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가·노동자 계급 구분 마르크스주의 사회 곳곳 잔재 갈등 부채질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28일 “자본에 대해 올바르게 알자”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자유경제원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시장경제에 대한 그릇된 통념을 깨뜨리기 위한 연중·연속토론회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 날은 자본에 관한 3차 토론회의 자리다.

이 날 토론회는 현진권 원장(자유경제원)의 사회, 김승욱 교수(중앙대 경제학부), 안재욱 교수(경희대 경제학과), 한정석 편집위원(미래한국), 권혁철 소장(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구태경 학생(경희대 경영학과)의 토론으로 이루어졌다.

발제를 맡은 김승욱 교수(중앙대 경제학부)는 "자본의 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본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기업가의 존재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제조업의 쇠퇴와 지식산업의 발전에 따라 자본의 개념도 변화되고 있다. 지식자본을 보유하고 있는 지식근로자들은 화폐자본의 공급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자본을 공급하며, 이들은 서로 의존한다"며 "자본의 개념이 크게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사회를 구분하고 이들 간의 갈등으로 사회를 파악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사회 도처에 자리 잡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맞는 자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래 글은 김승욱 교수의 '자본의 미스터리: 자본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되는가?' 발제문 전문이다.

1. 자본에 대한 통념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은 자본의 소유자들은 노동을 하지 않는 기생계층으로 이해한다. 고대 노예제사회 자유민들이 노예에게 일을 시키고 유한계급으로 생산에 종사하지 않았던 것처럼, 중세 농노제 사회의 토지귀족들도 역시 기생계급으로 인식했다. 마찬가지로 자본제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도 역시 노동자들의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계급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더글러스 노스(Douglass North)는 봉건제 하의 영주 계층은 치안과 국방이라고 하는 공공재를 제공하는 존재로 보았다. 중세에는 전쟁은 귀족 기사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래서 기사들의 사망률이 높았다. 예를 들면 영국에서 공작의 자녀들이 1330-1479 기간 중에 46%가 전쟁으로 사망했다. 전쟁으로 사망한 공작계층을 제외한 평균 수명은 31세였는데, 전쟁으로 죽은 자를 포함한 평균수명은 24세에 불과하다. 노스는 자급자족적인 장원제를 기반으로 형성된 중세 유럽의 봉건제를 계약에 기반을 둔 사회체계로 정의했다.

노스는 이러한 사회가 발생한 이유를 무정부 상태의 광활한 황무지가 있는 상황에서 인구밀도가 낮고 시장이 없는 상황 때문에 생겨난 자연발생적인 질서의 체계로 이해한다. 노스는 모든 권한을 가진 영주가 왜 농민을 노예화하지 않고 농노로 대우해 주었던 이유는 첫째, 공공재(치안과 국방)를 제공하는 경쟁자가 가까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즉 노동은 희소했고, 억압받는 농민이 도망갔을 때 그를 받아들일 경쟁적 영주가 이웃에 얼마든지 존재했기 때문이다.

둘째, 농민을 노예처럼 부리기 위해서는 많은 감독 및 강제비용이 소요되는데, 그것은 토지는 풍부하고 노동력은 부족한 상황에서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를 주는 대가로 느슨한 통제를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주들은 생산물지대보다 노동지대를 선호했다. 그리고 봉건제 하에서 영주는 농노에게 소작인처럼 지대를 생산물의 일부로 받지 않고 노동력으로 노동지대 를 받았는데, 이로 인해서 농민은 토지에 묶여 있었고, 자유가 제한되었다.

영주가 생 산물의 일부를 지대로 받지 않고 노동을 요구했던 것은 로마제국 몰락 이후 조직화된 상품시장이 사라졌기 때문에 가격에 관한 정보가 없었고, 따라서 풍흉에 따라 협상비용이 많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노동지대가 위험을 분산시켜 협상비용을 줄이는 길도 되었다. 즉 거래비용의 일종인 협상비용이 높을 때는, 노동투입을 나누는 제도가 가장 효율적이었다. 그리고 노동투입의 분할을 포함하는 수확분할제도는 위험을 분산시키는 것이기도 했다.

