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투성이 법안 제대로 대응조차 못하는 무기력 언론 정신 차려야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김영란 법)’에 언론인이 포함된 것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보기 드문 수치스런 일이다.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감시·비판하여 그들의 권력 남용에 대한 강력한 해독제 역할을 해야 할 언론인들이 공직자들과 나란히 부정부패의 처벌 대상에 오른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론인들은 철저하게 반성해야 한다.

언론인들에게 문제가 있다면서 국회와 정부가 언론인 처벌을 위한 특별 규정을 만드는 것도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쉽게 일어나기 힘든 부끄러운 일이다. 더욱이 그 법을 졸속으로, 합당한 근거 없이 만든 것은 법치주의를 내건 나라의 창피이다. 원안을 낸 전 대법관이 “언론인이 포함돼도 문제가 없다”고 말한 것은 언론자유의 보호를 강조하는 철학적 정당성에 대한 인식과 언론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탓으로 보인다. 이 모두 선진민주주의 국가에선 찾기 힘든 상황들이다.

"루비콘 강을 건넜다.“ 줄리어스 시저가 군대를 거느리고 로마에 진입하면서 한 말이다. 루비콘을 건너는 것은 로마 침공을 뜻했다. 반란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이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음을 비유할 때 쓰인다. 2012년 11월 영국 수상 데이비드 카메론은 의회에서 “언론 규제를 위한 법을 만든다면 영국은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이라고 말했다.

도대체 그 법을 만드는 것이 얼마나 좋지 않은 일이기에 2천 년 전 반역의 역사에 비유하는가? 카메론 수상은 “영국 의회는 수백 년에 걸쳐 민주주의의 보루였다. 의원들은 그 강을 건너기 전에 매우 매우 신중해야 한다”며 “신중치 않은 입법으로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은 언론자유와 자유언론을 수백 년 동안 지켜온 의회의 의무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도대체 언론자유, 자유언론이 무엇이기에 규제법 하나 만드는 것이 의회의 의무를 저버리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는 것과 같은 일인가? 언론인을 처벌하는 법을 거침없이 만들어버리는 한국의 국회의원들과는 너무나 비교되는 발언이 아닐 수 없다.

   
▲ 김영란 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는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 /사진=연합뉴스
발단은 신문 기자들의 불법 행위였다. 2011년 7월 경찰 조사 결과, '뉴스 오브 더 월드’ 기자들이 학교에서 집으로 가다 납치·살해된 소녀의 보이스 메일을 해킹했음이 밝혀졌다. 이 신문의 기자들은 2007년에도 휴대폰 메시지를 도청해 기소된 적이 있었다. 이 신문은 선정적 기사를 주로 다루는 '타블로이드’였다. 기자들의 취재 행태에 영국인들은 분노했다. 언론에 대한 비판이 극에 이르렀다. 비판은 패륜적 사건이나 왕실의 추문에 집착하는 타블로이드에만 향하지 않았다. 오래 동안 신뢰를 잃어 온 언론 전반에 퍼부어졌다. '뉴스 오브 더 월드’는 바로 자진 폐간했다.

카메론 수상은 브라이언 레비슨 판사를 위원장으로 조사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위원회가 불법 취재 사건은 물론 언론인들과 경찰, 정치인들의 유착 관계 등을 조사한 뒤 언론의 윤리 수준을 높일 수 있는 각종 정책이나 조치를 추천토록 했다. '레비슨 위원회’는 28개월 동안 540만 파운드(92억여 원)를 들여 '영국 언론의 문화, 행태와 윤리’에 관한 조사를 벌인 뒤 2천 쪽의 보고서를 냈다. “수십 년 동안 무고한 국민들의 삶을 황폐화 시켰다”고 영국언론을 질타한 레비슨 보고서의 핵심은 언론의 자율규제기구인 언론불만처리위원회를 대체할 새로운 독립 언론감시기구를 법령으로 만들자는 것이었다.

1949년 왕립언론위원회는 2차 대전 이후 인쇄 매체의 부수가 급감하면서 편향 보도, 부정확 보도 등이 만연해 언론자유를 위협한다고 걱정했다. 언론의 공적 책임을 강조했다. 위원회는 “언론을 정부가 통제하는 어떤 형태에서도 언론 문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며 의회 입법이나 정부 간섭으로부터 자율규제기구가 언론을 구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생긴 언론불만처리위원회는 오보나 취재 과정에서의 사생활 침해 등을 감시, 제재해 왔으나 실효성 있는 기구가 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드디어 레비슨 판사가 영국 언론정책의 기조인 자율규제에 강력한 제동을 걸고 나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 등이 언론을 타율규제토록 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언론이 제 머리를 잘 못 깎으니 정부는 물론 언론의 어떤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만, 최고 100만 파운드의 벌금까지 매길 수 있는 힘을 가진 독립감시기구를 만들겠다는 것. 우리나라처럼 정부가 예산 지원하고 위원들의 상당수를 정부가 임명하는 규제기관인 언론중재위원회와는 발상부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다만 기구의 독립성을 위한 근거 법을 만들자고 레비슨 판사는 제안했다. 정부나 정치인, 언론인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확실한 독립을 위해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여론조사 응답자 79%가 법에 근거한 독립 언론규제기구를 찬성했다. 김영란 법에 대한 69%지지보다 훨씬 높았다. 보수당 의원 42명도 입법 요구 서한을 발표했다. 자유민주당 당수며 연합정부 부수상인 닉 클라그는 “자유언론이 선량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삶을 파괴시키는 자유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론을 제대로 감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독립규제기관을 위한 입법”이라고 주장했다. “법적 통제는 절대적 재앙이다.” “자유언론의 역사를 내팽개치는 거대한 조치이다.” “신문을 규제하는 과정에서 어떤 형태의 법적 개입도 우리는 수용할 수 없다.” 언론인들의 아우성은 거의 반향을 얻지 못했다.

