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잘못된 교전수칙 참변…북한 핵 시간벌기 제대로 이해해야

2002년 6월 24일의 참상을 재현한 영화 <연평해전>이 올해 600만 관객을 돌파한 첫 작품이 되었다. 당초 상업적 성공 가능성이 그렇게 높지 않았던 점을 상기할 때 실로 경이로운 흥행 질주다. 전국민이 한일월드컵 응원에 흥분해 있을 당시 NLL을 불법으로 남침한 북한 고속정의 기습공격 받고 산화한 6인의 영웅들은 무려 13년 동안 사실상 잊혀져 왔다. 그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탄생한 것이 올해 6월 개봉된 영화 <연평해전>이다.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 10일 서울시 마포동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영화 <연평해전>이 한국사회에 던진 의미를 자유주의, 국가안보, 사회문화 그리고 영화적 의미를 다각도로 고찰하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국가안보적 관점에서의 발표에는 20여년 국가 해양 전략을 연구해온 이춘근 선임연구위원(해양전략연구소)이 나섰다. 분노를 삼키면서 영화를 감상했다는 이 연구위원은 영화가 당시 2002년 연평해전을 "북한의 NLL 무력화 시도 중 가장 현저한 사건"이라고 규정하면서 "그 때의 대한민국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었다"고 한탄했다.

연평해전 당시 우리 국민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금강산 관광을 지속 했고, 연평해전이 벌어진 그날에도 우리 국민 대부분은 축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선임연구위원은 "종합국력이 북한 보다 30배 이상 큰 대한민국임에도 천안함 격침, 연평도 포격사건 등이 실제로 발생했고 우리는 당했다"면서 "북한에게 쩔쩔매는 이러한 비정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음은 이춘근 선임연구위원의 '영화 연평해전:국가안보적 의미' 발표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 10일 서울시 마포동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영화 <연평해전>이 한국사회에 던진 의미를 자유주의, 국가안보, 사회문화 그리고 영화적 의미를 다각도로 고찰하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I. 극장에 거의 가지 않는 사람의 ‘연평해전’ 관람평

지난 10 여 년 동안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 적이 거의 없다. 꼭 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간 영화들이 4-5편 있기는 하다. 글라디에이터, 적벽대전, 공자, 알렉산더를 보았다. 제목을 보면 모두 역사 관련 영화들인데, 영화를 보고 나올 때 마다 나는 전혀 볼 필요가 없는 영화를 보았다고 생각하며 씁쓸해 했다.

영화를 보면서 나는 대개 스토리의 전개가 너무나 허구적(虛構的)이라는데 화가 났다. 영화를 보고 역사를 공부하려 했던, 도무지 영화를 즐길 줄 모르는 인간의 황당한 영화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전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친 영화인 글라디에이터에는 역사상의 실존 인물들이 여러 명 나온다. 마커스 아우렐리우스, 코모도스 황제는 실존 인물들이다. 이 영화에서는 현명한 황제 아우렐리우스가 능력이 되지 않는 아들 대신 유능한 장군 맥시무스에게 황제의 직위를 물려주려 하지만 실패한다.

실제 역사의 이야기는 정반대다. 능력이 떨어지는 코모도스에게 황제 직위가 이어지는 것을 반대하는 원로원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아들에게 황제직을 물려주는 것이 실제 역사다. 공자라는 중국 영화는 공자를 장군으로 묘사하고 있을 정도니 할 말도 없다. 영화나 소설을 즐기려고 보아야 하는 것인데, 역사적 진위를 따지고 공부 를 할 생각으로 보니 안 보느니만 못했다. 물론 나는 철지난 오락물(주로 액션) 영화들을 TV를 통해 드문드문 보기는 한다.

본 것들을 또다시 여러 차례 다시 보기도 한다. 그런 영화들은 스토리를 애써서 기억하거나 시비 걸려고 애쓰지 않으며 보아도 되는 영화들이니까. 그런데 정말 수 십 년만에 ‘반드시 볼 것’을 작심하고, 시간을 쪼개서 가서 본 영화가 ‘연평해전’이다. 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영화는 지난 20년 이상 해양 전략을 연구하고, 대한민국 해군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냈던 나의 학자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함께 영화를 본 아내에게 내가 늘 접하던 모습이 (전투 및 작전 장면을 제외하면) 바로 저 장면들이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연평해전’을 보는 내내 “분노”하면서 보았다. 처음부터 분노를 가눌 수 없었다. 분노의 대상은 북한 뿐만이 아니었다. 아마도 내 분노의 더 큰 부분은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대한민국의 정치가들과, 그런 것들은 우리의 관심거리도 아닌 것처럼 행동한 대한민국의 국민(정치가, 지식인, 기자 그리고 보통 국민들) 들을 향한 것이었다.

