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75)- 자유의 진작이 진정한 사회개혁
제라드 윈스턴리(1609~1676)의 <자유의 법 강령>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어느 시대에나 지상천국을 꿈꾸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현실이 각박할수록 그런 달콤한 약속은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이런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국가와 사회체제는 언제나 모순과 불합리한 요소를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합리적 이성은 개인에게만 가능하다. 집단과 국가도 유기체적 특성을 지니지만 결코 독립적 이성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런 집단과 국가가 합리적 이성과 힘을 갖고 공동체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으리라는 국가 설계주의는 잘못된 미신이다. 완전하게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국가의 어떤 선의의 시도도 전체주의로 들어가는 어둠의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좋은 사회(The Good Society)’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까? 자유와 평등, 어느 것 하나의 극단적인 추구로는 결코 좋은 사회나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근본으로 삼고 어떤 것을 보완적 가치로 삼느냐에 따라 유토피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살 만한 사회’, ‘견딜만한 사회’를 만들 가능성이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화두는 사실 풀기 어려운 요원한 과제다. 따라서 평등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도전했다가 실패한 한 몽상적 혁명가의 분투기를 통해 평등의 가치를 다시 새겨보고, 동시에 그런 추구가 만들어내는 의도하지 않았던 부조리와 불합리한 현상을 재확인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이런 차원에서 17세기 평등주의자 제라드 윈스턴리의 <자유의 법 강령>은 평등의 유혹이 주는 반면교사의 교훈을 주는 책이다.

제라드 윈스턴리(Gerrard Winstanley, 1609~1676)의 <자유의 법 강령>(1652년)은 공유와 공산을 통한 급진노동운동을 주도했던 윈스턴리의 사회주의적 사상이 담긴 책이다. 그는 이상사회를 꿈꾸고 이상적 공화국의 구체적인 체제와 운용 방향을 제시했다. 윈스턴리는 당시 영국의 호국경(Lord Protector)이던 올리버 크롬웰에게 자신의 이러한 구상을 채택해 줄 것을 간절히 호소하며 이 책을 헌정했다.

이 책에는 그가 맹렬하게 활동하던 시기에 쓴 팸플릿 두 편이 함께 실렸다. ‘잉글랜드의 권력자들과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에게 하는 선언’과 ‘의회와 군대를 위한 새해의 선물’이 그것이다. 물론 그의 사상의 총화를 보여주는 것은 단연 ‘자유의 법 강령, 혹은 진정한 위정(爲政)의 회복’이다.

<자유의 법 강령>은 17세기 중엽의 영국의 정치경제적 변혁을 꾀했던 수평파(Levellers, 평등파)의 이념이 담긴 책 중의 하나다. 이 책은 당시 ‘팸플릿 전쟁’으로 불릴 만큼 여러 세력들이 자기 이념 선전을 담은 출판물을 경쟁적으로 쏟아내던 시대 조류 속에서 윈스턴리 역시 평등을 추구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 애쓴 그 결과물이다.

그는 수평파의 일원으로 분류된다. 하지만 과격한 사상과 달리 행동은 온건했다. 강성 수평파들은 군사적 활동까지 모색하면서 사회혁명을 시도해 나갔다. 이에 반해, 그는 '디거스(Diggers)'라는 집단을 이끌며, 경제적 평등을 주장하면서 급진적인 경제적 실험을 시도했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으로는 수평파 중에서도 미미한 세력이었다.

디거스 집단은 말 그대로 ‘땅을 파는 자들’이었다. 수십 명이 소규모 집단을 이루어 황폐지와 공유지를 개간하여 경작하며 공동 생산과 공동 소유를 실현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지역주민들의 탄압으로 불과 2년여의 짧은 활동에 그치고 1650년 봄에 해산되었다.

윈스턴리는 인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에 따라 피폐해진 농촌 빈민들의 경제적 곤궁을 타개하고자 ‘땅파기’(digging)라는 행위를 통해 공유지를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정치적 저항을 보여주고자 했다. 생산의 기본적 토대인 땅을 찾고자 했던 그의 이상은 순수하고 소박하다.