   
▲ 김영란법./jtbc캡처
그러나 카메론 수상은 여론이나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았다. 언론자유의 역사적 원칙과 그 가치를 우선시했다. 그는 “(언론 행태와 풍토를 개선하려는) 레비슨 판사의 뜻을 이루기 위해 법이 지금 필요한지 납득하지 못하겠다. 새 법은 지금 또는 장래에 언론에 대한 규제와 의무를 부과하려는 정치인들을 위한 도구를 만드는, 위험한 일”이라고 단호하게 입법을 거부했다. 그러면서 그는 “언론인들이 자체 규제 시스템을 다시 만들 것”을 촉구했다. 전직 장관 8명을 포함한 여야 의원 86명이 카메론 지원에 나섰다. 이들은 “레비슨 보고서가 지적한 언론의 횡포는 거의 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과거 일부가 했던 것처럼 신문이 행동하는 것을 묵인할 수 없으나 해결책은 새로운 법이 아니다. 자율규제 체계의 전반적 개혁”이라고 밝혔다. 김영란 법을 92% 찬성률로 통과시킨 한국 국회의원들과는 너무 다른 태도이다.

영국은 신문의 발상지요 자유언론의 사상과 이념을 배태한 곳이다. 하지만 자유언론을 법과 제도로 통제하기 시작한 최초의 나라이다. 1643년 독재자 크롬웰이 도입한 허가제는 역사상 최악의 언론 통제 수단으로 꼽힌다. 허가제는 염소와 양을 분리하는 것이라고도 한다. 성경에 나오는 말로 선과 악을 구별하는 것. 정부가 선한 언론과 악한 언론을 구별해서 허가하는 것은 민주주의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1695년 영국 의회는 허가제 폐지를 결정했다. 이후 의회는 언론·언론인만을 다루기 위한 특별법을 만든 적이 없다. 카메론 수상이 의원들을 향해 루비콘 강을 건너지 말라고 한 것은 370여 년 전 허가제 법을 만든 잘못을 되풀이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 법을 없앤 의회의 자부심을 잃지 말라는 의미이다.

20개월의 협상 끝에 여야가 2013년 3월 내린 결론은 법이 아닌 로열 차트(Royal Chart)로 독립 규제기구를 만드는 것. 여야 모두 승리를 주장한 협상이었다. 법적 기구 주장을 끝내 물리친 카메론 수상은 “(로열 차트)는 법적 기반이 아니다. 정치인들이 손을 댈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안전판이지 언론 규제를 위한 법적 근거가 아니다. 우리가 피하려 했던 것, 피해 왔던 것은 언론 법이다. 그것은 위험하다. 법으로 규제하는 것은 수백 년 언론자유 역사에 종말을 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로열 차트는 옥스퍼드, 캠브리지 등 대학과 BBC 등 공적 기관을 세울 때 사용된 여왕이 발행하는 칙허장이다. 논란은 있었으나 그것에 근거한 '독립언론윤리위원회’가 출범했다.

영국에서 2년 이상 논쟁을 일으킨 법은 김영란 법처럼 언론인을 부정부패 범으로 처벌하려는 법이 아니다. 언론중재법처럼 정부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구로 언론을 규제하는 법도 아니다. 언론인들만의 자율기구가 아니라 언론과 정부로부터도 완전 독립된 언론규제기구를 만들겠다는 법일 뿐이다. 과거 '언론윤리위원회법,’ '언론기본법’에서부터 김영란 법에 이르기까지 언론 통제, 처벌을 위한 한국의 특별법들에 비하면 아무 부담 없이 만들 수 있는 법으로 보인다.

