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사 150년 최우선 가치는 인권의식에 기초한 인간존중의 인문정신
대한민국은 지난 70년간 일제 강점으로부터의 해방, 1948년 건국, 1950년부터 3년간 펼쳐진 6·25 전쟁 등 아픈 역사를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판 삼아 눈부신 성장을 이루어 왔다. 광복 이후 70년의 위대한 여정은 이승만 박정희 등 정치적 리더십과 위기를 슬기로 극복했던 국민 개인 각자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제는 지난 70년의 저력을 바탕으로 세계 속의 선진한국, 나아가 자유통일 달성을 위해 도약해야 할 시기다. 이에 바른사회시민회의(이하 바른사회)는 광복 기념 연속토론회의 마지막 순서로, 지난 70년 각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위대한 발자취를 짚어보고 ‘미래 도약’ 제언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바른사회가 13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교육회관에서 개최한 ‘광복 70주년 기념 연속토론회 <6차> 위대한 여정 70년, 새로운 도약의 70년을 위한 제언’에서, 이영조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의 사회로 박범진 前 국회의원, 안용환 명지대 한국학연구소 교수, 김호연 단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김진규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정치, 산업, 문화, 동포 각 분야의 발제를 맡았다. 아래 글은 김진규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의 발표문 전문이다 [편집자주]

“국위 선양의 최일선에 선 재외한인동포”: 유라시아 시대의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향하여

1. 재외한인동포 이민사 150년

재외한인동포의 이민사를 150년으로 정의해야 하는 이유는 1863~1864년으로 기록된 최초의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자발적 이주로부터 기원을 따져 봐야하기 때문이다. 삼정의 문란으로 먹고살기가 힘들어진 조선의 백성들이 흉년과 기근을 피해서 어쩔 수 없이 식솔들을 거느리고 짐을 싸서 국경을 넘어야 했던 비극적인 유민(流民)의 역사, 기민(棄民)의 역사에 눈을 감고서는 그 어떤 희망찬 미래도 노래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재외한인동포의 이민사 제1기는 1860년대부터 1910년 망국에 이르기까지 주로 러시아의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해간 농업 이민과 애국지사들의 정치적 망명유민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 당국의 기록에 의하면 1863년에 최초로 한인 농민 13호 가량이 포시에트의 관유지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포시에트는 두만강을 건너면 바로 접하게 되는 작은 항구마을이다. 그렇게 시작된 자발적인 한인들의 유입이 1869년에는 776호로 대폭 증가하게 되는데 이는 그 해에 함경도 지역을 강타한 대규모 흉년과 그로 인한 기근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1884년에 조러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한 이후에, 러시아 정부는 공식적인 이민을 인정하면서 한인들에 대한 러시아로의 귀화를 추진하여 일정한 조건을 갖춘 한인들은 토지를 분배받고 세금과 군역의 의무를 지는 비교적 여유 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이들을 원호(元戶)라고 한다. 러시아 정부가 요구하는 일정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귀화하지 않고 여호(余戶)라고 불리며,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타인의 농장에 고용되거나 다른 잡역에 종사하게 되었다.

   
▲ 1940년대 일본은 한인 수만 명을 러시아 사할린으로 강제징용했다. 당시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희생자 18명의 유해가 2014년 8월 추석을 앞두고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사진=연합뉴스TV 영상캡처

이 시기의 초기 유민은 농민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차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던 우국지사들이 유민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정치적 망명유민의 수가 증가하였다. 특히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외교권을 박탈당한 이후, 1910년 완전히 국권을 상실한 이후 이러한 정치적 망명유민의 수는 급증하였다. 이와 함께 연해주로의 이주보다는 조금 늦게 1869년의 기사흉년을 기점으로 청나라의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많은 수의 한인 유민들이 중국으로도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이들 유민과 중국인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회령부와 흥남주가 두만강 대안지대를 중간지대라는 의미에서 간도(間島)라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이 지역의 명칭이 되었다.