설마 그럴 리 있을까만은 우리국민들은 축구경기에서 승리하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우리 국민들 중 일부는 그런 전투가 있건 없건 금강산 관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연평해전 전투 중에도, 전투 후에도 수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이 금강산에 놀러갔다. 영화 연평해전은 당시의 정치 상황, 국민들의 무관심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지는 못 했지만, 오늘 대한민국 일반 국민들 특히 젊은이들의 안보 경각심을 높였다는데서 높이 평가될 수 있을 영화다.

이미 영화의 작품성 운운 하면서 트집을 잡으려는 세력이 있음을 안다. 그들이 뭐라고 해도 연평해전은 거의 다큐멘터리라고 해도 좋을 만치 상황 - 비록 정치 사회적인 측면보다는 전투 상황에 집중했지만- 을 잘 묘사한 영화다.

II. 연평해전 이전 북한의 NLL 무력화 시도

NLL 설정

영화의 첫 장면에서 이야기 되지만 한국전쟁이 종료되는 시점 유엔군과 한국해군은 한반도의 바다를 100% 장악하고 있었다. 북한 앞바다 전체와 그 곳에 있는 모든 섬들이 우리 섬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날 때 육지에는 휴전당시 한국군(UN군) 과 북한군이 대치하던 선을 기준으로 휴전선을 획정할 수 있었다.

즉 땅에서는 정확하게 남북한의 경계선을 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바다에는 정확한 남북한 경계선을 획정하기가 나빴다. 모든 바다와 섬을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유엔군은 38도선 이북의 모든 섬을 북한에 되돌려 주기로 결정한다. 황해도의 남부지역(옹진반도 등 38선 이남지역)이 한국전쟁 후 북한군이 장악한 영토가 되었기 때문에 서해 바다에 남북한 경계선을 긋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UN은 서해 바다에 일직선 이 아닌, 들락날락하는 직선으로 연결된 경계선을 그을 수 밖에 없었다.

NLL이라 알려진 선은 한국과 유엔군이 그 선 이북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선이었다. 1953년 8월 30일, 즉 휴전 후 1개월여만에,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에 의해 획정된 NLL덕분에 북한은 황해도 남쪽의 작은 섬들 수 십개를 돌려받았고, 항해할 수 있는 바다도 일부 돌려받았다. 그래서 북한 은 아무런 시비 없이 20년 이상 NLL을 사실상의 남북한 해상군사경계선으로 받아 들여왔다. 북한이 간행한 공식 자료집인 조선중앙연감 1959년 판은 NLL을 군사분계선으로 인정하는 지도가 게재 되어있기도 하다.

   
▲ 연화 연평해전.
NLL 에 대한 북한의 도발 개시

그러던 북한은 1973년 12월 서해 5도의 한국 해역에 대한 자신들의 관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스스로 지켜오던 NLL을 무시한 새로운 ‘조선서해상 군사분계선’이라는 대한민국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선을 들고 나온 것이다. 물론 그 이전 북한은 NLL을 무시하는 도발을 의도적으로 감행했고 NLL은 합의에 의한 선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합의에 의한 선은 아니지만 NLL을 진정 고마워했던 북한의 적반하장(賊反荷杖)이 아닐 수 없다.

1973년 이후 북한의 도발이 본격화된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 가능하다. 우선 1970년대 초반 서부 휴전선을 지키던 미국군이 휴전선 방위를 종료하고 후방으로 이동배치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두 번째는 1970년대 초반 북한 해군은 적어도 서해 5도 지역에서 작전할 경우 한국 해군의 전력을 능가하는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1970년대부터 세계 각국이 영해의 범위를 3해리로부터 12해리로 늘였는데 12해리를 영해로 설정할 경우 북한의 영해는 NLL 남쪽에 이르게 된다. 물론 백령도를 기준으로 우리가 12해리 영해선을 그으면 그 선은 황해도의 장산곶 반도에 이른다. 이미 존재하던 선이 있는데 새로운 선을 획정하겠다는 것은 도발을 목적으로 하는 외 그 어떤 이유도 없다. 북한이 도발할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한 것이다.

NLL에 대한 남북한간의 합의 물론 남북한 양측은 분쟁을 회피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했다. 노태우 대통령 재임 중인 1991년 12월13일,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남북기본합의서) 가 채택 되었고 1992년 2월 19일부터 발효된 문건이 있다. 본 합의서 제 2장 11조는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 고 명기했다. 그러나 1992년 9월 17일 부속합의서에서 3장 10조는 “남과 북의 해상 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는 내용을 추가함으로써 북한이 계속 ‘NLL 재설정’ 시비를 걸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물론 남북한은 “상대방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 “남과 북은 의견 대립과 분쟁 문제들을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해결한다.” (기본합의서 2장 9-10조) 고 약속했다.