김영란 법에 언론인을 어떤 조사나 공개토론도 없이 포함시키는 한국의 정서나 기준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논란이 아닐 수 없다. 언론인들을 대거 구속 하고 언론사를 강제로 문 닫게 하던 정부와 정치인들을 봐 온 한국 국민들에게 카메론 수상의 비장한 발언이 의미심장하게 들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 언론자유, 자유언론에 대한 한국과 영국의 인식과 태도의 심각한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상 서구의 각국 정부는 언론을 정부를 위협하는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이를 다스릴 특별한 법질서를 만들었다. 그러나 고전자유주의 언론사상은 언론만을 다루는 특별법 체제를 부정했다. 그것은 언론자유, 자유언론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영국이 허가제를 폐지하고 사전 검열제의 합법성을 거부한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언론이 어떤 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언론인들도 시민과 똑 같이 법의 지배에 따르며 일반 법률에 의해 규제를 받는다. 영국 정부(의회)가 기어코 특별법에 의한 언론규제를 피한 이유는 분명하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인들이 언론 특별법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 법을 만드는 권한을 가진 정부와 의회가 언론을 다루기 위한 특별법을 한 번 만들기 시작하면 끊임없이 법을 수정하면서 언론자유를 침해하고 자유언론을 침식하려는 유혹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정치인들을 책임 있게 만드는 언론의 역할과 기능이 정치인들에 의해 위협받고 좌지우지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국 언론인들은 서슴없이 영국 언론을 '반쪽자리 자유언론’이라고 부른다. '언론은 제4부(府).’ 언론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이 말은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다름 아닌 영국학자가 영국 언론을 제4부가 아닌 '4류부’라고 조롱한다. 영국은 지나치게 엄격한 명예훼손법을 언론에 적용한다. 비밀보호법은 국가안보에 관한 언론보도를 철저하게 막는다. 4류로 취급받는 영국언론은 그들의 식민지였던 미국언론을 가장 부러워한다. 1791년 승인된 미국의 수정헌법 제1조는 “의회는 언론자유를 제한하는 어떤 법률도 만들 수 없다”고 못 박았다. 때문에 미국에서는 영국처럼 독립일지라도 언론규제기관을 법으로 만드는 것은 상상 못 할 일이다. 한국처럼 김영란 법에 언론을 끼워 넣은 것은 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에서 언론자유는 단순한 법이나 철학의 개념이 아니라 거의 종교의 교의처럼 인식된다. 언론자유를 보호하고 보장하기 위한 수정헌법 제1조는 미국인들의 삶의 방향과 방식을 지배하는 가치체계의 중심축이다. 그것은 “법이라기보다 꿈 또는 이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미국인들은 보다 나은 현실을 만들기 위한 방법으로 이상을 고안했다. 그들은 수정헌법 제1조가 언론자유와 자유언론의 보호를 통해 그들의 이상을 이룩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언론자유란 이상의 가치를 헌법으로 구현하고, 숱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그 가치를 추구한 미국인의 노력은 국가 발전의 바탕이자 원동력이었다. 그 바탕 위에서 각종 언론 수단을 창조해 발전시켰으며 궁극으로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력과 정치력 등을 얻을 수 있었다고 미국인들은 믿는다.

수정헌법 제1조의 탄생이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언론자유와 자유언론의 진정한 보호자가 된 것도 마찬가지다. 수정헌법 제1조의 탄생을 가능케 한 것은 법조인들의 헌신이었지만 200년 이상 굳건히 그 가치를 지켜낸 것도 법조인들의 분투였다. 자유언론의 번성에는 정부의 규제와 간섭을 제한한 사법부의 역할이 컸다.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언론을 가진 것은 오로지 연방대법원이 수정헌법 제1조의 단어들에 실제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다.

사법부는 자유언론의 부작용을 꼬투리 잡아 통제에 나서는 정부를 무력화시킴은 물론 스스로도 언론의 행태를 문제 삼아 언론자유의 폭을 제한하는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언론이 늘 국민의 기대에 부응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1804년 한 판사는 “완전하게 속박에서 풀린 언론은 모든 악의 근원인 '판도라의 상자’가 될 것”이라며 언론자유의 제한을 주장했다. 법조인들은 자유언론의 폐해와 부작용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간단없이 표시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법부는 자유언론의 가치가 이룩할 최고의 상황을 보호하기 위해, 자유언론이 일으키는 어느 정도의 부작용조차도 보호할 필요성을 인식해 왔다.

찰스 휴즈 연방대법원장은 1931년 “무엇을 사용하든 어느 정도 오용은 불가피하며, 언론의 경우가 가장 적절한 예”라는, 수정헌법 제1조를 썼던 제임스 메디슨 4대 대통령의 말을 인용한 뒤 “일부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언론인들이 언론자유를 오·남용한다고 해서 공직자들의 부정부패를 감시·비판하는 언론은 사전 제한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의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언론자유의 오·남용이 악일 수 있다. 그러나 정부와 권력이 그 보도를 막는 것은 더 심각한 공공의 악”이라고 말했다. 그는 언론의 타락을 빌미로 언론 통제에 나서는 정부의 욕망에 강한 경고를 보냈다.

연방대법원은 1974년 “무엇을 신문에 실을 것인가를 선택하고, 어느 정도의 크기와 내용으로 보도하며 어떻게 공적 문제와 공직자들을 다룰 것인가의 결정은 그것이 공정하든 불공정하든 편집권의 통제와 판단에 달려있다”며 반론권 허용을 거부했다. 바이런 화이트 대법관은 반론권과 같은 언론 피해 구제 방법은 반드시 정부기구를 만들도록 하며, 그러한 정부의 강제력은 수정헌법 제1조와 사법부의 해석과 충돌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연방대법원은 신문과 정부 사이에는 만리장성이 가로 막혀 있다고 했다.

