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73)- 새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피안의 세상?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50?~388?)의 <새>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인간 세상이 파탄이 나면 도피할 수 있는 다른 피안(彼岸)의 세상은 어디에 있을까? 어딘가에 있을 천국은 너무나 멀고 인간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지구상에 인간 이외의 생명체가 만들어 내는 또 다른 평화로운 세상은 없을까.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 또한 그런 세상을 꿈꿨다. 그는 새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했다.

우리가 업신여기던 새들이 오히려 인간을 지배하는 ‘새들이 세상’이 문학작품 속에서 펼쳐졌다.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새>는 이러한 유쾌하면서도 씁쓸한 발상을 보여준다. 허구 헌 날 송사(訟事)로 날을 지새우는 아테네의 모습과 제 욕심만 채우려는 치졸한 인간들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새들의 조롱은 유쾌하다.

민초들이 평안한 세상을 꿈꾸게 된 것은 전적으로 소모적인 내전 때문이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각 동맹국들을 이끌고 맞붙은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404년)은 그리스 세계에 씻을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전쟁의 막바지인 기원전 414년에 공연된 ‘새들의 나라’는 아테네인들에게 잠시나마 전쟁의 시름을 잊고 평화의 소중함을 새삼 느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모험을 떠나는 이들은 아테네 시민 에우엘피데스와 피스테타이로스이다. 이들이 아테네를 떠나 한적한 곳을 찾아 안주하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늘 시민 간에 끊임없는 법정 소송으로 날을 지새우는 지겨운 상황을 탈출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대기는 하지만 전쟁에 진력이 난 속사정도 가세했을 법하다. 에우엘피데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 도시 자체는 역시 위대하고 번창하고, 송사(訟事)로
재산을 날리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으니까요.
매미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노래하는 것은
고작 한두 달인데, 아테나이인들은
평생 동안 법정에서 노래를 해대니 말이오.”

새로운 세상을 찾아내야 하는 아리스토파네스는 고정관념을 통렬하게 전복시킨다. 그는 땅에 사는 인간들과 신들이 지배하는 하늘 사이의 공간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새들’에 주목한다. 인간과 신 사이의 공간의 점유자인 새들이 인간을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

에우엘피데스와 피스테타이로스는 이런 구상을 새들에게 제안한다. 매력적인 제안에 새들의 우두머리인 오디새가 동의한다. 아주 오랜 옛날에 새들이 인간을 지배했다는 황당한 증거들로 새들을 설복시킨 것이다. 인간들이 새들의 활동에 맞춰 일을 하고 수확을 하며, 제우스가 독수리를, 아폴론이 매를 이고 다니는 것도 그 증좌라는 것이다. 기발한 발상에 웃음이 절로 난다. 하긴 인간은 늘 새처럼 날아다니는 것을 꿈꾸었으니 이 또한 새의 능력을 흠모한 증거이긴 하겠다.

   
▲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 <새>가 공연되었던 디오뉘소스 극장의 유적이다. 이 극장은 아크로폴리스 정상의 남쪽 방벽 아래에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형태는 로마시대에 일부 개조된 것이다. ⓒ박경귀
이 두 돈키호테 같은 아테네인은 새들을 부추겨 인간 세상과 신들의 직접 소통을 가로막기 위해 수많은 새들의 집단 노동을 통해 공중 공간에 성채를 쌓게 만든다. 드디어 새들의 왕국 ‘구름뻐국나라’가 들어섰다. 하지만 새의 왕국이 국가 체제를 갖추는 일이 마냥 쉬운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아챈 시인, 예언자, 법령장수, 건축가, 감찰관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나타나 나라를 제대로 건설하기 위해 자신들의 전문 지식을 사라고 달려든다. 모두 사기꾼이자 허풍쟁이들이다. 이는 법률가와 변론가들이 판치며 온갖 송사를 일으키고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히는 아테네의 현실에 대한 신랄한 풍자이기도 하다. 새들의 왕국 고문관 역할을 하는 두 아테네인은 이런 골칫거리들은 모두 내쫓는다. 드디어 공중의 성벽은 완성되고 인간들에게 새들의 왕국이 선포되고 복종할 것을 요구한다.