중세 사회의 영주-농노 관계의 성격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의 착취-피착취 관계가 아닌 계약에 의한 사회체제로 인식하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도 서로 역할이 다른 것이다. 사실 자본주의 초기에 귀족들 가운데 젠트리 계층은 농장경영자이다. 오늘날 부동산 주인은 놀고먹으면서 임대료만 챙긴다는 인식이 많지만, 사실 건물과 그 관리라는 서비스 제공자이다. 그리고 주식이나 채권 등에 투자하 고 노동을 하지 않는 계층도 있지만, 대부분의 자본가들은 기업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서양에서 중세까지는 노동을 가치 있는 일로 여기지 않았다. 고대 철학자들도 그러했고, 중세 기독교에서도 노동은 타락으로 인류에 들어온 저주였다. 땀 흘려야 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에 노동을 선한 것으로 인식 하고, 근면과 절약을 미덕으로 여기게 된 청교도 이후에 부가 축적이 되었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부를 재생산에 투자하는 것을 선하게 인식하면서, 자본을 축적한 자본가 계층이 발생했다. 이 자본가 계층은 육체노동 대신 생산에서 다른 역할을 감수했다.

그런데 노동가치설의 등장으로 자본의 역할과 노동의 역할에 대해서 분리하게 되면서 자본가계층은 고대 노예제사회나 중세 봉건제 사회와 같이 착취계층이라는 인식이 마르크스에 의해서 확산되었다. 따라서 자본에 대한 가장 큰 편견은 자본가가 아무 역할도 하지 않으면서 노동자의 몫을 착취한다는 것이다. 특히 세계화로 인해서 자본의 이동이 활발하게 되면서 자본 의 착취가 범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 세계화에 대한 반발이 더욱 커지고 있다.

사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이념 갈등의 대부분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과거에는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의 논쟁이었는데, 공산주의 진영이 붕괴된 이후, 세계는 세계화 대 반세계화 진영으로 나뉘어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반세계화 진영에는 민족 주의자, 환경주의자, 평등주의자 등이 포진해 있다. 이러한 통념을 깨기 위해서 어디에서부터 출발해야할까? 먼저 자본의 역할에 대해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는 자본가의 역할을 노동자의 잉여노동을 착취하는 기생적인 존재로 파악했는데 과연 자본가의 역할이 없는 것인가?

   
▲ 김승욱 교수는 "자본의 개념이 크게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사회를 구분하고 이들 간의 갈등으로 사회를 파악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사회 도처에 자리 잡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맞는 자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사진=연합뉴스
2. 자본부족 시대 자본의 역할

마르크스 시대는 자본부족시대였다. 어느 시대에나 부족한 생산요소의 가격이 오르고 그래서 생산의 과실을 더 많이 가져갔다. 노동이 부족하면 임금이 오르게 되고, 노동이 풍부하면 임금이 떨어진다. 오늘날 중국이나 인도 등 인구과잉국의 인건비가 싸고, 노동력이 부족한 미국 등 선진국에서 인건비가 비싼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이 귀하던 시절에는 이자율이 높다.

우리나라도 개발초기에 돈 구하기가 어려웠다. 노스는 역사에서도 생산요소의 상대가격의 변화로 인하여 제도가 변한다고 주장했다. 로마시대에는 로마의 군사력에 의해서 치안과 국방이라는 공공제의 공급이 원활하게 공급이 되었는데, 게르만 민족의 이동과 로마의 경제력의 약화로 인해서 치안유지가 어려워지고 공공재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그러자 변방의 영주들이 가지고 있는 작은 지역에 대한 공공재가 로마 제국이 제공하는 공공재의 대체재가 되어서 농민들은 자신의 농토를 영주들에게 투탁하고 영주의 보호아래 들어가면서 봉건제가 발생했다.