정부가 법으로 규정한 반론권이 언론에 대한 정부의 개입과 간섭으로 귀결되는 점을 우려했다. 반론권을 허용하는 어느 나라에도 없는 한국의 언론중재위원회가 언론을 견제하기 위한 대통령과 공무원들의 손쉽고도 유용한 법적 도구가 되어버린 상황을 화이트 대법관 등은 정확하게 예측한 것이다. 심지어 포터 스튜어트 연방대법관은 '제4부’로서 정부의 비밀과 기만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사기업인 언론을 헌법으로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론이 정부의 공개를 요구할 수 있도록 헌법으로 보장하자는 것이다. 이들 연방대법관과 김영란 전 대법관의 언론자유와 자유언론에 대한 인식의 수준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수정헌법 제1조의 정신을 끊임없이 판결에 반영해 온 연방대법원도 스튜어트 대법관의 주장을 명시적으로 지지하거나, 언론을 일반 국민과 다르게 특별대우를 하지는 않는다. 일반법의 적용을 면제받을 자격이 없다면 서도 판결의 상당수는 언론의 필요와 이해에 따라 결정되었다. 헌법상 특별한 지위가 없어도 언론은 엄청난 법의 보호를 받는다. 대부분의 재판에서 기자들은 법규, 보통법 또는 주 헌법에 근거한 특권을 가진다. 특히 연방대법원은 의회는 언론을 특별히 보호하는 법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인정했다.

이에 따라 의회는 신문발행인들은 독점금지법으로부터 제한적 면제를 받는 신문보호법, 편집국은 오로지 아주 제한된 조건에서만 압수수색을 할 수 있는 사생활보호법, 언론사들은 선거 관련 뉴스 등의 제작에 든 비용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신고할 필요가 없다는 선거운동법 등을 만들었으며 언론인에게 정보 공개 비용을 감면해 주는 조항을 정보공개법에 넣었다. 그리고 각 주의 의회는 비밀 취재원의 신원 등을 밝히지 않을 권리, '기자의 특권’을 보장하는 방패법을 만들었다.

이와 달리 한국 정부나 국회는 방패법도, 정보공개 비용을 감면해 주는 조항도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언론중재법을 만들고 선거운동의 주체에 대한 엄격한 통제를 하는 공직선거법에 언론인을 포함시켰다. 미국은 언론을 보호하고 특권을 주기 위해 법을 만들지만 한국은 규제와 처벌을 위해 법을 만든다. 언론 법에 관한 영국과 미국의 차이는 크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는 엄청나달 수밖에 없다. 결코 특별법으로 언론 규제를 하지 않겠다는 영국, 기자들에게 특권을 주는 특별법을 만드는 미국 모두 한국과 극단으로 대비되는 언론 환경을 가진 나라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이나 영국과 언론이나 법에 관한 전통이나 문화 등이 모두 다르다. 우리나라는 우리만의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법을 만들었다면 제대로 만들어야 하지 않은가. 김영란법에는 법리상 문제가 너무 많다.

   
▲ 지난 3월 3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일명 김영란법(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2016년 10월부터 시행되는 것으로 결정됐다. /사진=연합뉴스
첫째, 언론인과 공무원의 차이를 무시했다. 국민 누구라도 부정한 청탁이나 금품을 받지 않아야 한다. 국가세금으로 월급을 받는 공무원이 그런 짓을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언론인들도 마찬가지이다.

허나 공무원은 헌법상 특수한 지위를 가지므로 사인과 다르다. 직업공무원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공무원에게 반사적으로 인정되는 제도상의 지위인 특별한 신분보장을 받는다. 공무원은 국가의 공적사무를 수행할 권리와 함께 신분상·재산상의 부수적 권리를 누린다. 즉, 공무원은 공무수행상의 사유가 아니면 자신의 지위를 상실하거나 기타 불이익한 처분을 받지 않는다.

또 법정 보수 이외에 각종 연금 내지 보상청구권을 갖는다. 이처럼 여러 권리를 가지는 만큼 법으로 규정하는 고도의 윤리·도덕적 의무를 갖는다. 전인격과 양심을 바쳐 공공의 이익을 위해 성실히 근무하는 등의 직무상 의무를 다해야 함을 물론이고(성실의무, 국가공무원법 제56조 57조, 지방공무원법 제48조 제49조), 직무의 내외를 불문하고 품위를 손상하는 행위는 해서는 안 되고(품위유지의무, 국가공무원법 제63조, 지방공무원법 제55조), 직무와 관련하여 직·간접 불문하고 사례나 향응 등을 수수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헌법상 특수 지위가 없는 사인인 언론인들은 공직자와는 달리 청렴성에 관해 정부가 만든 법적 의무를 지지 않는다. 언론인들은 국가의 공적 사무를 수행할 권리가 없으므로 당연히 국가가 보장하는 특별한 신분상·재산상 권리도 누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정부로부터 보수를 받지 않으므로 언론인들에게는 정부가 지원하는 언론연금 등과 같은 부수적 권리가 없다.