중국에서도 1885년 두만강 이북의 길이 350킬로미터와 넓이 25킬로미터의 지구를 한인 개간구역으로 정하고 이곳의 한인들을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연해주와 마찬가지로 우국지사들의 중국으로의 정치적 망명유민이 시작된 시기가 바로 1910년까지의 이민사 제1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1902년부터 1905년 사이에 이루어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농업이민 7천여 명이 재미동포 사회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도 이 시기 이민사의 중요한 특징이며, 1905년에 단 한차례 이루어진 멕시코 메리다 주의 애니깽 농장으로 천여 명 규모의 한인 계약노동자가 이주한 사실도 남미 한인동포사회 형성의 효시로 간주해야 하는 사건이다.

재외한인동포의 이민사 제2기는 1910년부터 1945년 조국 광복이 될 때까지의 일제강점 대일항쟁시기로서 이 때 수많은 한인들이 러시아의 연해주와 중국의 만주, 미국, 일본 등지로 이주하였다. 일제로부터 토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농민과 노동자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하였고, 정치적 난민과 독립운동가들이 대거 중국, 러시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특이한 사항은 1931년 만주사변 이후 만주국 건설을 계기로 만주지역의 개발을 위해 한인들의 대규모 집단이주가 실시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1930년대 후반 만주지역의 한인인구가 약 50만 명 정도 증가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계기로 본격화하기 시작한 강제징용과 강제징집도 이 시기 이민사의 중요한 특징인데 이로 인해 1945년 8월에는 재일한인의 규모가 최대 약 230만 명 가까이에 이르기도 하였다.

재외한인동포의 이민사 제3기는 1945년부터 1962년까지로서 해방 후 분단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발생한 입양, 결혼, 유학, 취업 등의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 시기였다. 1962년은 대한민국 정부가 처음으로 이민정책을 수립한 해로서, 이 시기에는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발생한 전쟁고아, 미군과 결혼한 여성, 혼혈아, 학생 등의 입양, 가족재회, 유학 등의 목적으로 대개 미국과 캐나다로의 이주가 주를 이루었다. 대략 1만 5천여 명 가량의 미군 배우자 결혼여성, 전쟁고아 및 혼혈아, 입양아동, 유학생들이 이 시기에 북미지역으로 이주하였고, 이들은 1965년 미국으로의 이민 문호가 활짝 개방되었을 때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는 연쇄이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 지난 4월 24일 전세계 34개국 500명의 한인 경제인이 모여 동반성장을 모색한 세계한인무역협회 '월드 옥타' 대표자대회가 막을 내렸다. 재외한인동포는 지금 이순간도 국위 선양의 최일선에서 묵묵히 경제활동에 종사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TV 영상캡처

재외한인동포의 이민사 제4기는 1962년부터 지금까지의 현대사에서 우리가 동시대인으로서 경험하고 목도하는 일련의 농업이민, 취업이민, 유학이민 등의 형태로 이루어진 정착을 목적으로 하는 공식적인 이민이라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1962년에 수립된 정부의 이민정책으로 남미, 서유럽, 중동, 북미 지역으로의 집단이민과 계약이민이 시작되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남미지역으로의 농업이민 및 투자이민과 경제개발을 위한 차관제공 및 기술협력을 목적으로 서독에 파견한 대규모 광산근로자와 간호사들의 이주는 이 시기 이민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하여 국외로의 한인 이민은 정점을 찍고 감소하기 시작하다가 다시 증가하는 롤러코스터 현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역이민’ 현상도 증가하였고, ‘역디아스포라’로 불릴만한 고려인, 조선족 동포들의 국내 노동시장으로의 유입은 새로운 사회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형편이다.

2.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로 회복해야 할 초기 이민사

우리가 애써서 기억하지 않으면 자꾸만 희미하게 잊혀가는 조선말, 대한제국, 일제강점 대일항쟁시기의 이민역사는, 그 규모나 역동성 면에서 해방 이후의 공식적 이민사에 비하여 결코 뒤지지 않는 연구대상이어야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특히 연해주 지역에서의 다양한 형태의 무장독립투쟁과 교육을 통한 구국항쟁의 역사는 지금보다는 더 많은 비중으로 역사교과서에 반영되어 후대에게 가르쳐야 함이 마땅한 일이다.

구한말 일제강점 시기로부터, 1920년대 초반 러시아혁명 후의 적백내전과 시베리아 간섭전쟁이 끝날 때까지 보여준 고려인 동포사회의 끈질긴 항일무장투쟁과 교육문화운동을 통한 생명력과 한인으로서의 정체성 유지는 우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알려서 널리 공유해야 할 소중한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인 것이다.