북한의 NLL 無力化 상황

물론 북한이 남북합의서를 지키겠다는 의도는 없었다. 공산주의자들의 전략 전술은 언제라도 전쟁이라는 수단을 마음껏 사용하는데 있다. 그들은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에 불과하다’ 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문자 그대로 신봉하는 사람들이다. 한국 국민들은 북한과 만나 이야기 하고 무슨 문서에 합의 하는 사인이라도 하면 마치 평화가 온 듯 흥분하지만 북한의 기본전술은 클라우제비츠의 명제에 기반을 둔 화전양면(和戰兩面) 정책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그러는 사이 한국의 방어선은 하나 둘씩 무너지게 되었 고 김대중(그리고 차후 노무현) 대통령 시절 사실상 대한민국의 바다가 다 뚫렸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북한의 선박들은 마음껏 한반도 수역을 항해할 수 있었다. 한반도와 제주도 사이를 허락 없이 항해하던 북한 선박은 한국 군함을 들 이 받기도 했고, 정선 명령을 내리는 한국군함을 향해 “상부에서 내린 지시대로 제주해협을 통과하겠다. 김정일 장군이 개척한 항로다.” 라고 대꾸할 정도였다.(2001년 6월, 즉 제 2연평해전 도발 1년 전 시점의 일) 물론 북한의 NLL 무력화 시도 중 가장 현저한 사건은 1999년 6월 15일 발발한 제 1차 연평해전과 2002년 6월 29일 발발한 제 2 차 연평해전이다.

   
▲ 연화 연평해전.
III. 연평해전

제 1 연평해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노태우 대통령에 이르는 기간 동안 북한의 NLL 군사 도발은 항상 한국군의 ‘군사적 대응’으로 격퇴 되거나 억제 되었다. 한국 해군의 NLL 에 대한 작전 개념은 문자 그대로 사수(死守) 였다. 박정희 대통령 당시부터 한국 해군은 NLL을 방어 할 수 있고 북한의 고속 경비정과 전투할 수 있는 군함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해군이 물려준 덩치 크고 느려서 도무지 북한의 경비정과 맞서기 곤란했던 낡아빠진 대형 군함 대신, 북한의 소형 고속정과 싸울 수 있는 고속정 편대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김대중 대통령 재임 당시 한국해군은 북한 해군을 능히 제압할 수 있는 확실한 군사력 우위를 확보한 상태였다. 북한 해군과 한국 해군이 맞붙으면 어떻게 되는지를 그대로 보여준 것이 1999년 6월 15일 발발한 제 1차 연평해전이었다.

북한의 고속정과 싸울 수 있는 한국 고속정은 박대통령 당시 학생들의 방위성금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한국 최초의 고속경비정 이름은 ‘학생호’였으며 1972년 11월 18일 초중고 학생 3,0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수식이 거행되었다. 우리가 연평해전 영화에서 본 윤영하 대위가 지휘하던 참수리호의 전신이었다. 대한민국은 적어도 한때는 대통령으로부터 어린 초등학생에 이르기까지 국가안보에 관해 온 힘을 합쳐 대응하던 그런 나라였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미 북한과 맞서는데 문제없는 한국해군을 향해 북한이 과감하게 도발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전투를 벌인 날이 1999년 6월 15일이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 1년여가 지난 무렵이었다. 정치적으로 대북 화해와 대화를 강조하는 햇볕정책의 시대였고 북한은 한국을 한번 건드려 보았다. 우리가 다 알듯이 1차 연평해전은 한국의 일방적인 승리였고 북한의 실험은 처절한 실패로 돌아갔다. 1999년 6월 15일 이전 약 일주일 동안 NLL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도발을 자행한 북한의 도발에 대해 당시 필자는 우리해군이 갖춘 더 힘 좋고 강한 배로 북한 경비정들을 밀어 올리라는 시론을 기고한 바 있었다.

