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노무현 시대 효용가치 떨어져…새로운 대북관계 메시지

   
▲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
몇 가지 추론들

김정은은 왜 이희호 여사(이하 경칭 생략)일행을 만나지 않았을까?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첫째, 이희호 무용설. 김정은은 처음부터 이희호를 만날 의향이 없었다. 과거 인물들을 공포정치로 숙청하고 있는 마당에 아버지(김정일)를 조문한 남측원로가 정치적으로 중요했을까? 작년 12월에 보내온 초청장 문구 그대로 '좋은 날 오셔서 쉬다 가시라' 그 이상의 의미는 애초부터 없었다.

둘째, 의도적 이희호 거부설. 공식확인 된 것도 아니고 동교동측에서는 극구 부인하는 '김대중-김정일 밀약'이란 게 있다. 북한내부의 경제개발에 쓰일 물자는 핵 개발에 쏟아 붓고 남측의 지원으로 경제회복을 이루겠다는 김정일의 계산이 DJ이후 무산돼 북한 최고 지도부가 여전히 이 밀약의 유효성을 남측 인사들에게 호소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 중심에 있는 이희호를 김정은이 만나지 않은 것은 일종의 항의표시인 동시에 그 밀약이 여전히 유효함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셋째, 김정은 심경변화설. 김정은의 독단적 행보의 연속이다. 참석할 것처럼 보였던 러시아 전승절 불참이나 뜬금없는 표준시 변경 등 김정은이 외교적 관행과 프로토콜을 무시한 일방적인 자기맘대로식 행보는 대외관계라고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예측불허 김정은 스타일이 얼마나 북한정권의 이익에 도움이 될지는 별개로 말이다.

넷째, 새로운 신호(시그널)설. 분단 70년 동안 남북관계의 궤적이 남달랐던 시기는 분명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지는 10년이었다. 남북의 지도자가 심리적으로는 가장 가까이 다가선 동시에 북한의 핵개발로 실제로는 한없이 멀어진 역설의 시대.

   
▲ 이희호 여사의 방북 기간동안 일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김정은이 최근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우승한 북한 여자 축구선수단을 환영하기 위해 직접 공항에 마중까지 나가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사진=TV조선 캡처
그 때를 구가했던 정책입안자들은 여전히 이런저런 포스트로 동교동계와 그들이 취했던 대북 접근법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두 번째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의 남한 내 역할이 거의 끝났다고 북한은 판단했을 수 있다.

김정은 시대 남북대화의 물꼬를 틀 것으로 한껏 기대했던 일행을 맥 빠진 방북으로 만든 것은 고도의 대남 메시지가 담긴 의도적 결정이라는 것이다. 보다 직설적이고 구체적인 대북지원의 팩키지가 없는 메신저는 필요없다는 단호한 신호이다. 남한 내 햇볕정책 지지자들에게 김정은에 맞는 새로운 대북 접근을 고민하라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아태평화위의 정체

민주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정무적 이슈를 다룰 수 있는 다원화된 플레이어들의 존재이다. 민간인 신분인 이희오의 방북은 그래서 가능한 일이다. 반면 북한은 모든 것이 국가주도로 이뤄진다. 조직과 절차는 국가가 정한 제도 안에서만 유효하며 예외는 오로지 최고 지도자 한 명만이 갖는 특권이다.

이번에 방북단을 맞이한 아태평화위(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외형상 비정부기구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대남당국 민간협상을 전담하는 북한의 공식창구이다. 1994년 5월 미국, 일본 및 아태지역 미수교 국가들과의 정치, 경제, 문화교류를 확대, 강화할 목적으로 설립됐다. 말이 국가 간 교류와 협력이지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이 필요하기에 평화를 내세운 연대성을 주장하며 만들어낸 단체이다.

북한은 대남정책을 국가기구와 당 기구가 동시에 맡는 이중구조로 구성돼 있다. 당 기구에는 당 비서국의 대남담당 비서와 통일전선부(통전부)가 공개적으로 수행하는데 보통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현재 김양건)가 통전부장을 겸한다.

통전부는 남북대화, 남북 교류협력 사업, 해외교포 공작과 대남심리전 및 통일전선 등을 전담, 주관한다. ‘남한의 민주화 운동을 적화통일에 이용하기 위해 북한, 한국, 해외 등 광범위한 통일전선체 형성을 위한 당 주도의 대남총괄부서’인 것이다. 아태평화위는 산하 10여개 공작단체 중 하나로 통전부 정책과의 가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과 함께 통전부의 대외창구이기도 하다.

이렇듯 북한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조직에서 불과 서열 3위 맹경일 부부장이 방북 일행을 맞이한 것을 두고 이희호 방북단은 서운함을 못내 금치 못했다. 귀환한 이들의 어두운 표정은 빈 손으로 돌아온 방북단의 초라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 북한을 방문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6일 평양 소재 애육원을 방문해 어린이들의 인사를 받고 있다./사진=김대중평화센터 제공
내부 비판의 한계와 미래 전망

일각에서는 통일부 책임론을 거론한다. 정부가 ‘이희호 역할 축소론’을 펼친 탓이라는 주장이다. 타당한 비판일까? 그렇다면 다섯 번째 추론이 추가돼야 한다. ‘이희호와 주변인물들 착각론’이다.

이희호라면 맨 손(물론 직접 짰다는 털모자를 가지고 갔으니 빈손은 아니지만 북한정권에게는 감동스런 선물일 리 없다)으로 가도 환대 속에 경색된 남북관계를 흔들 정치적 레버리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부 환상을 이제껏 갖고 살았다는 방증이 드러난 셈이다.

이제와 정부를 비난한다면 앞으로 누가 가든 정부의 내밀한 메시지가 담기지 않은 방북이란 한낱 여행에 불과하다는 함의가 성립한다. 이제 남북관계의 앞날은 어떻게 전개될까?

전문가들은 앞으로 악재만 남아 있다며 당분간 남북관계가 나아질 여지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10월 노동당 창건일을 맞아 미사일 발사나 4차 핵실험까지도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무엇이 됐건 북한이 호의적으로 나올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걸 이유로 박근혜 정부의 선제적 결단을 재촉하기도 한다. 곧 있을 대통령의 8.15경축사가 더욱 주목받는 까닭이다.

그러나 섣부른 기대는 버려 마땅하다. 남북을 오갈 지름길은 있지도, 손쉽게 만들 수도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남북관계는 더 이상 당사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으로서는 이미 25년 전부터 국제화된 대외관계의 한 단면일 뿐이다. 대통령의 메시지 하나에 상황이 급반전 될 것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물 안 개구리 안목이다.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