이 시기에 고려인들은 조국을 구하기 위한 의병활동의 선봉에 섰고, 이들에게 연해주는 만주, 간도와 함께 국외 구국항쟁의 본거지이자 러시아에 속해 있지만, 제2의 조선 땅이나 다름없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었다. 간도 관리사였다가 연해주의 노보키예프스크에서 ‘창의회’를 조직하고 청년들을 모아 훈련을 시켜 의병대를 조직한 이범윤, 연해주의 ‘주인옹’ 역할을 하며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돕고 ‘권업회’를 이끌며 독립운동자금의 조달에 힘쓴 고려인의 대표적 민족지도자 최재형, 헤이그 밀사 이상설과 이위종, 권업회 결성의 주역 이종호, 신흥학교의 설립자 이동녕, 항일무장투쟁의 영웅 홍범도, 대한제국 무장 출신의 혁명가 이동휘, 매서운 필봉의 논객이자 역사학자인 신채호와 장도빈, ‘백마 탄 김장군’으로 불리던 일본 육사 출신으로 연해주에 망명해 항일유격대를 이끈 김경천, 고려인 항일유격대의 걸출한 두 영웅 김유천과 한창걸, 고려인 최초의 볼세비키 당원이자 여성 혁명가였던 김알렉산드라, 엄인섭, 유인석, 문창범, 단지동맹... 계속해서 거명될 수 있고 또 언급되어야 할 수많은 이름들과 사건들이 우리의 역사교과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몇 줄 혹은 한 두 페이지에 불과하다.

20세기 초에 연해주 지역에서 의병활동에 참가한 고려인은 연인원 10만 명이 넘었고, 일본군과 벌인 전투는 무려 1,700여 회에 달했지만, 당시 국내 언론에서는 이들 의병을 폭도와 비류라고 폄하하였다. 그러나 연해주의 한글신문인 ‘해조신문’은 당당하게 의병이라고 부르면서 거의 매일 이들의 의병활동을 상세하게 보도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결사건도 블라디보스토크의 고려인신문 ‘대동공보사’에서 최재형 사장의 도움으로 거사 준비가 이루어졌고, 안중근과 동지들의 단지동맹 결성식이 이루어진 곳도 블라디보스토크 근교의 크라스키노 마을(얀치헤)이었다.

1917년 러시아의 2월혁명과 10월혁명은 차르 전제정치의 압제 하에 박해받던 소수민족인 고려인에게도 러시아인과 동등한 사회적, 민족적 권리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로 인식되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러시아군에 징집되어 독일과 싸웠던 젊은 고려인들은 대다수가 사회주의 이념에 매료되어 전후 원동으로 돌아와 러시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18년 4월 28일 하바로프스크에서는 볼세비키를 지지하는 이동휘, 김알렉산드라 등이 한인사회당을 창설하였는데 이는 한국 근대사에서 최초로 출현한 공산주의 정당이다.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 25일 연해주 내륙의 중심도시 니콜스크에서 모인 문창범, 최재형, 이동휘 등 민족지도자들은 임시정부 조직과 독립선언 방안을 논의한 끝에 ‘대한국민의회’를 출범시켰다. 대한국민의회는 모든 조선인의 중앙기관이자 임시정부임을 자임하며 3월 17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국외에서 선포된 최초의 해외 임시정부로서 중국 상해에서 4월 13일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보다 한 달여 정도 앞선 것이었다. 대표적인 두 개의 임시정부가 통합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노선과 주도권을 둘러싼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무산된 사실은 두고두고 역사의 아쉬움으로 남는 첫 번째 안타까움이다.

