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패·폭혁과 맞서 싸운 3선 시장…뉴욕을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 이철영 굿소사이어티 이사
1947년 9월 21일 미국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지는 한 정치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장문(長文)의 기사를 게재하면서 그의 생전의 모습을 아래와 같이 회상했다.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었던 그는 때로는 화재 현장에 달려 나가고 때로는 비행기를 타고 전국을 날아다니는 등 모든 문제의 현장들을 누비고 다녔다. 타고난 투사였던 그는 상대가 히틀러 같은 거물이었던 길가의 시정잡배이었던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맞섰다…… 뉴욕의 수많은 공공건물들만큼이나 많은 역할을 했던 이 작은 거인이 숨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그와 함께 웃는가 하면 그를 비웃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의 익살에 즐거워했고 그의 경고에 정신을 차렸다. 사람들은 시청이나 의회에서, 그리고 길거리에서나 라디오를 통해 목청을 높였던 그의 목소리가 영원히 사라졌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당시 미국의 48개 주 가운데 가장 위험한 도시였던 뉴욕에서 마피아를 몰아냈던 인물이 64세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1934년부터 12년에 걸쳐 뉴욕시장을 연임하고 미 하원의원을 지냈던 피오렐로 라과디아(Fiorello H. La Guardia, 18821947)의 이야기이다. 라과디아는 췌장암으로 눈을 감을 때까지 온몸을 던져 뉴욕시의 부패와 폭력에 맞서 싸운 법조인이자 정치가이자 행정가이다. 라과디아 사망 후 뉴욕시는 그를 추모하기 위해 모든 공공건물에 30일간 조기(弔旗)를 게양했다.

   
▲ 3선의 뉴욕시장 리오렐라 라과디아는 뉴욕에서 마피아를 몰아내는 등 뉴욕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만들어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사진=MBC 서프라이즈 방송화면 캡처
- 어찌 서울시장에 국한되는 일이겠는가 마는, 현 서울시장 사후에 서울시 공공건물들에 단 하루라도 조기(弔旗)가 게양되는 일이 생길 수 있을까?

1930년대 뉴욕은 대공황 속 경제파탄으로 사람들은 헐벗고 굶주렸으며, 도시를 장악한 마피아들의 살인, 매춘, 도박이 판치는 암흑의 도시였다. 마피아와의 전쟁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워 시장에 당선된 라과디아는 1934년 1월 1일 이탈리아 계 미국인으로서는 최고위직인 뉴욕시장에 취임했다. 그는 시장 취임 전날 라디오방송을 통해 마피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곧바로 부패한 경찰조직을 개편했다. 이어서 마피아의 주수입원이었던 슬롯머신 도박장 소탕에 들어갔고, 뉴욕마피아조직의 두목인 찰스 루치아노(Charles Luciano)를 전격 체포하고 마피아 조직을 와해시켰다. 뉴욕 감옥에서 복역 중이던 루치아노는 1946년 이탈리아로 영구 추방되었다.

평생을 통해 빈곤층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해 발벗고 나섰던 그는 공직부패와 특권 척결을 위해 싸웠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戰線)에서 폭격기 조종사로 활약했던 그는 일생에 걸쳐 의회 내의 보수주의자, 금주(禁酒)주의자, KKK단 추종자들에게 맹폭을 퍼부었고, 시장 재임기간에는 뉴욕 시정(市政)을 지배하던 민주당 조직인 태머니홀(Tammany Hall)과 맞서 싸웠다.

- 시민이 안겨준 시장 임기도 못 채우고 야당에 시장 직을 내준 오세훈 전 시장은 논외로 하더라도, 진보를 자처하는 박원순 서울시장은 취임 후 무슨 일들을 했나?

- 폭력을 추방하기는커녕 세월호 폭력시위대를 위해 시위 텐트촌까지 마련해주며 불법시위를 부추기고 있지 않은가?

- 서울시와 산하 공무원의 부패를 척결한다며 단돈 천원을 받아도 뇌물로 처벌한다는 코미디를 벌이고 있지 않는가?