또한 과거 농경시대의 생산요소는 토지와 노동이다. 토지의 소유자는 영주이고, 노동의 소유자는 농노이다. 서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중세 시대가 형성되던 5-6세기에는 야만족의 잦은 약탈로 인해서 인구가 줄어들어 유럽 사회는 광대한 황무지 속에 장원은 바다 속의 외딴 섬처럼 존재했다. 공공재가 귀해서 봉건제가 형성되었으나, 상대적으로 농토는 흔하고 인구감소로 인해서 노동력은 귀했기 때문에 영주는 앞에서 설명 한 바와 같이 농민들을 과거의 노예처럼 대하지 않고 농노들의 가정도 인정하고, 상속도 허락했다. 다만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다는 점에서 근대 소작농과 다를 뿐이었다.

그런데 점차 유럽이 안정되어 가면서 10세기경에 인구가 서로마 멸망 전인 5세기 수준으로 회복되면서 황무지가 다 개간이 되어 유휴(遊休) 토지가 사라지게 되어, 토지가 귀하게 되어 이번에는 농노에 비해서 영주의 교섭력이 더 커졌다. 그리하여 마르크스가 언급했던 영주의 농노에 대한 지배가 강화되었다. 그런데 12세기부터 200년간 지속된 십자군 전쟁과 14세기의 흑사병 등으로 인해서 유럽의 인구가 크게 감소하면 서 다시 농노의 교섭력이 커지면서 중세 유럽의 장원은 붕괴되고 근대 자영농이 등장 하게 된다.

이렇게 장기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생산요소의 상대적 중요성에 따라서 제도도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적으로 풍부한 생산요소의 소유자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희소한 생산요소를 가진 소유자는 더 많은 생산의 과실을 누린다. 이것을 마르크스는 착취라고 명명했고, 주류경제학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인식한다. 오늘날에도 필리핀 여성들은 홍콩에서 가정부로 일을 하면서 우리나라 화폐가치로 60만 원에 불과한 임금을 받고 있다.

이것을 홍콩주민이 필리핀 여성을 착취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필리핀 여성은 자기 나라에서는 그만한 소득도 올릴 수 없기 때문에 보다 자발적으로 홍콩으로 향하고 있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산업혁명기에 자본이 부족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본가에게 돌아간 몫이 컸다. 그렇다고 강제노동을 동원한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이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박봉에 장시간 노동에 시달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당시의 농촌 상황은 주기적인 흉년으로 기근과 싸워야 했던 것과 비교하면 노동자들은 자발적으로 도시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중상주의 시절을 겪으면서 신대륙에서 흘러들어온 귀금속으로 인해서 상품경제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리고 동아시아와의 향신료 무역, 삼각무역, 사탕수수 재배에서 얻은 이윤 등으로 인해서 서서히 자본이 축적되고, 부유해진 유럽 열강들의 소비수요가 크게 확산되었다. 이로 인해서 산업혁명기에 축적된 자본과 기술혁신이 부유해진 소비자층을 만족시키기 위한 생산의 비약적 발전으로 연결이 되면서 더욱 자본 수요가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은행 등을 중심으로 은행제도는 발전하고 있었지만, 아직 은행에서 대출 등의 기법이 확산되지 않았고, 주식시장도 오늘날 처럼 널리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자기 자본에 기초한 공장과 회사의 설립이 불가피 했다. 이로 인해서 공급자본은 사회적 자본수요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했고 따라서 자 본가는 더 많은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이를 마르크스는 착취라고 간주했다.