'디거스(Diggers)'가 나타나게 된 시대적 배경을 이해해야 윈스턴리가 <자유의 법 강령>에서 보여준 땅에 대한 지독한 애착, 자유와 평등의 희구에 대해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잠시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보자. 17세기 영국은 극도의 혼란기였다. 청교도 혁명과 공화정의 수립, 왕정의 폐지와 복고 등 왕당파와 의회파간의 내전과 정치적 격변 속에서 민초들의 삶은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황폐지와 공유지에 대규모 방목 및 농장을 조성해 나가던 인클로저 운동은 농민들을 농토에서 내쫓는 결과를 초래했다. 농토를 잃은 유민들은 도시로 흘러들어가 공장노동자로 전락했다. 또 농촌에 남은 이들도 대부분 농촌노동자로서 어려운 삶을 연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인클로저 운동은 전통적 농경사회에서 초기 산업사회로 전환되어 가는 와중에서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면서 출현하게 된 필연적인 측면이 있었다. 곡물생산보다 수익이 나은 모직공업이 시작되면서 양모 생산을 위한 농지의 목장 전환을 목적으로 공유지를 담이나 울타리를 쳐서 막아 사유화하고 대규모 토지경영을 하는 형태가 촉발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인클로저 현상은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결과로 농민의 실업과 이농, 농가의 황폐와 빈곤의 확대로 이어졌다. 또 자연스럽게 사회에 대한 불만세력을 양산하여 극단적인 사회변혁과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을 배출하게 된다. 윈스턴리는 땅의 효용이 변하고 있던 시대적 전환기에 땅의 본질적 기능을 되살리고 그 속에서 농민의 삶을 회생시켜 보려고 도전한 셈이었다.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가 현실 도피를 꿈꾸던 백성들의 시름을 조금이나마 달래 줄 수 있었던 연유도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사회적 환경의 문제점은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정점에 달했다. 크롬웰의 의회파에 의해 왕정이 붕괴되고 새로운 공화정이 수립되는 소용돌이 속에서 극단적인 사회변혁을 꿈꾼 수평파 또는 평등파라 불리는 일단의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윈스턴리도 그런 무리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재산의 균등한 분배를 주장하면서 주로 농민, 소상인, 장인(匠人), 도제(徒弟), 소생산자 등 소시민층의 이익을 대변하고자 했다. 특히 크롬웰의 신형군(New Model Army) 내에서 불만에 찬 하급 사관 및 사병세력에 침투하여 그들을 지지기반으로 삼아 정치적 활동을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보통선거권의 확대와 법 앞의 평등, 인민주권과 종교적 관용 등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이념들이 분출했다.

이들은 세력을 점차 확대하여 ‘인민협약’까지 체결, 선포하는 등 사회변혁의 틀을 만드는 듯 했다. 하지만 처음에 이들의 주장에 비교적 우호적이던 올리버 크롬웰이 탄압자로 변하게 된다. 수평파들의 주장이 점차 과격해지자 이들의 물리적 행동에 위협을 느낀 기존 세력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이다. 결국 올리버 크롬웰의 기습 진압에 의해 평등파들의 변혁 운동은 붕괴되고 말았다.

물론 윈스턴리는 이런 강경 수평파는 아니었다. 그는 농촌 운동에 전념하고자 했다. 그는 농촌 피폐의 원인이 지주와 자본가들의 탐욕스런 인클로저 행위에 있다고 보았다. 농민이 땅을 잃고 유랑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전체 토지는 아니더라도 황폐지와 공유지만이라도 가난한 자의 몫으로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믿음을 실천하기 위해 세인트 조지스 힐에서 황무지를 실제 개간하는 공동체 농경생활을 주도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이 책의 내용 탐색에 들어가 보자. <자유의 법 강령>은 그의 디거스 공동체가 해산된 이후인 1652년에 출간되었다. 그는 서두에서 올리버 크롬웰에 대한 헌정사를 통해 청교도혁명이 크롬웰의 군대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평민의 협조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상기시킨다. 이런 차원에서 가톨릭적 관습이나 폭정을 제거하고 인민들에게 공화국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한다.