청년 시절 라과디아는 미 육군에서 밴드마스터로 일했던 부친이 군에 납품된 불량식품을 먹고 사망하는 일을 겪었다. 이와 같은 비극은 훗날 그의 공직부패 척결을 위한 열정의 원동력이 되어 하원의원 시절 그는 정부에 불량 물품을 납품하는 사기범에 대해 사형에 처하는 법안을 제출하였다.

아버지의 죽음 후 라과디아는 헝가리 미국대사관 영사관에서 근무하다 귀국하여 뉴욕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라과디아는 1910년 뉴욕대 법대를 졸업한 후 같은 해 뉴욕에서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이민노동자 등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무료 법률서비스와 무료 변론을 했다. 이를 발판으로 그는 1916년 민주당 판세의 지역에서 공화당 후보로 하원의원에 당선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과의 전쟁과 징병을 지지했던 그는 의원직을 사임하고 자원(自願)해서 조종훈련을 받은 후 미군장교로 임관하여 폭격기 조종사로 이탈리아 전선에 참전하였다.

   
▲ 박원순 서울시장은 폭력을 추방하기는커녕 세월호 폭력시위대를 위해 시위 텐트촌까지 마련해 주며 불법시위를 부추기고 있다./사진=연합뉴스
- 우리나라에서 전쟁 발발시 자원 입대하여 전선(戰線)에 가겠다는 공직자가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우리 고위 공직자들의 아킬레스건이 본인이나 자식들의 병역기피 문제 아니던가?

-박원순 서울시장은 아직까지도 아들의 병역기피 혐의조차 떳떳하게 밝히지 않고 버티고 있지 않은가?

1차대전 종전 후 귀국하여 1919년에 하원의원에 재선된 그는 여성참정권 옹호, 미성년노동 금지, 근로자들을 위한 복지입법 등에 앞장섰다. 공화당의원이면서 공화당 정책에 반하는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던 그는 민주당의 아성(牙城)인 뉴욕에서 공화당 후보로 시장 직에 도전하여 현직 민주당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뉴욕시장에 취임하자마자 그는 공정하고 초당적인 조직개편에 착수하여 다양한 인재들을 등용하고 뉴욕시 조직 내의 비생산적인 조직을 대폭 감축하고 경찰과 소방서의 업무 효율성을 높였다. 공정한 시정(市政)과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그의 순수한 열정과 노력에 대해 그의 정적들마저 신뢰를 보였다.

공화당원인 라과디아는 193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프랭클린 루즈벨트가 '뉴딜(New Deal) 정책'을 내세우기 전부터 미국이 자유방임주의 원칙을 포기하고 경제문제에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실업자들을 구제하고 경제 구조와 관행을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New Deal)을 펴왔다. 그의 이런 소신 덕택에 그는 뉴욕시 공공사업에 소요되는 막대한 예산을 연방정부로부터 지원받아 공항, 공원, 교량, 주택, 의료시설 등을 대폭 확충하는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 박원순 서울시장은 취임 후 자신의 성향에 맞는 학생운동가 출신 인사를 부시장에 임명했고, 지자체법을 어기고 '도로포장 개선단', '보도블록 혁신단', '국제교류 사업단' 등 각종 기구를 마구 설립하지 않았던가?

- 시장의 측근 간부를 5급으로 채용하여 1급 대우의 업무추진비를 지급하고 규정에 없는 3•4급 팀장급을 신설해 개인사무실, 여비서, 업무추진비 등을 특혜 지원하는 등 부당하게 지급한 업무추진비가 52억 원에 달하는 사실을 감사원으로부터 지적 받지 않았나?

- 2014년 박원순 시장은 서울시가 재정 지원을 하고 시장이 총장을 임명하는 서울시립대에 서울시 전 정무부시장과 정무수석 등 측근들을 초빙교수로 임명하지 않았던가?

라과디아는 다혈질 성격에다 지나치게 노동자 편에 선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뉴욕시의 수많은 노사갈등과 파업 해결에 큰 역할을 했다. 그는 경찰의 곤봉과 총기 사용을 자제시키면서도 경찰의 엄격한 법 집행을 통한 폭력 근절과 질서유지를 강조했다.