3. 자본 과잉시대

월 스트리트와 같은 자본의 공급처가 활성화되면서 자본의 공급이 크게 늘어서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서 자본이 남아도는 자본과잉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일본은 이미 오래전에 실질금리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미국과 유럽도 그 길을 가고 있다. 한국도 이제는 실질금리가 마이너스 수준이다. 과거에 실질금리를 계산할 때 명목금리에서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뺀 실질 기준으로 계산할 때 2011년에는 마이너스(-0.31%)였다. 2012년에는 플러스(1.23%)로 돌아섰으며 2013년(1.40%)에는 조금 더 높아졌으나, 여전히 낮은 수준이다.

한국은행 등 당국이 사용하는 기대인플레이션율로 계산하면 예 금자가 체감하는 실질 금리는 더 낮다. 즉 실질금리를 명목금리에서 기대인플레이션 율을 제외하는 방식으로 계산할 경우 한국의 실질 정기예금 금리는 2013년에는 – 0.29%였고, 2014년에는 -0.37%로 마이너스 폭이 더 확대됐다. 이렇게 실질금리가 마이너스인 것은 자본과잉 시대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과 같은 자본과잉 시대에는 아이디어만 있으면 자본을 쉽게 구할 수 있다. 좋은 아이디어를 찾는 벤처 투자자는 도처에 있다. 그들이 투자할 마음이 생기게 하는 아이디어가 부족한 시대이다. 마르크스는 이윤율이 하락하면 노동자들을 더욱 착취할 것이라고 했지만, 기업가 정신과 아이이디가 더 큰 이익을 누릴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오늘날 일자리가 부족한 이유는 뛰어난 기업가정신이 부족하고, 일자리를 해외로 빼앗겼기 때문이다. 돈을 은행에 넣어두면 자동적으로 수익이 발생하는 시절은 끝났다. 그 자본을 활용해서 수익을 창출하는 아이디어나 경영능력을 가진 기업가가 매우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마르크스는 자본과 임노동의 분리를 자본주의의 특징으로 설명했지만, 사실 자본가와 기업가의 구분도 역시 중요하다.

산업혁명 초기에는 자본가와 기술자, 발명가, 기업가의 구분이 희미했다. 산업혁명보다 훨씬 이전 시대에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8-1468)는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최초의 라틴어 성서를 인쇄했을 뿐만 아니라, 그는 1450년에 인쇄소를 설치한 인쇄소 주인이었다. 그는 불가타 성서를 대량 인쇄하여 성서를 대중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작품들도 대중화시켜서 이것이 르네상스의 기초를 제공했으며, 신문이 탄생하는데 기여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소비재 산업인 면방직 공업에서 먼저 발생하였다. 즉 면방직공업은 산업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리처드 아크라이트(Richard Arkwright, 1732~1792)는 수력을 이용한 방적기를 발명했다. 우리는 그를 단순한 발명가로 기억 하지만 사실 그는 기업인이었다. 이발사였던 아크라이트는 1769년에 특허를 얻어 두 친구와 함께 니드 스트래트 앤드 아크라이트 상회를 창립하였고, 1771년부터는 수력을 동력으로 한 큰 방적공장을 각지에 세웠다.

제임스 하그리브스가 발명한 다축방적 기를 개량하고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을 연결하여 특허를 얻었다. 그리고 1775년에 두 번째 특허를 얻었다. 그리고 1786년에 조지3세로부터 기사작위(Sir)를 하사받을 정도로 탁월한 경영자였다. 증기기관의 발명가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는 당시 영국에서 제일부자였던 볼턴(Boulton)과 함께 Boulton and Watt Company를 만들었던 사업가였다. 증기기관차와 철도 운송 시스템의 원형을 만들고, 표준궤를 제시하여 철도의 아버지라고 불린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 ~ 1848)도 역시 발명가로 알려 져 있지만 그도 뛰어난 사업가였다.

