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방민준의 골프탐험(69)-박인비 최강 무기는 평정심!

골프의 본향 스코틀랜드의 트럼프 턴베리 골프코스에서 벌어진 리코 위민스 브리티시오픈에서 경이적인 플레이로 우승, 27세의 어린 나이에 LPGA투어의 네 개 메이저대회 타이틀을 모두 석권하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의 대위업을 달성한 박인비는 ‘살아있는 골프의 전설’이 되었다.

한 해에 메이저대회를 석권하는 ‘캘린더 그랜드슬램’이나 생애 중 석권하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은 골프선수라고 누구나 꿈 꿀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골프역사상 4대 메이저대회를 한 해에 모두 차지한 것은 '영원한 아마추어'로 추앙받는 구성(球聖) 바비 존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1930년 디 오픈과 영국 아마추어챔피언십, US오픈과 US아마추어챔피언십을 한 해에 모두 석권했다.

메이저대회의 기준이 변한 현대골프에서 남자 커리어 그랜드슬래머는 진 사라센(1935년), 벤 호건(1953년), 게리 플레이어(1965년), 잭 니클라우스(1966년), 타이거 우즈(2000년)까지 5명, 여자는 루이스 석스(1957년), 미키 라이트(1962년), 팻 브래들리(1986년), 줄리 잉스터(1999년), 캐리 웹(2001), 안니카 소렌스탐(2003) 등 6명에 불과하다.

20대의 박인비가 당당히 아직 현역 선수로 활동하는 줄리 잉스터, 캐리 웹과 함께 아시아인 최초의 ‘골프의 전설’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한국 여자골프의 역사에서는 물론 세계 여자골프 역사에서도 중요한 한 획을 그은 대사건이다.

박인비가 2013년부터 제5의 메이저대회로 격상된 에비앙마스터스까지 제패한다면 5대 메이저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사상 최초의 슈퍼 그랜드슬래머가 되는데 현재의 추세로 봐서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게 골프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박인비는 현재 골프역사상 전무후무한 위대한 기록을 위해 전인미답의 골프역사를 써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이룬 업적만큼 박인비는 과연 최고의 골프선수인가?
이 물음에 대한 반응은 문외한은 물론 골프 전문가 사이에서도 엇갈리는 게 사실이다.
그에게서 딱 부러지게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신체조건, 스윙, 비거리 등은 최고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그의 업적과 성과에 대해선 경탄을 금하지 못하지만 구체적으로 골프 자체로 포커스를 맞추면 오히려 불리한 조건들이 드러난다.
우선 그의 스윙은 수많은 골프교본과 레슨프로들이 가르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드라이브 샷을 포함한 거의 모든 스윙이 4분의 3에 머물고 코킹도 충분히 이뤄지지 않는다.

스윙 플레인도 유소연, 최나연, 미셸위, 리디아 고, 김효주, 이미림 양희영 등 LPGA투어의 대표적 스타일리스트들이 보여주는 것과는 다르다. 이런 선수들의 스윙 플레인은 백스윙에서 다운 스윙, 팔로우 스윙에 이르는 스윙의 궤도가 하나의 접시 형태를 보이기 마련인데 박인비의 스윙을 볼라치면 백스윙을 할 때는 가파르게 올라갔다가 다운스윙을 할 땐 클럽을 뒤로 떨어트려 완만한 각도로 내려온다. 스윙 플레인이 접시처럼 온전한 타원형을 그리는 게 아니라 도중에 찌그러진다는 뜻이다.

   
▲ 27세의 어린 나이에 LPGA투어의 네 개 메이저대회 타이틀을 모두 석권하는 커리어 그랜드슬램의 대위업을 달성한 박인비는 ‘살아있는 골프의 전설’이 되었다./삽화=방민준
물론 이런 박인비만의 스윙은 톱 스윙에서 손목을 뒤로 제칠 수 없는 신체적 특성 때문에 나온 것이지만 교과서적인 스윙을 철칙처럼 배운 프로는 물론 아마추어들도 고개를 젓는 그런 스윙이다.