   
▲ 독립기념관은 지난 2009년 5월 ‘범국민 역사자료 기증운동 대구.경북지역 순회전’을 갖고 일제 시대 당시 각종 독립운동 기증자료를 공개했다./사진=연합뉴스TV 영상캡처

또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강제로 집행된 연해주 지역 고려인 약 18만 명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는 해방 전 이주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소비에트 정권의 수립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기여한 고려인 동포들의 목적은 그 길이 오직 조국독립에 도움이 되는 길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권은 대규모의 숙청과정을 거치며 스탈린 중심의 일당 사회주의 독재체제로 변질되어 갔고, 잔혹한 국가 테러리즘의 희생양으로 여러 소수민족들이 강제이주 등의 피해를 입었으며, 우리 고려인 사회는 가장 처참한 희생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비극적인 강제이주의 결과로 고려인 사회는 구소련 영토의 전역에서 뿌리를 내리게 되었고, 오늘날까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영민함과 근면함으로 가장 모델적인 소수민족의 위상을 떨치며 현지사회의 엘리트로서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3. 구동존이(求同尊異)의 자세로 품어야 할 유라시아 시대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고려인 혹은 고려 사람으로 불리는 재러시아 및 중앙아시아의 한인동포들, 조선족으로 불리는 재중 한인동포들의 국적은 분명 대한민국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아니다. 국적으로만 봐서는 우리가 논의하는 재외한인동포와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민족적으로, 정서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심적으로 우리가 그들을 재외동포의 범주에서 제외해 버릴 수는 없다. 도의상 그렇게 해서도 아니 될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가족들을 지켜내고자, 삶을 이어가고자 국경을 넘고, 황무지를 개간하고, 무장독립투쟁에 직접 참여하고,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무기와 식량 등을 사도록 군자금을 조달한 조선의 남정네들이었으며, 그들의 어머니와 할머니와 증조할머니는 온갖 피눈물 나는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밥과 김치와 시래기된장국과 떡과 국시를 지켜낸 단지 말만 조금 어눌할 뿐인 우리의 한인동포들인 것이다.

1990년 한소수교가 이루어지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되어 러시아를 비롯한 구소련 연방의 구성 공화국들이 각각 독립 국가를 선포하면서 우리 고려인 동포사회에 큰 변화의 전환점이 마련되고, 1992년 한중수교를 통하여 연변자치주를 포함한 동북3성 조선족 동포사회와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우리 대한민국 사회는 미처 준비하지 못했던 새로운 성격의 재외동포 문제를 접하게 되었다.

이념의 장벽 때문에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러시아와 중국과의 새로운 만남은 새로운 재외동포의 존재를 알려주었고, 재러 동포, 재중앙아시아 동포, 재중 동포들과의 새로운 공존의 법칙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로 이미 진입한 걸로 파악되는 오늘, 우리에게 이들과의 새로운 선진적인 관계 설정은 앞으로의 70년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재외동포 관련 법률의 혜택이 골고루 미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여전히 놓여 있는 러시아와 중국의 수많은 고려인, 조선족 동포들은 차치하고라도 소위 ‘역 디아스포라’ 현상의 대표로 우리 한국사회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또 다른 수많은 고려인, 조선족 동포들의 현실은 보다 과감하고 적극적인 우리의 관심과 정책방향의 설정을 요구하고 있다.

시베리아 억류 포로생활에서 극적으로 귀환한 강제징집자들의 모임인 ‘삭풍회’의 피해자들,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속의 주인공 이명준과 같이 제3국행을 선택했다가 꿈에도 못 잊을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숨져가는 이역만리의 전쟁 포로들,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서 사할린의 고려인으로 남아버린 수많은 한인들, 해외입양으로 어린 나이에 조국에서 버려진 수많은 ‘팰르랭들’, ‘따이한’, ‘코피노’ 같은 이름으로 베트남과 필리핀 등지에 남겨진 정체성 혼란을 겪는 한인의 핏줄들... 21세기 유라시아 시대에도 여전히 디아스포라는 역동적으로 국경의 안과 밖의 경계를 넘나들며 계속 이어지고 있다.

광복 70년의 위대한 여정을 뒤돌아보며 새로운 도약의 70년을 준비하고 설계하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최우선의 가치는 인권의식에 기초한 인간존중의 인문정신이어야 할 것이다. 좌우의 이념이나 사상적 대립도, 국가 간의 역학관계도, 복잡한 국제정세도 모두 이 보편적이고 정언명령적인 휴머니즘으로 수렴되어 자기 자리를 잡아 나갈 때 복잡할 것 같던 법적, 제도적, 외교적 제약도 극복할 수 있는 방안들이 도출되리라고 믿는다. /김진규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