최초의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사람은 스티븐슨보다 10년 전에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리처드 트레비식이다. 그러나 스티븐슨의 기관차가 성능이 훨씬 우수한 것이 인정이 되어 그가 철도의 아버지라고 불린 것이다. 그가 만든 로켓(Rocket)호는 13톤의 화물을 끌고 최고 속도 48km/h를 기록하여 스티븐슨의 기관차가 성능이 월등히 좋은 것이 인정되어 리버풀-맨체스터 철도의 기관차로 로켓호가 채택되었다. 그리하여 1830년 9월 15일 개통식을 가지고, 기관차를 이용한 승객 및 화물 수송이 시작되었는데, 이 철도가 세계 최초의 근대적인 철도가 되었으며, 이후 그는 여러 군데의 철도를 건설하고 운영하였다.

이렇게 그는 단순히 발명가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철도 건설자이며 운영자였다. 발명왕 에디슨도 모건(J. P. Morgan)에게 투자를 요구하여 1892년에 에디슨종합전기 회사를 만들었던 기업인이었다. 후에 모건은 직류방식에 집착하는 에디슨과 결별하고 에디슨종합전기회사의 대주주가 된 후에 톰슨휴스톤전기회사와 합병하여 오늘날의 GE(General Electronics)가 탄생하였다. 이렇게 산업혁명 시기에 자본가와 기업가는 분리되지 않았는데, 아담 스미스는 고용주(employer)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기업가의 측면보다 고용자의 측면이 더 부각 되었고, 마르크스에 의해서 자본가라는 측면이 더욱 강조되었다. 후에 제본스, 미제 스, 슘페터 등에 의해서 기업가의 측면이 강조되었다.

자본의 개념 : 자본이란 무엇인가?

경제학에서는 생산요소를 언급할 때 토지, 노동, 자본을 생산의 3요소라고 하면서, 자본을 토지와 구분한다. 토지의 보상을 지대라고 하고, 자본에 대한 보상을 이자라고 한다. 그리고 기업의 경영을 별도의 생산요소로 구분하기도 하고, 경영에 대한 대가를 이윤이라고 구분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자본가와 기업가를 구분하지 않을 경우 이자와 이윤은 구분하지 않는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피케티는 자본의 범주에 토지도 포함시켰다.

   
 
이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피케티는 자본을 농경지, 주택, 기타국내자본, 해외자본으로 구분했다. 주택은 도시지역의 주택, 건물 및 그 토지를 포함한 개념이다. 기타국 내자본은 기업과 정부기관의 자본(사업용 건물들과 그에 연관된 토지, 사회기반시설, 기계류, 컴퓨터, 특허 등)을 포함한다. 순해외자본은 자국민이 소유한 해외자산에서 외국인이 국내에 소유한 자산(국채 포함)을 제외한 금액이다. 내국민이 보유한 국채는 자산이지만, 동시에 정부의 부채이므로 두 가지를 합치면 서로 상쇄되므로 내국민이 보유한 국채는 자산에서 제외된다.

[도표 3.1]에서 보는 바와 같이 1700년경에 영국의 농경지는 국민소득의 4배 정도를 차지했고, 주택의 가치는 국민소득과 비슷했다. 그런데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농경지의 가치는 급격히 줄어들어 21세기에 들어서서는 국민소득의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하 며 전체 국부의 2%도 안 된다. 반면에 오늘날 주택의 가치는 국민소득의 3배 이상이 된다.

기업 등 기타국내자본은 산업혁명이 진행되던 시기에는 1.5배 정도 되었는데, 오늘날에는 약 3배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확대되었다. 해외자본의 규모는 영국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국민소득의 2배에 가까운 해외자산을 보유했으 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해외자산의 비중이 거의 없어지고, 현재에는 오히려 마이너 스 수준으로 나타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지난 300년간 영국의 자산구조를 보면 해외자산의 비중은 크지 않으며, 농지 자산의 비중이 줄어들고, 도시부동산과 영 업자본 working capital로 대체되는 변화가 일어났다.

