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스탈린 지령, 북한 먼저 단독정부 수립 추진…이를 간파한 '정읍 발언'
김일성 조종한 스탈린, 진짜 원흉…1948년 총선거, 한반도 최초 자유민주선거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우남 이승만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이 지난 11일 기념관 건립을 위한 국민성금 모금운동을 시작했다. 모금운동은 기업, 시민사회, 일반 국민 다수가 함께 참여하는 범국민적 운동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일본제국주의 당시 국제외교 및 계몽 활동을 통해 자유독립을 실현하고자 애썼다. 또한 1945년 해방 후 3년간 미 군정 당시 유엔 감시하에 국민총선거를 실시하도록 막후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결국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여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된다.

반면 독립운동 당시 독립운동 진영 분열의 원인이 됐다거나 6.25 전쟁 당시 국민방위군 논란, 3.15 부정 선거의 책임을 지고 4.19 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는 등 현대사에서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공과 과가 치열하게 연구되고 재평가되는 과정 속에서 초대 대통령이라는 분명한 지위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이렇다 할 기념관조차 없는 것에 대해 현대사의 빈공간이라는 우려가 높은 것도 사실이다. 

이에 미디어펜은 현 시점에서 이승만기념관이 왜 제기되는지를 보다 객관적으로 알기 위해 총 5편의 연재 시리즈를 기획해 보도한다. [편집자주]

[우남의 꿈③] 분단의 원흉? 해방부터 단독정부 수립까지 이승만 결단은

[미디어펜=김규태 기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초대대통령 우남 이승만(雩南 李承晚, 1875~1965)은 당대인들과 전혀 다른 삶의 궤적을 보이면서, 각종 오해와 논란에 휩싸였다.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일각으로부터 큰 비판을 받는 지점 중 하나는 '분단의 원흉'이라는 주장이다. 1945년 해방부터 1950년 6.25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5년간, 이승만이 관여해 한반도의 분단을 촉발했다는 비난이다.

   
▲ 대한민국 이승만 초대대통령. /사진=재단법인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제공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분단 촉발?

먼저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다. 당시는 미 군정기였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이승만이 남한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전북 정읍에서 '남측만이라도 임시정부 또는 위원회를 조직해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게 된다.

이승만은 연설에서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라며 "민족 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주기 바란다"고 발언했다.

이 연설을 놓고 일각에서는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이라 지목한다. 하지만 이는 당시 상황을 감안하지 않은, 고의적 비난이다.

1945년 8월부터 북한을 지배해온 소련군정은 미소공동위원회(1946.3.20)가 열리기 직전인 1946년 2월 8일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내세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이 임시인민위원회는 자신들의 현수막에 "임시인민위원회는 우리의 정부(政府)이다"라고 내걸며 북한 스스로 정부 조직을 만들었다는 걸 공표하고 나섰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 4개월 전 일이다.

특히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한달 뒤인 3월 5일 일명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의 토지개혁을 단행하면서 실질적인 정부 기능을 드러낸다. 그 몇개월 사이에 다른 여러가지 공산주의식 조치를 단행하면서, 이승만이 '정읍 발언'을 밝히는 시점에서 이미 남과 북은 이질적인 사회로 벌어진다.

한민족의 통일정부를 세우려면 1946년 당시 남한까지 공산화하지 않는 한 불가능할 정도로 그 격차가 커진 것이다. 이에 대한 책임을 이승만의 '정읍 발언'에 뒤집어 씌우는건 인과관계와 순서를 뒤집은 새빨간 거짓이다.

   
▲ 2012년 제헌절인 7월 17일 서울 중구 장충동 자유총연맹 광장에서 대형 태극기가 우남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동상 너머로 펄럭이고 있다. 자유총연맹은 이날 오전 35m 높이의 게양대에 가로 6m, 세로 4m 크기의 대형 태극기를 걸고 제64주년 제헌절 기념행사를 열었다. /사진=연합뉴스

또한 1991년 공산진영 붕괴 후 구 소련 기밀문서가 전면 공개되면서 분단의 원흉이 누구였는지 백일하에 드러난다.

바로 1945년 9월 20일 북한에 내려진 스탈린의 지령이다. 스탈린은 "소련군 점령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리고, 북한에 친소 정권을 수립한 후 한반도 전체를 공산주의화하겠다는 의도를 숨긴다. 동유럽 각국과 마찬가지로 당시 소련의 전형적인 위성국가 구축 수순이었다.

이 지령에 따라 1945년 10월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려, 그 자리에서 북조선중앙은행 설립을 결정한다. 북한만의 독자적 경제정책 추진을 공표한 것이다. 그 후 넉달만인 1946년 2월, 앞서 언급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출범시킨다.

진짜 원흉은 북한 김일성을 조종한 소련 스탈린

스탈린은 신탁통치 및 미소공동위원회와 같은 남측 미 군정과의 대외 협상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별도로 북한 단독정부 수립을 실행에 옮겼다. 이에 따라 북한에선 스탈린의 의도대로 단독정부 수립이 일사불란하게 진행됐고, 남한에선 이승만 등 정파간 이합집산이 거듭됐다.

