜 기간 비제이 싱의 캐디로 PGA투어에서 활동했고 LPGA투어에선 최나연과도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이와 관련 USGA의 다이애나 머피 부회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골프는 명예롭고 진실성에 기반한 게임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자신의 선수에게 이익이 되는 정보를 주려 한 캐디를 발견했다. 이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게 됐다."고 밝혔다.
USGA의 이 같은 조치에 대해 일부에선 지나치다는 의견이 없지 않지만 규정을 위반한 행위, 비신사적인 행위에 대한 가차 없는 처벌은 골프가 ‘신사의 게임’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 LPGA에 첫 출전한 전인지(21)가 US 여자오픈에서 매직 쇼를 펼치며 우승컵을 거머쥔 반면 김세영(22)의 캐디는 본 라운드에 나서기도 전에 대회장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벌어졌다. 캐디 폴 푸스코가 규정을 위반한 비신사적 행위로 대회장에서 쫓겨나 부랴부랴 새로운 캐디를 구했지만 공동42위로 상위권 진입에 실패했다. /삽화=방민준
1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세인트앤드루스 북동쪽 50km 쯤에 있는 키네스우드 라는 마을에 비숍셔 골프클럽이 있다. 1903년 설립된 이 코스는 9 홀인 데도 전장 4,360야드로 파가 무려 63이다. 이 클럽은 마을 유지들이 만든 이래 지금까지 당시의 원형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100여년을 지나면서 그린은 비바람에 씻겨 줄어들고 벙커와 러프는 더욱 넓어져 아무도 파 플레이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난코스로 변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코스의 변화도 신의 뜻’이라는 생각에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1917년 이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다. 아이슬란드에서 이주해온 한 사나이가 있었는데 늘 자기 본위로 행동하고 플레이 중 난폭한 행동을 해 눈총을 받고 있던 터였다. 그가 라운드 중 짧은 퍼트를 놓치자 잔디를 발로 걷어찼다. 그 바람에 손바닥만 한 잔디가 벗겨졌다. 사나이는 손상된 잔디를 원상회복 시키지 않고 그린을 떠났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사제가 이 광경을 보았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골프클럽 회원들은 긴급총회를 열고 그를 규탄하며 처벌키로 결정했다. 당시 회의록에 기록된 한 회원의 발언은 골퍼의 기본매너를 명쾌하게 정의하고 있다.
“골퍼는 규칙을 엄격히 따라야 한다. 그 규칙은 자신이 플레이한 흔적을 조금도 남기지 말아야 하며 타인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함은 디봇 자국을 반드시 메워야 하고 벙커에 샷의 흔적과 발자국을 남기지 말고 눈에 띄는 쓰레기는 꼭 주워야 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줍지 않은 쓰레기를 당신이 버렸다고 의심을 받게 되면 변명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매너가 없는 자는 골프를 칠 자격이 없다. 이 게임에 심판이 없는 것도 플레이어가 신사 숙녀라고 단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사가 아니면 골퍼가 아니다.”

저명한 골프평론가 버나드 다윈(진화론의 찰스 다윈 손자)은 이 사건을 소개하면서 “1917년 9월 밤 비숍셔 골프클럽의 허술한 오두막집에서 골프 역사에 길이 남는 기본 매너가 비롯되었다.”고 기록할 정도다.
총회 결과 만장일치로 그 사나이를 클럽에서 제명키로 결정됐다. 당시 골프모임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바로 사회적 패배를 의미했다. 그날 밤 그는 마을에서 소리 없이 모습을 감추었다고 한다.

16세기 중엽, 에든버러 대성당 앞 광장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벽보가 게시되었다.
‘프랜츠필드에 사는 마부 T.E. 엘리엇은 골프를 치면서 친구의 볼을 발로 차 벙커에 빠뜨렸다. 이 행위는 옆 홀에서 플레이하던 한 사제의 눈에 띄었다. 엘리엇은 즉시 잘못을 사과했지만 성직자회의에서는 그 같은 사태를 중요하게 여겨 엘리엇에게 1년 동안 광장을 청소하는 벌칙을 내린다. 이 벌칙은 오늘부터 실시된다.’

비신사적 행위나 속임수에 대한 가혹하리만치 엄격한 제재가 ‘심판이 없는 골프’가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는 비결인 것이다.
김세영의 캐디에게 내린 퇴출의 중벌은 바로 이런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