따라서 정부가 요구하는 성실이나 청렴에 관한 법적 의무를 저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다만 언론의 역할과 기능이 공공성이 강하므로 언론인들은 공무원들에게 부과된 것 이상의 높은 윤리·도덕적 의무를 진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언론인들은 소속 언론사나 언론 단체의 윤리강령 등 엄격한 언론윤리를 따르도록 요구받는다. 실정법을 위반하면 그 대가를 치른다. 그런 언론인을 어떻게 공무원과 한 묶음으로 처벌하겠다는 것인가. 입법 과정의 첫 출발인 법 적용의 대상 선택부터 잘못 된 것이다,

둘째, 법의 적용 대상인 언론인의 개념이 너무 모호하다. 처벌하고자 하는 대상이 분명하지 않다. 언론사의 범위를 정하고 언론인을 정의하는 어려움을 간과했다.

헌법의 죄형법정주의는 “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없고 형벌도 없다”는 말이다. 국가형벌권의 자의적 행사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려는 법치국가의 기본원칙이다. 죄형법정주의로부터 파생되는 명확성의 원칙은 누구나 법률이 처벌하고자 하는 행위가 무엇이며 그에 대한 형벌이 어떠한 것인지를 예견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자신의 행위를 결정할 수 있도록 범죄의 구성요건과 형벌을 명확하게 규정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범죄의 구성요건이 추상적이거나 모호한 개념으로 이루어지거나 그 적용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어서 불명확한 경우에는 국민이 법률에 의해 금지된 행위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위배된다. 물론 다소 광범위하고 어느 정도 범위에서는 법관의 보충적 해석을 필요로 하는 개념을 사용해 규정했다하더라도 그 적용 단계에서 다의적으로 해석될 우려가 없는 이상 명확성의 요구에 배치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판단이다.

김영란 법은 입법 목적을 공직자 등의 공정한 직무수행을 보장하고 공공기관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규정한 뒤 공공기관에 언론중재법에 따른 언론사가 포함된다고 규정했다. 과연 언론사가 공공기관인가.

정보공개법에 따르면 '공공기관’은 국가기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제2조에 따른 공공기관 그 밖에 대통령령이 정하는 기관을 말한다. 공공기관 운용법에 따른 공공기관은 정부가 출연한 기관이나 정부 지원액이 총수입의 절반이 넘는 기관, 정부가 정책 결정에 사실상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는 기관, 방송법 상 KBS와 EBS 등이다. KBS와 EBS를 제외하고 현행법상 언론중재법에 따른 언론사가 공공기관으로 분류될 근거는 없다. 국가기관도 아니요 정부가 만들었거나 지원하는 것이 아닌, 전적으로 사기업인 신문사나 방송사 등이 어떻게 공공기관이 될 수 있는가. 김영란 법이 언론사를 현행법상 공공기관의 정의에 근거해 공공기관에 포함시켰다면 법리상 중대한 잘못이다. 국가기관 등 공공기관과 언론은 본질적으로 다른데도 자의적으로 같이 취급하는, 헌법상 자의금지원칙(평등원칙)에 어긋난다.

만약 김영란 법이 공공기관을 정보공개법에서 말하는 공공기관만이 아닌 일반적 공공성을 가진 기관이라고 한다면 그 정의는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공공성을 가진 기관은 언론 이외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렇더라도 왜 언론기관과 사립학교만이 공공기관에 포함되는가. 불법의 평등 문제가 제기된다. 왜 하고 많은 공적 기관 가운데 유독 언론사만 금품수수 등만 수사와 처벌의 대상으로 삼는가. 언론사만 불법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 기관으로 상정해서 입법 대상에 포함시킨 것에 객관적으로 명백한 근거가 있는가.

자의금지원칙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것을 자의적으로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과 아울러 본질적으로 서로 같은 것을 자의적으로 다르게 취급하는 것도 금지된다고 하는 법리이다. 즉, 국가는 특정영역에서 입법과 법의 집행에 있어 그 대상이 되는 복수의 집단을 처리하는 경우에 그 비교집단을 모두 동일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것. 김영란 법이 공공성이 강한 기관으로 공공기관을 정의해 언론사를 포함시켰더라도 그것은 자의금지원칙에 위배된다 할 수 있다. 금융기관의 경우를 살펴 볼 때 위배임은 더욱 명백해진다.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공무원이 아닌 금융기관의 임직원도 공무원에 버금가는 정도의 청렴성과 직무의 불가매수성(不可買收性)이 요구된다. 금융기관이 영리 목적 사기업이지만 특별법에 의해 설립되고 그 사업 내지 업무가 공공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임직원에 대해 공무원과 마찬가지로 엄격한 청렴의무 등을 부과한다는 것. 그렇다면 김영란 법의 공공기관에는 금융기관이 어느 공적 기관보다 먼저 포함되어야 한다. 특가법의 입법 취지 등으로 미루어 법적 근거가 충분하다. 금융기관과 비교할 때, 많은 공적 기관 가운데 유독 언론사와 사립학교가 공공기관에 포함된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자의적으로 다르게 취급하는 자의금지원칙의 위반이다. 물론 합리적 근거가 있는 차별 또는 불평등은 평등원칙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헌법재판소의 입장이다. 도대체 김영란 법이 가진 합리적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공무원과 거의 같은 수준의 법적 청렴 의무를 요구받고 있는 금융기관 종사자를 제외한 채 윤리적 차원의 도덕성을 요구받는 언론인들을 포함시킨 것은 합리적 입법으로 보기 어렵다.