신체적인 조건을 봐도 언뜻 프로 골프선수에 적합해보이지 않는다. 미셸 위나 리디아 고, 김효주 등처럼 허리가 날씬해 몸통의 꼬임이 극대화한 힘차고 아름다운 스윙을 구사하는 선수와는 차이가 있다. 스윙 장면을 사진으로 찍으면 멋진 실루엣을 남기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지구촌 골프역사에 새로운 장을 장식하며 ‘살아 있는 전설’일 된 까닭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타고난 평정심일 것이다. 돌부처라는 별명이 생길만큼 그의 얼굴에서는 분노나 좌절 고통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결정적 실수를 한 뒤에도, 엄청난 결과를 만든 뒤에도 그의 얼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다.

믿기지 않는 샷을 창조한 뒤 팬들은 박인비에게서 기쁨에 넘친 제스처가 표출되기를 기대하지만 번번이 실망한다. 그는 단지 조용히 손을 들어 엷은 미소를 지을 뿐이다. 이때 돌부처나 관세음보살의 미소를 볼 수 있는데 그 외의 모습은 감정이 없는 사이버인간을 보는 듯하다.

이쯤해서 박인비의 장단점을 종합해보면 그의 평정심은 최대의 무기지만 나머지는 별반 탁월해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 하면 불리해 뵈는 그런 조건들이 그에게 엄청난 강점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의 신체조건은 겉으로는 골프선수로서 부적합해 보일지 몰라도 잘 발달한 허벅지와 둔부의 근육은 골프가 요구하는 에너지와 파워를 효과적으로 제공해주는 역할을 한다.
불완전해 보이는 4분의 3 스윙이나 부족한 코킹은 스위트 스팟의 적중률을 높이는 결과를 낳아 페어웨이 안착률이나 그린 안착률이 그만큼 높아지는 효과를 보고 있다.

자신이 안고 있는 불리한 조건을 유리하게 승화할 줄 안다는 뜻인데 이는 박인비가 스윙에서 자신만의 개성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만약 박인비가 교과서적인 스윙을 익히겠다고 계속 교정을 했다면 지금의 대선수가 될 수 있었을까. 계속 스윙 교정을 하다가 세월을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
탁월한 평정심과 함께 누가 뭐라 해도 자신만의 스윙 개성을 버리지 않는 점은 그에게 탄탄한 자존감의 원천임과 동시에 최고의 무기인 셈이다.

골프에서 정석은 없다. 무조건 금과옥조처럼 지켜야 하는 철칙은 없다는 뜻이다.
수많은 골퍼들이 보다 멀리 그리고 정확하게 볼을 날리기 위해 많은 교습서를 읽으며 스윙을 갈고 닦는다. 젊어서는 물론 몸이 굳어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나이에도 보다 힘차고 아름다운 스윙에 대한 꿈을 버리지 않는다. 서점의 서가에 꽂힌 수많은 골프 교습서를 뒤적이며 나의 고질병이 무엇인지,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찾아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이런 수요에 맞춰 골프전문가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교습서를 썼고 지금도 써내고 있다. 골프가 존재하는 한 새로운 교습서는 계속 나올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스윙 문법은 무상(無常)할 뿐이다. 흔히들 인생의 덧없음을 얘기할 때 무상이란 말을 쓰지만 불교에서의 무상의 의미는 진리 그 자체다. 붓다도 “오직 변하지 않는 진리는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라고 설했다.
골프 역시 모든 면에서 무상함을 절감케 한다. 특히 골프의 세계를 아는 정도가 깊어갈수록, 핸디캡이 낮아질수록, 나이가 들어갈수록 골프의 무상성을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아일랜드의 골퍼들은 교습서를 멀리 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한다. 19세기 중엽 헨리 B. 패니 라는 에든버러의 한 인쇄소 주인이 쓴 ‘골퍼의 교본(The Golfer's Manual)’이란 책에서 아일랜드 골퍼들이 교습서를 기피하는 까닭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샷이란 클럽을 올렸다 내리는 것일 뿐, 너무 세세히 신경을 쓰면 전체의 리듬이 파괴되어 진보가 저해된다.”라는 것이 샷에 대한 저자의 정의다. 군더더기와 기교가 완전히 제거된 샷의 원형을 보는 듯하다. 크리스티 오코너라는 골퍼는 “골프는 볼의 중심을 맞히는 게임이다. 모습과 모양은 묻지 말라”고까지 말했다.