6월 15일 우리 경비정이 북한 해군을 밀어내기 위해 북한 경비정의 꽁무니를 들이 받자 북한병사들이 총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국 해군은 북한 해군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개시했고 북한군을 격멸 퇴거시켰다. 북한은 당시 어뢰정 1 척 침몰, 중형경비정 1척 반 침몰, 대청급 초계함 1척 대파, 대형경비정 1척 대파, 소형경비정 2척 기관실 파손, 사망 30여명, 부상 70여명 등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

반면 한국군 피해는 고속정 4척, 초계함 1척 기관실 및 선체 일부 파손, 부상자 9명, 전사자는 없었다. 마치 한국 해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북한 해군을 실컷 두들겨 패 준 꼴이었다. 그런데 그날에도 우리 국민들은 금강산에 가서 관광을 했고, 금강산 관광은 2008년 관광객 박왕자씨가 북한군이 쏜 총에 맞아 죽던 때까지 어떤 경우에도 중단 되지 않았다. 1차 연평해전의 압승에 대해 당시 대한민국 국가 수뇌부가 이를 진정 기쁘 게 생각했는지 알 길이 없다. 압도적인 군사적 승리가 혹시 햇볕정책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우려 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연평해전 영화는 2차 연평패 전을 묘사하고 있는데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 윤영하 대위를 비롯한 당시 대한민국 해군장교들의 답답한 입장 토로는 정치가 군사에 개입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며 사실도 그러했다.

제 2 연평해전

1999년 제 1 연평해전(6.15)이후 꼭 3년 만에 2차 연평해전(2002. 6. 29.)이 발발했다. 1차 연평해전 이후 꼭 1년 만에 남북한 정상회담이 평양에서 열렸고, 한국은 비전향 장기수들을 조건 없이 북한으로 돌려보내는 등 남북한 관계는 ‘형식상’ 전 분야에서 교류, 협력이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2000. 9. 24. 제 1 차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 열렸고 2002년에는 제 2 차 남북 정상회담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 관계는 형식과 달리 본질에서 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본질이 다른 두 체제가 통일을 지상목표로 존재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정치적 현실은 남과 북 두 체제 중 하나는 궁극적으로 소멸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환상적인 평화는 2002년 6월 29일 깨지고 말았다. 1차 연평해전에서는 도무지 게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승리한 한국 해군이 이번에는 당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손과 발이 묶여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은 1999년 당한 패배에 복수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월드컵 때문에 온 국민이 정신이 딴 곳에 가있던 시점을 잘 활용하기도 했고, 북한의 비위를 맞춤으로써 긴장을 회피하려는 대북 유화정책도 잘 활용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차 연평해전에 관한 회고에서 “나는 네 가지 지침을 주었을 뿐 그 이후 모든 것은 군에 일임했다”고 쓰고 있다. “군사지식이 빈약하다는 것을 내 자신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소리’를 하면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정교해야 할 군사작전을 그르칠 수 있을 것 같았다.”는 언급도 덧붙였다. 그러나 실상은 조금 복잡하다. 김대중 대통령이 준 지침은: 첫째 NLL을 반드시 확보하라, 둘째 선제사격을 하지 말라, 셋째 북이 선제공격 할 때는 강력히 응징하라, 넷째 교전이 발생하더라도 확전되지 않도록 하라, 였다.

북한이 준비하고 대든 2차 연평해전 당시 네 가지 지침은 더욱 확실해져 있는 상황이었다. 햇볕정책도 3년차가 되었던 해였다. 이미 필자를 비롯한 많은 군사전문가들이 우려를 표시하던 것이 바로 김대중 정부가 군에 대해 간섭하는 상황이었다. 네 가지 지침 외에 모든 것을 군에 일임했는데 네 가지 지침 그 자체가 군의 손발을 다 묶어 논 것이나 마찬가지 였었다.

김성만 전 해군작전 사령관은 “NLL을 지키기 위해서는 원거리 대응기동 (즉 적 함정 함포의 유효사거리 밖에서 적함의 남하를 차단하는 기동)과 사격(경고사격, 격파사격)으로 북한 함정의 남하를 저지해야 한다. 그리고 기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현장 지휘관의 자위권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현장 지휘관은 자기 부대를 지키기 위해 적이 도발적 행동(포 조준 혹은 고속 접근) 등을 해 올 경우 적성(敵性, hostility)을 선포하고 먼저 선제공격을 해야 한다. 이것은 어떤 형태의 교전 규칙에도 항상 적용되는 원칙이다.”고 기술하고 있다. (연평해전, 2015: 118)

당시 작전을 지휘했던 김진호 합참의장 회고도 별 다르지 않다. 대통령이 직접 전화해서 북한 배가 절대로 NLL을 넘어오지 못하게 하라, 먼저 사격하지 마라, 적으로부터 공격당해 장병이 다치면 안된다. 는 내용이었다 한다. 김대중 대통령이 회고록에 쓴 4가지 지침과 김진호 합참의장에 대한 전화 지시는: NLL을 반드시 확보하라 그러나 결코 먼저 쏘지는 말라; 맞으면 강력히 응징하라, 그러나 확전되지 말도록 하라. 는 것으로 요약 된다.