김영란법은 또 법의 적용 대상인 '공직자 등’을 공직자 또는 공적 업무 종사자라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언론중재법에 따른 언론사의 그 대표자와 그 임직원을 공적 업무 종사자로 보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과연 언론사 대표자와 임직원 등이 공적 업무 종사자인가. 공적 업무 종사자란 누구를 말하는가. 헌재는 “금융기관의 임직원에게는 공무원으로 의제(擬制)되는 공적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들에 버금가는 정도의 청렴성과 직무의 불가매수성이 요구된다”고 판시했다. 공무원으로 의제되는 사람이 공적 업무 종사자라 할 수 있다. 공무원 의제는 공공기관 등의 임직원, 행정기관으로부터 위탁받은 업무를 수행하는 법인이나 단체의 임직원과 개인 등이 업무와 관련해 금품 수수 등 불법행위를 한 경우 공무원과 같이 다루어 처벌할 수 있도록 함이다. '벌칙 적용에서의 공무원 의제' 규정의 적용 대상으로 규정되는 사람은 행정기관으로부터 위탁받은 업무를 수행하는 법인 또는 단체의 임직원과 개인, 각종 위원회의 위원 등으로 공기업 등의 임직원, 공무원 연금관리공단 임직원, 국민건강보험공단 임직원, 중소기업은행의 임원 등이 포함된다.

현행법에는 언론사 대표자와 임직원을 공무원으로 의제해 벌칙을 적용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없다. 언론사는 어떤 행정기관으로부터 업무를 위탁받지 않는다. 오히려 행정기관을 감시·비판하는 기관이다. 언론사 대표자나 임직원은 공직자도 아니지만 공적 업무 종사자도 아니다. 그들은 공공의 관심사인 뉴스를 다루는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일 따름이다. 단순히 공공성이 강한 업무에 종사한다고 해서 '벌칙 적용에 있어서의 공무원 의제' 규정을 적용한다면 그것은 법의 횡포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억지로라도 언론사 임직원을 공적 업무 종사자로 규정한다면 임직원이 구체적으로 누구이며, 언론중재법에 따른 언론사만을 한정한 것이 적절한가의 문제가 남는다. 언론중재법의 제소 대상은 기사를 낸 언론사이지 기자가 아니다. 언론중재법은 언론인의 범위를 정할 필요가 없는 법이다. 그러나 김영란법은 기사가 아니라 사람을 대상으로 한 법이므로 처벌 대상이 되는 언론인 즉, 공적 업무 종사자라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냐를 분명히 해야 한다. 언론중재법이 규정하는 언론 기관만을 법 적용 대상으로 한 것이 적절한가, 언론 기관 내부의 누구까지를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지를 엄밀하게 따져 정해야 한다.

법을 만들면서 언론인의 범위에 대한 규정이 없는 언론중재법을 언론인의 범위를 정하기 위한 근거로 삼았다는 것은 문제이다. 언론사는 언론중재법이 규정한 것처럼 신문, 방송, 통신, 인터넷 신문뿐인가. 또 법이 규정한 언론사 임직원 범주에는 신문, 방송, 통신, 잡지, 인터넷 매체에서 뉴스를 직접 제작하는 기자만이 포함되는가 아니면 기자들을 지원하는 각종 행정직원이나 광고업무 직원도 포함되는가. 단순히 뉴스를 읽어주는 아나운서들은 어찌되는가. 이들 모두 언론인이어서 공적 업무 종사자로 간주되어야 하는가. 법을 봐서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언론인의 불법행위를 처벌하는 법에 언론인의 정의와 범위가 명확하지 않은 것은 심각한 흠결이다.