결국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라는 실질적인 북한 단독정부가 이미 들어섰고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서 남측의 자유민주주의 세력을 배제하려는 소련의 공산화 정책이 드러난 직후, 이승만이 정읍 발언을 제기한 것이 '팩트'다.

당시 스탈린의 의도와 북한 단독정부의 성격을 간파한 남측의 유일한 지도자는 이승만이었다.

   
▲ 1948년 8월 15일 첫 광복절,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고 있다. /사진=재단법인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제공

오히려 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 남측 지도자는 김구였다. 김구는 이승만의 '정읍 발언'이 나온지 1년 5개월 뒤인 1947년 11월 24일 "남측만의 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김구는 1947년 12월 22일 단독정부 절대반대를 재차 주장한다.

이어 1948년 2월 22일 미 군정청 하지 중장의 초청으로 이승만-김구-김규식 등 남측 우익의 세 거두가 만나, 남한 단독정부론과 남북 협상론을 논의했으나 이견을 좁히지 못한다. 김규식은 이 자리에서 "조국의 분단이 결정되는 이때에 우리가 최후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역사는 우리를 역적으로 규탄할 것"이라고 말했고, 이에 이승만은 "내가 역사에 대한 책임을 질 터이니 염려 말라"고 밝혔다.

소련 스탈린의 비밀지령과 그에 따른 북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사전에 진행되었다는 점을 모른다면, 이 대목에서 이승만을 '분단의 원흉'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 진실은 전혀 달랐다.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4월 북한으로 올라갔지만, 그들이 평양에 도착하기 두달 전인 2월 3일 "북조선 군대의 집회를 허가한다"는 소련 공산당 정치국의 비밀문건이 확인됐다. 

두달 뒤 그들이 평양에 도착하기 직전인 4월 12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김일성에게 "유엔한국위원회의 비법적 결정에 저항하고 유엔한국위원회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고, 남조선 단독선거를 거부하도록 호소할 것"이라는 지령을 내린다. 당시 남북연석회의는 이 지령대로 진행됐다. 이어 그들이 평양에 머물던 4월 24일 소련 정치국은 "북한 헌법을 수정하라"는 지령까지 내린다.

남측이 유엔의 감시와 지원 하에 한반도 최초의 국민총선거를 치른 것이 1948년 5월 10일이다. 그 전에 북한은 이미 정부 수립의 거의 모든 것을 마치고, 헌법 및 군대와 같은 핵심시스템에 대한 논의까지 마무리했다.

1948년 총선거의 의미, 자유민주주의의 승리

북한이 남한보다 앞서 먼저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과 맞물려, 당시 1948년 5월 10일 열린 남한만의 국민총선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 역사상 처음으로 치러진 자유민주 선거였기 때문이다.

이 총선거는 보통선거, 평등선거, 비밀선거, 직접선거라는 자유민주 선거의 4대 원칙 모두가 적용된 최초의 선거였다.이는 이승만의 고집 때문이었다.

   
▲ 1950년 10월 평양 탈환 후 이승만 대통령이 연설을 갖고 있다. /사진=재단법인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제공

총선거에서 한반도 이남에 살던 만 21세 이상의 모든 남녀 국민에게 선거권이 주어졌다. 피선거권은 만 25세 이상 모든 남녀에게 주어졌다. 평등선거 원칙도 적용해 누구나 똑같이 1표씩의 투표권을 행사했다. 재산, 신분, 성별, 교육 수준, 종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선거인이 직접 후보자에게 투표하는 직접선거도 시행됐다. 마지막으로 유권자가 어떤 후보자에게 투표했는지 타인이 절대 알 수 없는 비밀선거 원칙 또한 적용됐다.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건국 전 최초의 선거부터 이 4대 원칙 모두를 적용했다. 우남이 총통제라는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확립을 고집해서다.

1948년 당시 국제 정치 상황은 엄혹했다. 신생독립국이라고 해서 모두 4대 원칙을 적용해 선거를 치르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2023년의 상식과 달리 당시 4대 원칙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은 1920년 21세 이상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을 부여했고, 영국은 1928년, 프랑스는 1946년에야 비로소 법률상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었다.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선진국에 꼽혔던 일본조차 1947년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다. 대한민국은 건국했던 1948년 바로 부여하면서 시작했다. 2023년인 현재 아직도 세계의 무수히 많은 국가에서 여전히 이 4대 원칙이 적용되지 않고 있다.

5.10 국민총선거는 돌이켜 보면 공산당으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세력과 이승만이 이끈 자유민주주의 세력 간의 싸움에 종지부를 찍고, 갈라서게 만든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75년 뒤인 현재 5000만 대한민국 국민이 누리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번영을 담보했다. 이 총선거는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선언하는 의미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