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자본은 적이 아닌 친구…초기 자본주의 비판자는 토지귀족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28일 “자본에 대해 올바르게 알자”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자유경제원은 한국 사회에 만연한 시장경제에 대한 그릇된 통념을 깨뜨리기 위한 연중·연속토론회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 날은 자본에 관한 3차 토론회의 자리다.

이 날 토론회는 현진권 원장(자유경제원)의 사회, 김승욱 교수(중앙대 경제학부), 안재욱 교수(경희대 경제학과), 한정석 편집위원(미래한국), 권혁철 소장(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구태경 학생(경희대 경영학과)의 토론으로 이루어졌다.

토론자인 권혁철 소장(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은 “뒤처진 국가가 자본축적을 하면 앞선 국가 역시 자본축적을 할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산성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토끼가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패배감이 일찍이 있었다"며 "그렇지만 그것을 깬 것이 바로 ‘해외투자’이다. 자본이 부족한 국가가 자본이 풍부한 국가를 단기간에 따라잡을 수 있는 해법이 바로 해외투자(외국인 투자)였고, 대한민국의 급속한 발전도 이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제스(Ludwig von Mises)가 ‘해외투자야말로 19세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이야말로 제3세계 저개발국가의 친구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아래 글은 권혁철 소장의 토론문 전문이다.


   
▲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1. 초기 자본주의의 비참함에 대해서는 여러 곳에서 사실과 다름을 말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오해는 불식되고도 남아야 할 터인데 여전히 그 위력을 잃지 않고 있다. 한 가지만 말하면, 1760년~1830년 사이, 즉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시작되던 당시 약 70 년 사이에 영국의 인구는 두 배로 증가한다. 이유는 영유아 사망률이 급격히 감소하면서 인구가 급증했던 것이다. 산업혁명 이전 노동자들이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었다는 생각은 환영(幻影)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정황은 ‘초기 자본주의를 누가 반대하고 비판했을까’하는 것을 보더라도 익히 알 수 있다. 초기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것은 노동자도 아니고 빈민도 아닌 바로 토지귀족들이었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로 도망가는 것(Landflucht)을 막고자 했다. 첫째는 노동력 부족이 발생하고, 두 번째는 노동자들을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상승시켜주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부를 움직여 최저임금을 정하게 만들고 이 최저임금과 실제 임금과의 차액을 정부가 지출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이 'Seed & Land System'이었다. 이로부터 혜택을 받은 것은 당연히 토지귀족들이었다. 도시 제조업에서 노동자들은 훨씬 더 높은 임금을 받았던 것이다. 토지귀족들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로 인해 자신들의 특권이 무너지는 것을 두려워하였고, 그 것을 초기 자본주의의 참혹함으로 포장하여 비난하였던 것이다.

오늘날 자본과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 예를 들어 대기업 노조와 일부 좌익 성향의 지식인들 역시 이 시대의 특권계층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현재의 특권과 특혜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본 및 자본주의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 자본재(Capital Goods)란 “미래에 더 많은 소비재를 얻기 위해 오늘 소비하지 않고 저축한 재화”이며, 자본이란 이러한 자본재의 화폐액을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축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본가가 될 수 있다.

자본은 ‘미래를 위해 저축한 것’이라는 자본의 이러한 특성은 자본에 대한 오해를 푸는 열쇠가 될 수 있다.
우선, 자본가와 노동자가 대립한다는 이분법적 발상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자본가’라고 하는 계급과 ‘노동자’라고 하는 계급이 애초부터 존재하며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자본가가 저축이 소실된다면 노동자가 될 수 있고, 오늘의 노동자가 저축을 한다면 자본가가 될 수 있다. 오늘날 최소한 주식거래를 하는 모든 참여자는 크든 적든 자본가들이다. 또한 은행에 저축을 조금이라도 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자본가들이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분리되어 있는 둘이 아닌 하나다.

   
▲ 오늘날 자본과 자본주의에 비판적인 사람들, 예를 들어 대기업 노조와 일부 좌익 성향의 지식인들 역시 이 시대의 특권계층이 아닐까,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현재의 특권과 특혜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본 및 자본주의에 대해 강하게 비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진=연합뉴스
둘째, 자본의 이러한 특성은 노동만이 아니라 자본도 가치를 창출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내가 100만 원을 투자한다고 할 때 사람들은 통상 투자된 화폐액 100만 원만 보고는 ‘돈이 돈을 낳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100만 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100만 원은 나의 소득의 일부고, 따라서 본래 ‘나의 노동’의 대가이다. 다시 말해 화 폐로 표시된 100만 원은 나의 노동이 체화되고 변형된 것에 불과할 뿐, 본래 나의 노동 그 자체이다.

따라서 그것을 투자했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나의 노동을 투입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즉 100만 원을 투자한다는 것은 100만 원어치의 노동을 투입 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는 노동가치설을 따른다 하더라도 자본이 이득을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모든 자본은 곧 노동의 또 다른 표현형이기 때문이다. 단, 가치는 객관적으로 측정가능한 것이 아니라, 경제주체들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는 주관주의 가치론이 전제되어야 한다.

3. 자본의 또 다른 특징은 자본은 노동의 적이 아니라 노동 그 자체이며, 노동자의 친구라는 사실이다. 내가 자본가가 되어 사업을 시작한다고 가정할 때, 가장 먼저 할 일이 무엇일까? 자본가가 사업을 하면서 가장 먼저 시작하는 일은 사람을 고용하고 원재료 등을 구입하는 일이 된다. 일자리를 만들어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에게 소득을 만들어주며, 원재료 부문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소득도 높여준다. 사업에 벌이면서 일 자리를 만들고 임금상승으로 소득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자본가이다. 즉 자본은 노동의 적이 아니라 노동의 친구이다.

자본의 축적은 생산성 향상을 불러오고, 이는 곧 전체 노동자의 생활수준 향상을 가져온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생산성 향상과 생활수준 향상이라는 것이 자본이 투하된 한 부문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전 국가적인 차원에서 일어난다. 한국의 이발사와 중국의 이발사 사이에 생산성의 차이는 별로 없을 것이지만, 소득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난다. 그 이유는 한국의 생산성이 중국의 생산성보다 높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발 부문 이외의 다른 영역에서 커다란 생산성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고, 그 생산성 격차의 혜택을 이발사가 보고 있다는 말이다. 한 국가의 소득수준 및 생활수준의 격차는 그 국가의 생산성에 의해 결정되고, 그 생산성은 자본의 축적 정도에 따라 결정된다. 자본이 부족한 나라는 가난하고 자본이 풍부한 나라는 잘 사는 것이 그 이유이다.

자본축적이 생산성을 결정하고, 생산성이 그 나라의 소득수준을 결정한다면 뒤늦게 자본축적을 시작한 나라는 일찍이 자본축적을 시작한 나라를 따라잡을 수 없는가? 뒤처진 국가가 자본축적을 하면 앞선 국가 역시 자본축적을 할 것이기 때문에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생산성 격차를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라는, ‘앞서 출발한 거북이를 토끼가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패배감이 일찍이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깬 것이 바로 ‘해외투자’이다. 자본이 부족한 국가가 자본이 풍부한 국가를 단기간에 따 라잡을 수 있는 해법이 바로 해외투자(외국인 투자)였고, 대한민국의 급속한 발전도 이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미제스(Ludwig von Mises)가 “해외투자야말로 19세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평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자본이야말로 제3세계 저개발국가의 친구이기도 하다.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