1862년 로버트 첸버스 라는 골퍼가 ‘두서없는 골프이야기(A Few Rambling Remarks on Golf)’라는 책을 냈다. 그는 이 책 서문에서 “레슨서는 바이블과 다르며 누구에 대해서도 복음을 전해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격 체형 연령 운동신경 사고력 등이 서로 다른 사람에게 동일한 행위를 요구하는 것은 횡포이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사람이야말로 겸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여기에 소개하는 타법은 나 자신이 이렇게 하니까 잘 되더라고 하는 보고서이며 하나의 참고로 제공할 뿐이다. 그렇게 알고 읽어주기 바란다.”라고 조심스럽게 썼다.

1907년 브리티시 오픈에 처녀 출전해 당시 골프의 세 거인이라는 해리 바든, 존 헨리 테일러, 제임스 브레이드를 꺾고 깜짝 우승을 한 바스크 출신의 알루누 메시는 “골프의 스윙은 자유이다. 골프는 과학적인 용구를 가지고 비과학적으로 하는 게임이다. 개성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일갈했다.
앞선 골프전문가들의 시각에서 보면 박인비는 현대에 보기 드문 개성파 골퍼인 셈이다.

남이 흉내 내고 싶은 아름다운 스윙을 갖고 있지도 않고, 화려한 장타자도 아니고, 짜릿짜릿한 아이언샷을 구사하지도 않지만 기복 없는 ‘무던한’ 플레이와 돌부처를 연상케 하는 담담하고도 평온한 박인비의 얼굴을 보면 노자(老子)의 대교약졸(大巧若拙)이란 말이 떠오른다.

대교약졸은 노자의 『도덕경』 45장에 나오는 말로, 전문은 아래와 같다.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大直若屈, 大巧若拙, 大辯若訥. 靜勝躁, 寒勝熱. 淸淨爲天下正.’(크게 완성된 것은 마치 부족한 듯하지만 그 쓰임이 닳아 없어지지 않는다. 크게 가득 찬 것은 마치 비어 있는 듯하지만 그 쓰임이 끝이 없다. 크게 바른 것은 마치 굽은 듯하고, 크게 솜씨가 좋은 것은 마치 서툰 듯하며, 크게 말 잘하는 것은 마치 어눌한 듯하다. 고요함은 떠들썩함을 이기고 차분함은 열기를 이긴다. 맑고 깨끗한 것은 천하의 바른 길이다.)

대교약졸이란 보기엔 서툴고 졸렬한 것 같지만 실은 대단한 고차원의 솜씨라는 것이다. 소박하고 졸렬한 듯하지만 기교가 최대한 배제된 무위자연의 졸박미(拙樸美)야말로 최고의 기교라는 철학관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인비는 아마추어 골퍼들에게는 구세주다. 대부분의 아마추어 골퍼들은 자신의 신체조건이나 신체리듬, 운동습관 등은 무시한 채 골프교습서나 골프채널에 소개되는 교과서 같은 완벽한 스윙을 익히겠다고 구슬땀을 흘리며 스윙을 구축했다가 허물고 다시 구축했다 허무는 일을 되풀이한다. 판박이 집을 짓겠다고 자신이 지은 집은 계속 허무는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아마추어에게 박인비는 아파트 같은 판박이 집이 아닌 나만의 집을 지어라는 귀중한 암시를 던진다.
골프란 남이 대신해주는 것이 아닌 내가 하는 스포츠다. 나의 개성이 반영되는 것은 당연하다. 교과서와 거리가 멀든, 아름다움과 거리가 있든 나의 모든 것이 녹아든 나의 스윙은 바로 지문과 같은 나의 개성이고 존재의미가 아니겠는가.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