   
 
[도표 4.6]은 미국의 자본 추이를 나타내고 있다. 미국은 광활한 농경지를 가지고 있 음에도 불구하고 농경지의 비중은 1770년경에 국민소득의 1.5배 정도 규모였으나, 21 세기에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국민소득에 비해서 10퍼센트 정도의 규모에 불과하다. 그리고 기업과 정부가 보유하는 기타 국내자본의 규모가 2010년에 국민소득에 비해 서 2배가 넘을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제조업 국가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축적된 자본은 연간 국내총생산에서 소비되고 남은 저축이 자본으로 전환이 된다. 이 는 마치 호수에 비유할 수 있다. 상류에서 호수로 흘러들어오는 강은 매년 생산되는 GDP와 같은 것이다. 호수에서 하류로 흘러나가는 물은 소비에 해당된다. 매년 상류 에서 유입되는 물에서 하류로 흘러나가는 물과 호수 표면에서 증발되는 물을 제외하 고 남는 물이 호수에 쌓이는 것이다. 증발되는 물은 자본의 감가상각에 비유할 수 있 다. 이렇게 한 국민경제에 축적된 자본의 양은 매년 국민총생산에서 소비를 뺀 금액이 축 적되는데, 여기에 자본의 감가상각을 제외하고 남는 것이 축적된 총 자본이다.

이는 부동산과 산업 및 금융자산으로 구성이 된다. 피케티는 이 자산에 평균수익률을 곱해 서 그것이 자본가가 얻는 소득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오늘날 자본과잉시대에는 실질금리가 매우 낮기 때문에 자본에서 저절로 수익 이 발생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자본소득에서 발생하는 이자와 기업 활동의 이윤이 합 쳐진 것이다. 그런데 실질이자율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상태에서 기업 활동의 이윤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기업가의 활동에서 창출되는 것이지, 자본을 보유한다고 저절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자본가의 수익은 마르크스가 이해한 바와 같이 노동의 착취가 아니고 기업 활동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4. 자본의 미스터리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자본의 절반 정도가 주택 및 부동산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개발도상국들은 산업화를 추진할 자본이 부족해서 선진국으로부 터 자본을 도입한다. 그런데 아무리 가난한 나라라고 해도 토지는 존재한다. 그것으로 유동자산을 만들어서 경제에 순환시키면 되는데, 왜 자본이 부족하다고 하는가? 즉 어떤 사회는 산업사회로 가고 어떤 사회는 못 가는가?

<타임>지가 20세기를 대표하는 남미 최고의 경제학자로 선정한 페루 출신의 경제학 자 에르난도 데 소토는 『자본의 미스터리: 왜 자본주의는 서구에서만 성공했는가』에 서 자본의 형성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많은 저개발 국가들이 자본주의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으로 자본 부족을 꼽는 데, 그 이유는 축적된 자산에서 자본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재산권 제도가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약 100 여명의 소토 연구팀은 5년 동안 필리핀, 이집 트, 아이티, 페루 등 자본주의를 채택하였지만, 여전히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 는 4개국에서 5년간 연구를 해서 이 책을 저술했다.

소토 연구팀은 이들 4개국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보유한 자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이 며, 왜 그 자산이 자본으로 전환이 되지 않는가를 조사했다. 이들이 조사한 연구 결 과에 기초하여 추정한 바에 의하면 제3 세계와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에서 가난한 사 람들이 보유하고 있지만 합법적인 소유권이 인정되지 않은 부동산의 총 가치는 최소 9조 3천억 달러에 달한다는 계산 결과를 얻었다.

이 금액은 미국에서 유통되는 모든 화폐의 액면가를 합한 액수의 약 2배이며, 세계 20대 선진국들의 주요 증권거래소에 등록된 모든 회사들의 자산을 합한 총액과 맞먹고, 1989년 이후 10 년 동안 제3세계 와 과거 사회주의국가들에 유입된 직접적인 해외투자 총액의 20배를 훨씬 상회하는 막대한 금액이다. 그리고 이는 지난 30년 동안 세계은행이 대출한 모든 대출금의 46 배에 달하며, 그 기간 동안 모든 선진국들이 제3 세계의 개발을 위해 원조한 총액의 93배에 이르는 막대한 규모이다.