그는 또한 진주만 공습 이전부터 추축국(Axis Power: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과 전쟁을 벌였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세 나라가 형성한 국제 동맹)과의 전쟁을 예견하고 방공부대와 민방위대를 조직하여 공습에 대비했으며, 히틀러를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광신자로 공개적으로 몰아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그는 육군 장성(將星) 신분으로 해외파병 근무를 희망했으나 루즈벨트 대통령과 의회는 그가 군인으로서보다는 뉴욕시장으로서 뉴욕시와 미국을 위해 더 큰 봉사를 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 우리나라 공직자들의 애국심과 도덕성이 이 수준이라면 코미디 같은 고위공직자 국회인사청문회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5피트 남짓한 작은 키 때문에 '작은 꽃'(주: 그의 이탈리아 이름 Fiorello가 Little Flower라는 뜻임)이라고 불렸던 그는 원리원칙을 앞세워 불의와 부패와 싸운 정치인이자 행정가이자 법관으로서 모범을 보였다. 그는 뉴욕시장 재임 12년에 걸쳐 뉴욕 시정(市政)을 농락했던 태머니홀의 횡포를 잠재우며 뉴욕시 전반(全般)을 개혁했다.

공직기간 중 수많은 일화를 남겼던 라과디아가 뉴욕시 법정에서 주재했던 경범죄 재판 일화 하나를 소개하자면…… 그는 배고픔을 못 견뎌 빵을 훔친 노인에게 유죄를 인정하여 10달러의 벌금을 선고하면서 법정 안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이 노인이 빵 한 덩어리를 훔친 것은 이 노인만의 책임이 아니라,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도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하며,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에게도 각각 50센트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라고 판결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 모자 속에 넣은 후 그 모자를 모든 사람에게 돌려 50센트씩 벌금을 넣게 했다. 그는 노인으로 하여금 그 돈에서 벌금 10달러를 내게 하고 나머지 47달러 50센트를 가지고 돌아가도록 했다.

뉴욕시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라과디아가 사망한 후 뉴욕시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53년 뉴욕의 3대 국제공항 중 하나를 라과디아 공항(LaGuardia Airport)으로 명명하였다. 라과디아는 1993년 미국 역사학자들과 사회과학자들의 여론조사에서 미국 역대 시장 중 1위로 뽑히기도 했다. 그는 그의 마지막 공식행사였던 뉴욕의 고등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불행히도 우리 세대는 실패했다. 우리는 용기와 비전의 부족으로 실패했다.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 평화를 지키는데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My generation has failed miserably. We've failed because of lack of courage and vision. It requires more courage to keep the peace than to go to war.)”라고 역설했다.

   
▲ 서울시가 최근 시청 앞에 내건 현수막.

- 금년 1월 세월호 유족 등에게 광화문광장에 세운 천막 13개를 철거하겠다고 공문을 보냈던 서울시가 철거는커녕 최근엔 태풍에 대비한다며 합판으로 두꺼운 벽을 치고 바닥까지 깔아 견고하게 리모델링을 해줬다. 그러면서도 동아일보사 앞 우익애국단체 천막은 지난 5월 모두 강제철거 시키지 않았던가?

- 세월호사고 1년이 지났는데도 서울시장이 세월호 추모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다니면서 광복 70주년 기념사업으로 광화문대로 한쪽을 폐쇄하면서까지 광화문광장을 확장하겠다니 그 저의를 의심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 박원순 서울시장은 최근 서울시청 정문 위에 “이제는 민생입니다. 경제입니다.”라는 현판(懸板)을 내걸었다. 서울시장이 그 동안 세월호사고 관련한 시위집단들을 위해 시위촌까지 지어주며 그들의 민생을 챙겨왔듯이 이제는 누구의 민생을 어떻게 챙기겠다는 것인가?

- 대통령과 국무총리와 경제부총리가 있고 경제부처와 장관들이 있는데 서울시장이 현판까지 써 붙이고 국민을 상대로 ‘경제' 문제를 직접 운운할 지위에 있는가? 메르스 사태 때처럼 이번엔 '경제'를 구실로 어떤 일에 나서려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철영 굿소사이어티 이사, 전 경희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