언론사나 언론인의 범위를 정하는 것은 언론자유에 관한 근본적 철학 문제와 맞닿아 있다. 언론사나 언론인을 좁게 정의할 경우 언론자유를 좁게 해석하는 결과가 된다. 모든 국민이 누리는 언론자유를 소수의 언론인들만 독점하는 결과가 된다. 법의 적용에는 편한 상황이 될지 모르나 언론자유의 본질 가치를 훼손하는 결과가 된다. 그동안 신문 방송 등 전통매체의 언론인들이 음성적으로 누려오던 여러 가지 사회적 대우나 혜택(가령 관공서 기자실 출입 등)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동등한 대우를 원하던 자칭 언론인들, 시민기자, 블로거, 프리랜서 등은 이제 이 법이 존재하는 한 차별 대우를 받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처벌하는 법의 적용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면서 어떤 특혜나 대우를 받기를 요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럴 경우 언론자유는 전통매체에 속한 언론인들만의 자유가 되고 만다. 디지털 시대에 언론자유를 그렇게 좁게 규정하는 나라는 드물다.

그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 언론인을 넓게 정의한다면 그 범위는 어디까지 정할 것인가. 지금은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언론인의 기능과 역할이 변화를 거듭하는, 누구라도 기자가 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럴 경우 '기자’라는 정의는 과도한 광범성의 원칙에 반할 수도 있다 (헌재는 98년 출판물의 규제요건으로 '저속’이라는 표현은 지나치게 광범위한 표현 내용을 규율하는 것이어서 과도한 광범성의 원칙에 반한다고 결정한 바 있다). 김영란 법의 처벌 대상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날 수도 있다. 반대로 언론중재법상 언론사 소속의 기자들로만 기자를 한정할 경우 또 다시 자의금지원칙에 위배될 수 있다.

언론인을 정의하는 것은 복잡하고 곤혹스런 일이다. 불가능한 일로 꼽히기도 한다. 그만큼 언론인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언론을 보호하는 법의 입법에도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미국 등 다른 나라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다.

미국만 해도 사법부와 의회, 언론, 학계 등이 100년 이상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으나 '기자’의 범위에 대한 정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연방대법원도 기자를 정의하는 책무를 의회에 떠넘겼다. 연방대법원은 “의회가 사법부보다 복잡한 사회적 문제에 관해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평가할 수 있는 장치를 더 잘 갖추고 있다”며 의회가 보호받아야 할 기자의 범위에 대한 기능적 정의를 고안함으로 기자의 특권을 둘러싼 각종 갈등과 이견을 해결하도록 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연방대법원은 언론인 역시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연자, 소설가, 학문 연구자, 극작가 등이 공공의 소통에 기여하는 것과 마찬가지 역할을 언론이 한다”며 제도언론, 즉 신문이나 방송과 같은 조직화한 언론의 특별한 역할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이처럼 신문이나 방송 등의 언론자유와 일반 국민의 표현의 자유가 똑 같이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는 생각은 '기자’를 정의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다는 연방대법원의 관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언론자유는 개인의 기본 권리이기 때문에 '기자’를 분류하면서 어떤 일반 국민도 배제하는 것이 어렵다고 연방대법관들은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자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기자의 특권’은 없다고 결론 내린 것이다.

연방대법원으로부터 책임을 떠맡은 각 주의 의회는 나름대로 언론인의 범위를 정해 기자에게 특권을 주는 방패법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범위는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혼란과 논란이 끊이질 않는다. 주 방패법은 대체로 전통언론 종사자들에게 기자의 특권을 준다. 그러나 매체와 기자의 범위에 대한 규정은 주마다 다르며, 해석하는 법원마다 다르다. 잡지 기자도 빼고 오로지 신문과 방송사의 기자만 인정하는 주가 있는 반면 책의 저자, 프리랜서 작가, 학술 연구자, 홍보 관계자도 언론인에 포함시키는 주가 있다. 라디오 방송국의 경영진과 소유주는 제외하나 텔레비전 경영진과 소유주는 언론인으로 규정하는 주가 있다. 주와 법원에 따라 블로거나 시민기자 등 여가시간 활용이나 취미 활동으로 글을 올리는 인터넷 이용자들을 기자 범주에 포함시키는지 여부가 다르다. 법원은 국가안보기록보관소를 연방정보공개법의 혜택을 받는 언론이라고 판시했다.

하지만 미국에는 연방방패법이 없다. 각 주마다 다른 특권 수혜자의 범위를 일정하게 해 법의 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연방 차원의 지침이 필요하다며 연방방패법 입법이 추진되어 왔다. 40여 년 동안 꾸준하게 상원에 법안이 상정되고 있으나 통과되지 못하고 있다. 의원들이 언론을 보호하는 법일지라도 언론인의 범위를 의회가 제한하는 것은 수정헌법 제1조 위반이라 판단할 뿐 아니라 언론인의 정의에 관한 합의를 하지 못하기 때문. 아무리 논쟁을 벌여도 누구나 공감하는 범위를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멕시코 의회는 2012년 마약 범죄자 등의 언론인에 대한 공격을 연방범죄로 규정하는 헌법 수정안을 만들면서 언론인을 정의하는데 실패했다. 언론인을 보호하는 법이지만 언론인의 범위를 정하지 못해 의회는 법 적용을 크게 확대하는 두루뭉술한 수정안을 통과시키고 말았다.