“행복하도다, 깃털로 덮인
새들의 종족은, 겨울에도
외투를 두를 필요가 없고,
숨 막히는 삼복더위에도
멀리 비추는 햇빛이 우리를 태우지 못한다네.
나는 꽃피는 초원들의
잎이 무성한 품속에서 산다네.
신들린 매미가 한낮의 무더위 속에서
해에 취해 쩌렁쩌렁 노래할 때.
겨울이면 나는 속이 빈 동굴에서 지내며
산의 요정들과 어울려 논다네.
그러다가 봄이 되면 우리는 처녀 같은 하얀 도금양 열매와
카리테스 여신들의 정원에서 나는 것들을 먹는다네.“

구름뻐국나라는 신들도 마음대로 새의 왕국을 통과할 수 없다. 인간은 새들에게 먼저 제물을 바쳐야 하고, 직접 신들에게 제물을 태우는 연기를 올려 보내지 못한다고 포고한다. 인간 세상은 이 포고를 받아들이고 새를 숭상하며 새들의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에서 불청객이 평화로운 새들의 왕국을 불법으로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무지개 여신 이리스가 무단으로 날아든 것이다. 새들의 왕국은 자신들의 지배권을 내세워 여신을 쫓아 보낸다.

​급기야 제우스는 헤라클레스와 포세이돈을 강화사절로 새들의 나라로 보낸다. 피스테타이로스는 제우스가 왕홀과 공주를 새들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한다. 그는 헤라클레스가 제우스의 적자가 아니어서 왕위를 물려받을 수 없으니 새들의 나라와 협력하는 게 좋다고 회유했다. ​

헤라클레스와 포세이돈은 결국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새들의 강력한 협박에 굴복하여 요구 조건을 수락한다. 이어 피스테타이로스와 공주의 결혼 축가가 울려 퍼지며 극이 끝난다. 여기에 제우스가 직접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제우스와 새들의 협상이 원만이 해결되어 새들이 신과 인간들을 모두 지배하는 세상이 완성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자유로운 새들의 이미지와 공간 점유자로서의 기능에서 착안하여 인간과 신 사이에 새로운 왕국을 건설했다. 새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나라의 건국 참여를 빙자하여 한 몫 보려는 인간 군상들을 가차 없이 내쫓았고, 신들에게 한 전쟁 위협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이 희극을 본 아테네인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지긋지긋한 전쟁에 시달리는 아테네의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대변한 희극 <새>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받았을까? 그러나 연극이 끝나고 다시 마주한 냉혹한 현실은 또 언제 어느 전쟁터로 달려 나가야 할 지 모르는 불확실한 미래뿐이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극에서 아테네의 숙적 스파르타도 조롱한다. 새들이 나라를 세우기 전에는 “인간들은 모두 스파르타에 미쳐 머리를 길게 기르고, 먹지 않고 지내고, 더러워진 채로 지내고, 소크라테스 병(病)에 걸리고, 단장(短杖)을 짚고 다녔지”만, 이제 새들이 하는 짓을 기꺼이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이다. ​

그러니 새들의 나라로 이민 오는 아테네인들에게 날개를 달아 달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현실의 아테네는 점점 더 스파르타에 몰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파르타의 위협적 공세에서 벗어나고픈 아테네인들의 절박한 심정이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듯 애처롭다.

이 작품은 기원전 414년에 열린 디오뉘소스제에서 2등을 수상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극중 코러스에서 심사위원들이 이 작품에 투표해주면 올빼미 은화를 떨어지지 않도록 줄 것이지만, 유리한 투표를 던지지 않으면 새들의 똥을 덮어쓰게 될 거라 은근히 협박했음에도 말이다. 청중들도 너무나 명확히 안다. 새들의 왕국이 건설되고 아테네인들이 어떤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왕국으로 도피할 수 있게 되리라는 꿈이 허황된 몽상이라는 것을.

어쩌면 아리스토파네스가 아테네 정치지도자들이 스파르타와 전쟁을 휴전하고 평화를 복원시켜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적어도 평화에 대한 시민들의 갈구를 희극을 빌어 공유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이 희극은 이루어질 수 없는 한 여름 밤의 꿈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부조리한 연극을 통해 공동체의 안녕과 규범을 도외시하고, 전쟁 통에도 사리사욕 추구에 눈이 멀어 송사에 골몰하는 아테네 시민들의 추악한 민낯에 통렬한 조소와 비판을 던지고 있다. 위대했던 폴리스의 가치가 무너져 내리던 기원전 4세기의 아테네의 모습에서 국민들의 민생과 날로 어려워지는 경제 살리기는 외면한 채 정쟁에 골몰하는 정치인들의 행태가 떠오르는 건 무슨 까닭일까?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새>,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아리스토파네스 지음, 천병희 옮김, 단국대학교출판부(2008, 4쇄), 3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