특히 왕정이 폐지되었는데도 지속되고 있던 여러 적폐들을 일소해 줄 것을 요구했다. 과도한 십일조를 부과하는 성직자들의 억압, 법률 지식을 앞세운 판사와 변호사들의 탐욕, 상납금과 차지상속세를 요구하는 장원주와, 양과 소떼 방목을 위해 공유지를 사유화하는 지주들의 횡포를 열거하며, 이들 권력의 박탈과 악행에 대한 과감한 개선을 호소했다. 사실 사회의 적폐를 혁파해 달라는 윈스턴리의 요구는 정당한 것이다. 그는 백성의 고달픈 삶에 대한 연민을 갖고 있었고, 한편으로 불합리한 사회제도와 문화에 대해 분노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그는 ‘남이 네게 해주면 좋겠다고 바라는 방식으로 남에게 대접하라’는 황금률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크롬웰 정권이 인민을 신음하게 하는 모든 부담을 헤아려 줄 것을 호소했다. 특히 윈스턴리는 땅에 대한 평등한 권리를 강조했다. 토지를 매매하면서부터 인간이 타락하게 되었다고 보면서, 땅과 수확의 공동 소유와 매매금지를 주장했다. 윈스턴리의 사유재산권에 대한 이런 부정적 인식은 토지의 공유화를 기반으로 한 공산사회에 대한 유혹으로 쉽게 이어진 것 같다.

그는 ‘공화국의 진정한 자유는 땅을 자유롭게 누리는 것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경에서 만인이 자신의 자유의 기초를 땅에 두고 있다고 한 점을 증거로 삼고자 했다. 누군가 땅의 지주가 되고, 누군가 종이 되는 것은 인간들을 구속으로 이끌 뿐, 근본적 자유(foundation-freedom)가 아니라고 믿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궁극적으로 땅은 신의 소유라는 관념이 깔려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는 왕정의 붕괴 후 들어선 공화국 체제에서 모든 토지가 만인의 공동의 자산으로 차별 없이 누릴 수 있는 형태로 구현되길 희망했다. 바로 디거스 공동체를 통해 그가 추구했던 공산(共産)적 사회 건설의 가능성을 크롬웰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토지의 사유화와 매매를 죄악시했다. 매매라는 ‘교활한 재주’가 인민간의 분쟁을 만들고, 이를 제압하고자 하는 왕의 권력을 불러오고, 결국 왕의 압제를 낳는다고 본 것이다. 공동생산, 공동저장, 공동사용을 통해 공동의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공동체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크롬웰의 공화국의 통치는 매매를 토대로 한 왕의 압제가 아니라 매매 없이 땅을 다스리는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윈스턴리의 꿈은 기독교적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기본적 통치의 원칙 아래 공화국의 통치제도와 운영 방향을 제시했다. 그가 꿈꾸는 공화국의 관료는 왕의 압제에서 고생했던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40세 이상이 된 사람들 중에서 선출되어야 한다. 아울러 각 지역의 도시, 교구에서 사람들의 분쟁을 중재하고 법이 잘 집행되도록 감찰하는 감찰자의 선임도 중요하다. 감찰자는 여러 직업기술의 지도 감독은 물론, 공동 농사 및 수확과 공동저장을 감독하는 직무를 수행한다.

그의 자유의 법 체계에서는 의회의 기능을 특히 강조한다. 의회가 주도하여 왕, 주교, 장원주의 수중에 있던 땅과 공유지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모든 낡은 법과 관습을 철폐하며, 군대의 소집권도 의회가 갖는다. 군대는 평화 시에는 치안업무를 담당하고 유사시 국방을 담당하지만, 군대가 또 다른 폭군이 될 수 있음도 경계한다.

교육 분야의 설계도 흥미롭다. 40세까지 유년기, 청년기로 보고 직업기술과 학문을 익히고, 직업에 종사토록 하며, 40세부터 80세까지인 성년기, 노년기에는 관리가 되거나 감찰자의 역할을 하도록 한다. 배워야 할 직업기술로 농사를 으뜸으로 치고, 광물, 광산업, 목축, 산림목재, 천문학, 항해술을 권장하면서, 남의 노동에 기대어 사는 성직자, 변호사 등의 직업을 경시한다.

공화국의 법체계에 대해서는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고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해 간명하고 엄격할 것을 주문한다. 특히 법의 집행에서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대접하라’는 성서의 황금률의 원칙을 중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이라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 lex talionis)을 제시한다.