언론인을 처벌하기 위해 언론인의 정의와 범위를 정부나 의회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언론자유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다. 변호사나 의사와는 달리 면허증이 없는 직업이 기자이다. 정부가 기자 면허증을 발급하는 것은 언론자유를 치명적으로 위협하는 행위로 꼽힌다. 우리나라도 5공화국 때 언론기본법에 따라 문공부에서 기자증을 발급한 적이 있다. 정부 언론 통제와 탄압의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되면서 그 제도는 폐지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언론인’을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있는 유일한 법이 언론인의 입후보 선거운동을 제한한 공직선거법이다. 그러나 서울중앙지법은 2012년 “대통령령이 정하는 언론인”의 선거운동 등을 금지한 공직선거법 제60조 제1항에 대한 위헌법률심판 제청 신청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언론인’ 규정은 그 범위나 한계를 설정하기 어려운 불명확한 개념일 뿐 아니라 대통령령에 위임한 것은 위임입법의 한계를 벗어났다”고 지적했다. 법으로 언론인을 정의하는 것은 물론 그것을 대통령령으로 규정한 것도 문제라는 것. 헌재의 위헌 여부 판단을 기다리는 법규가 존재하는 데도 그 보다 더 모호한 규정을 만드는 것은 입법자의 무신경 때문인지 무지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정부나 의회가 언론인의 범위를 함부로 규정하는 것이 국민의 기본권인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것임을 알고 있는가. 나아가 다른 나라들이 언론인을 정의하는 어려움 때문에 언론을 보호하는 법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한 사실을 알고 있는가. 김영란 전 대법관이 그런 상황을 알고도 문제없다고 했는지 의문이다. 언론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법이라면 더 엄밀하게 언론인을 정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에 대한 공개논의 없이 '언론인’을 끼워놓은 입법자의 저돌성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언론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나 지식 없이, 언론인을 혼내야겠다는 생각만 앞서 마구잡이로 법을 만들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세 번째, 김영란 법에는 언론인에 대한 부정청탁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조항이 없다. 도대체 어떤 행위가 금지되는지 알 수 없다. 법 제5조는 부당한 인가, 허가 등부터 각 급 학교의 입학, 성적, 수행평가 등의 조작 등에 이르기까지 법 위반 사항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하지만 누구든지 직접 또는 제3자를 통해 언론사 대표자나 임직원에게 어떤 부정청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없다. 부정청탁을 해서 인터뷰 기사가 나오게 했다는 등 구체적으로 법률이 처벌하고자 하는 행위를 밝히지 않았다.

반면 법은 법을 적용하지 않는 경우도 열거했다. 여기에도 언론이 하는 일 가운데 어느 것이 법 적용 대상이 아닌지 규정하지 않았다. 굳이 찾는다면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인정되는 행위'라는 조항이 있다. 뒤집어 보면 사회상규에 위배된다고 인정되는 언론의 행위는 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뜻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사회상규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것이며, 언론의 행위 가운데 어느 것이 사회상규에 위배되거나, 되지 않는지 어떻게 정할 것인가. 형벌 등 불이익을 부과하는 경우에 명확성의 원칙이 더욱 강하게 요구됨에도 불구하고 법을 적용하겠다는 대상자도 불분명한데다 불법 행위를 적시한 조항도 없으니 참으로 허술한 법이 아닐 수 없다.

기자가 아닌 임직원들은 자신이 법의 적용 대상이 되는지를 예견하기 어렵다. 나아가 그들 뿐 아니라 기자들도 이 법이 처벌하는 행위가 무엇이며, 어떤 형벌이 있는지를 예견하기 힘들다. 누가 언론인인지, 무엇이 불법행위인지 불분명하니 수사도, 재판도 어려울 것이다. 법이 엄밀하게 언론인의 범위나 불법행위를 규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수사기관들이 임의대로 결정을 할 것인가. 법관들이 보충적 해석으로 정의하기엔 언론인의 개념에 대한 해석이 너무 다양하다. 모호한 규정은 수사기관이나 법원에게 너무 많은 재량권을 주게 되니 예상 밖의 심각한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언론자유를 중시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김영란 법의 언론인 조항은 삭제하는 것이 마땅하다. 법적 근거가 없거나 법리상 무리인 조항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사실상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는 언론인의 범위를 정하는 일에 이르면 언론인 조항은 사회적 숙제가 될 수도 있다. 그 조항의 폐기는 지극히 당연하다. 적어도 언론자유에 대한 철학적 정당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언론에 대한 웬만한 지식을 가졌다면 한 나라의 대법관을 지낸 사람이 이런 무리한 무모함 입법을 옹호할 것이 아니라 “잘못됐다”고 일갈을 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미국의 연방대법관들이 아니더라도 영국의 정치인 카메론 수상을 보라.

미국처럼 강한 언론자유가 마뜩치 않다면 영국처럼 독립된 언론규제기관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당연히 언론인들의 반성과 높은 윤리의식을 실천하는 분발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런 법이 생기도록 원인을 제공한, 문제투성이의 법이 만들어져도 제대로 대응을 못하는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언론인들이 정신 차려야 한다. /손태규 단국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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