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우 기자

2015년 8월 6일은 일본 히로시마(広島)에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투하된 지 70년이 되는 날이다. 인류의 전쟁사는 이 작은 소년(little boy) 전과 후로 구분된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길이 3미터, 지름 71cm, 무게 4톤의 소년은 1945년 8월 6일 새벽 미군의 B-29 폭격기에 적재됐다. 이륙지점은 이제 관광지로 더 유명한 서태평양 티니안섬 인근. 폭격기를 조종한 것은 폴 티베츠 대령이었으며 기체의 이름은 대령의 어머니 이름에서 딴 ‘에놀라 게이’였다.

여섯 시간쯤을 날았을까. 오전 7시경 에놀라 게이와 두 대의 폭격기는 일본 조기경보 레이더에 포착됐다. 이내 공습경보가 울렸지만 비행기체의 숫자가 적은 것을 알게 된 레이더 관측소는 공습경보를 해제했다.

그리고 8시 15분, 미군의 B-29 폭격기는 히로시마 9천 미터 상공에서 소년을 투하했다.

   
▲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가 발생시킨 버섯구름의 모습. 당시 히로시마 시의 인구 34만 명 중 7만 명이 폭발 즉시 목숨을 잃었다. /사진=NBC NEWS 자료화면 캡쳐

43초간 낙하한 소년은 시 중심부 570미터 상공에서 폭발했다. 최종 낙하지점은 원래의 목표 지점이었던 아이오이 다리에서 약 240미터 떨어진 히로시마 외과병원. 소년의 출현과 동시에 반경 1.5킬로미터 내외의 모든 것이 사라졌고 히로시마 시 전체의 건물 중 70%가 파괴됐다.

“1945년 8월 6일 상오 8시 15분. 일본 동아 주석회사의 인사계 여직원 사사끼 도시꼬는 회사 도서관 걸상에 앉아 창밖을 쳐다봤다. 눈을 감게 만드는 너무나 밝은 빛. 그것을 본 순간 뒤편의 책장이 넘어져 그녀를 덮치고 지붕이 내려앉았다. 원자탄의 새 시대가 시작되는 그 때에 한 인간이 책 더미 속에 묻힌 것이다.” - 퓰리처 수상작가 존 허쉬의 논픽션 ‘히로시마(1946)’ 中

당시 히로시마 시의 인구는 34만 명. 이 중 7만 명이 폭발 즉시 목숨을 잃었다. 70,000이라는 숫자는 서울종합운동장에 깔려있는 좌석 수보다도 많다. 물론 이게 끝이 아니다. 1945년 연말까지 더 많은 사람이 원폭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원자폭탄과 방사능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던 시절이었기에 추가 피해는 속절없이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 1945년 8월 원자폭탄 투하 후 폐허가 된 히로시마 시의 모습. /사진=NBC NEWS 자료화면 캡쳐

원폭 투하지로 히로시마가 선택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초 후보지역으로 교토(京都)가 고려됐다는 점은 일본의 ‘상징’을 타격하는 데 미군의 목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교토에 비하면 히로시마가 선택된 이유는 합리적(?)이었다. 중요 군사거점이자 병사들의 승선지점이라는 점, 그리고 지형 구조상 폭격 효과가 상승한다는 점 등이 고려됐다.

히로시마 투하 이후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일본이 항복을 하지 않을 시 원자폭탄 투하는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말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3일 뒤인 9일, 미군은 일본 나가사키에 또 다른 원자폭탄 ‘팻 맨(Fat Man)’을 투하했기 때문이다. 트루먼은 5년 뒤인 1950년 6월 25일 김일성의 남침 사실을 보고받았을 때에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 뒤 미군을 참전시켜 자신의 말에 책임을 졌다.

두 개의 원자폭탄은 일본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사상자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모른 척 할 수 없는 비극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1945년 8월 9일은 소련군이 만주를 침공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미국이 일본의 재빠른 항복을 채근하지 않았다면 한반도가 공산화됐을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졌을 것이다. 하나의 잔혹함이 또 다른 잔혹함을 막아주는 일이 역사에서는 종종 벌어진다.

한편 한국인들에게 핵(核)은 그저 역사의 소재일 수만은 없는 형편이다. 북핵의 위력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1세대 핵폭탄보다 80배 정도 강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핵무기가 작아질수록 히로시마의 비극이 한반도에서 재현될 확률은 커지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2015년 8월 6일은 그런 날이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