나아가 노동을 거부하는 사람을 공개 질책한 후 회초리질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나태방지법’의 엄격한 적용을 강조한 것이다. 소출이나 물품의 매매를 금지하고, 강간시 또는 땅을 가로채려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고, 자유를 잃으면 하인이 되도록 규정할 것도 제안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황당한 내용들이지만, 당시 윈스턴리가 꿈꾼 지상낙원을 국가체제로는 긴요한 내용들이었다.

윈스턴리가 구상한 공화국의 자유의 법체계는 공산적 사회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공동의 규범과 이를 파괴하는 자에 대한 냉혹한 처벌을 담고 있다. 이루기 힘든 공동체인 만큼 체제 유지를 위한 강력한 통제 장치가 필요함을 인식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그리는 사회상은 평등을 강조한 공산적 사회이다. 결국 불가피하게 완고하게 통제되는 전체주의적 모습으로 비추어질 수밖에 없는 게 치명적인 한계이다.

그가 그린 토지의 공동소유와 공동생산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적 삶은 기본적으로 이상적 농경사회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미 17세기 중엽의 영국은 상업혁명과 자본주의가 자라면서 농촌의 삶과 농업의 양태가 급격하게 변모할 수밖에 없던 시대였다. 결국 그의 과거회귀적 희구와 주장들은 시대변화를 통찰하지 못한 그의 편협한 인식에서 나왔다. 당연히 당시의 현실과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하지만 그가 현실의 각박하고 피폐된 인민들의 삶을 개선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제시한 공화국의 행정·사법·입법 등의 정치체제와 사회체계의 운영 방향에 담긴, 그의 따뜻한 동포애, 애국심, 도덕성만큼은 절실하고 애틋하다.

그러나 그가 설계한 지상천국의 법체계는 공동의 선의를 달성한다는 명목아래 인간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전형적인 전체주의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개인의 자유가 말살된 가운데 구현되는 평등은 억제된 행복, 위장된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을 뿐이다.

그가 꿈꾼 공화국의 비전은 아름다운 유토피아다. 그는 특별한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국가 관료의 경험도 전혀 없는 범인(凡人)이었다. 그의 가슴은 혁명적 구상으로 뜨겁게 끓었지만, 인간의 자유 본성과 이익 추구 욕구, 그리고 거래 본능에 대한 냉철한 통찰력은 부족했다. 특히 영국의 농촌사회가 변동해 가는 역사적 필연성과 국가 통치 체계와 권력의 속성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으로 부족했다. 그러니 평등의 이상을 자유와 조화롭게 현실화 해 나가는 실효적 방책을 설계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의 간절한 목소리가 크롬웰의 공화국의 주체들로부터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것도 그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수평파의 과격한 주장으로 인해 대다수 인민들의 경계심만 높여주어 결국 크롬웰의 탄압에 의해 세력을 잃고 말았다. 그러나 윈스턴리가 추구한 평등의 사상은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특히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소박했던 이상이 후일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사회주의 사상의 뿌리로 이어져 인류사에 큰 해악을 끼치는 데 일조했던 점은 아쉽다.

이 책이 주는 또 다른 각성은 윈스턴리가 급진노동운동 단체인 '디거스'를 통해 해방공동체를 꿈꿨던 것에서 보듯, 어느 사회이든 정치적, 경제적 불평등과 억압이 극심해지면, 극단적 양태의 사회체제를 잉태시키거나, 새로운 체제를 꿈꾸는 이상과 물리적 행동들이 움트기 마련이라는 점이다.

극단적 평등주의의 등장은 결국 그 사회의 모순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불평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사회 구성원들이 감내하기 힘든 불평등한 구조는 그 사회의 체제와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부메랑이 된다. 현재 우리 사회는 어느 수준에 처해 있을까? 자유와 평등은 대체제가 아니라 보완재이다. 자유를 근간으로 하되 평등의 원리로 쉼 없이 수정되고 보완될 수 있는 사회체제가 ‘좋은 사회’, ‘행복한 나라’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자유의 법 강령>, 제라드 윈스턴리 지음, 김윤경 옮김, 한길사(2011), 3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