개발도상국들은 이렇게 많은 자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자본으로 전환이 안 되는 가? 그 이유를 데 소토 연구팀은 그 자산들이 불완전한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즉 이들이 보유한 집, 가게, 회사의 80%가 불법 자산이었다는 것이 다. 즉 자본이 불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이유는 자산을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명시 화 과정이 없기 때문이며 이것을 바로 ' 자본의 미스터리' 라고 했다(Soto, 2000: 15). 결국 이들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경제성장의 실패는 제도실패이다.

필리핀의 경우 개 인소유의 집을 지으려면 168단계의 절차가 필요했으며, 공공기관을 53군데 거쳐야했 다. 이집트의 경우 농지에 지은 주택을 등록하기 위해서 뇌물을 주지 않으면, 6-11년 이 소요되었다. 그래서 이집트의 470만 명이 불법 주택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페루의 라마에서는 집을 한 채 구매하는데 728가지 절차가 필요하다고 한다. 즉 자산은 많이 있지만, 이것을 자본화 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자본의 명시화 과정이 중요하다.

그리고 자본을 생산에 활용하는 능력은 자본이 많다고 저절로 생기 는 것이 아니다. 수요를 발견해서 거기에 부응하는 것을 생산하는 기업가적 능력이 더 중요하다. 이윤기회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본을 활용하지 못한다. 본원적 화폐에서 은행의 신용창조 과정을 거쳐서 통화량이 창조되듯이, 부동산이 자 본으로 변화되어 유동자본을 창출하고 이것이 생산설비를 만들어낼 수 있다. 부정부 패를 줄여서 자본의 명시화 과정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고, 그 자본을 활 용하여 수익을 창출해내는 것이 바로 자본가와 기업가의 역할이다.

5.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자본의 개념은 산업혁명 이후에 크게 변화되었다. 자본의 구성도 변화되었고, 자본이 희소한 사회에서 자본이 남아돌아가는 사회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자본이 부족한 이유는 단지 자본의 양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을 창출 하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제도적 여건에도 달려있다. 그리고 자본의 양이 중요한 것 이 아니라 자본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기업가의 존재가 더 중요한 시대가 되었 다. 그리고 이제 제조업의 쇠퇴와 지식산업의 발전에 따른 자본 개념도 변화되고 있다.

산업혁명에서 가장 대표적인 생산재는 철강이었다. 기계공업이 발전하고, 철도, 기선 이 등장하고, 자동차와 가전제품 등 대부분 대량의 철을 수요하는 제조업이 확산되면 서 철강은 제조업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에 핫코일의 시장 가격은 톤당 460달러에서 260달러로 하락했다. 그리고 제조업에 종사하는 고용이 전체 노동력에 서 차지하는 비율과 제조업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960-1999년 기간 중에 절 반으로 줄어들어서 15%에 불과하게 되었다.

제조업의 생산량은 이 기간에 2-3배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현상이다. 1920년대에 농업의 비중이 현저히 줄였듯이 제조업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반면에 서비스 산업의 비중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이 서비스 산업 가운데 고부가가 치를 생산하는 지식산업의 비중은 크게 늘어나고 있다. 이들 지식근로자들은 이제 지 식자본가로 변화되고 있다.

이제 생산수단에서 지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지식자본을 보유하고 있는 지식근로자들은 화폐자본의 공급자들과 마찬가지로 많은 자본을 공급하며, 이들은 서로 의존한다. 이렇게 자본의 개념이 크게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으로 사회를 구분하고 이들 간의 갈등으로 사회를 파악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사회 도처에 자리 잡고 있다. 시대의 변화에 맞는 자본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김승욱 중앙대학교 경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