정상적인 군인, 전문가들이 도무지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지시가 아닐 수 없으며 바다에서의 작전 수칙을 완전히 위반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바다는 육지와 달라서 숨을 곳이 전혀 없다. 즉 바다에서는 군사용어로 엄폐, 은폐가 불가능하다. 육지의 경우 땅을 파고 숨을 수 있으며(그래서 병사들의 기본 장비 중에 삽이 포함된다), 나무 뒤에 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육군은 선제공격을 당하더라도 죽지 않을 방법이 있다. 그런데 해군에게 먼저 쏘지 말라고 한다면 그것은 먼저 맞으라는 소리와 똑같은 것이다.

2차 연평 해전은 북한이 그동안 계획하고 준비한 것이었으며 북한의 고속정들은 투박하기는 하지만 탱크 포마저 장착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 함정을 격침시켜 3년 전의 수모를 되갚아 주겠다는 북한의 의도 앞에 한국군 총사령관(대통령)이 한국 해군의 손발을 묶어놓은 것과 같았다. 이 조치는 결국 참수리 357 정 보고 북한의 포를 한발 먼저 맞아주라는 조치와 다를 게 무엇인가?

영화가 잘 묘사하듯이 357 참수리정은 적의 조준 공격 초탄에 이미 경황을 읽어버린 상황이 되었다. 기선을 제압당한 것이며 전열이 흩트려진 것이다. 영화에서 묘사되듯 357 정의 한국해군 장병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다. 6명 전사 19명 부상이니, 이 전투는 정말로 처절한 전투였다. 먼저 공격하지 말라며 장병이 다치면 안 된다는 대통령의 요청이 명령이었다면, 그런 명령은 도무지 이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우리 해군 용사들이 죽어 갔다.

IV. 그때 대한민국은 정상적인 나라가 아니었다. 지금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시청광장 혹은 광화문 광장에 몰려나가 TV를 보면서 목청 높여 축구팀을 응원하는 사람들의 행동을 집에서 TV로 축구경기를 보는 사람들의 행동보다 더 “애국적”(愛國的) 인 행동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애국적이기에 얼굴에 태극기를 그리고 밤새도록 목청을 높여 응원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 사람이 전쟁이 났을 때, 나라를 위해 총을 들고 전쟁터로 뛰어나가는 행동이 애국적 행동이다. 평시에 세금을 꼬박꼬박 잘 내고, 대학공부 따라갈 정도의 체력이 있으면, 꾀병 부리지 않고 군대에 갔다 오는 것이 애국의 기초다.

1차 연평해전 당시 우리 국민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금강산 관광을 지속했고, 연평해전이 벌어진 그날에도 우리 국민 대부분은 축구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지금 영화를 보고 “미안하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바로 그때 그렇게 행동 했었다는 양심고백이다. 대통령도 그 비상시국에 축구관람을 위해 출국했다. 전사자의 장례식에 대통령은 커녕 장관도 참석하지 않았다. (못했다고 써야 맞는가?) 국민이 국가에 대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애국은 ‘전쟁터에서 죽는 것이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죽은, 그럼으로써 나라를 위해 최대의 애국을 한 젊은이가 6명이나 되었는데, 그들의 영결식에 장관조차 참석하지 않는 게 나라인가?

조타실에서 끝까지 조타기를 붙들고 배를 구하려다 전사, 배를 인양할 때 겨우 시신을 찾을 수 있었던 한상국 중사의 아내는 대한민국을 떠나기조차 했다. 국가란 무엇인가? 2500년도 더 된 나라를 의미하는 국(國) 이라는 한문글자는 ‘사람이 창을 들고 서서 지키는 큰 땅’이라는 상형문자다. 나라란 창 들고 지켜야 하는 큰 땅이라는 것이다.

이 글자 속에는 국민, 주권, 영토라는 국가의 3요소가 다 포함되어 있다. 필리핀보다 훨씬 돈을 많이 버는 삼성전자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 총 한 자루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삼성전자보다 훨씬 돈을 못 버는 필리핀은 군함과 탱크, 전투기를 갖추고 있다. 하나는 회사이고 하나는 국가라는 사실이 다르다. 회사원과 국민은 전혀 다르다. 국민은 나라가 부르면 달려 나가서 목숨도 바치지만 회사원은 회사를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

연평해전이라는 영화를 보고 정말 오래간만에, 아직도 멀었지만,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국민’ 임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당연한 일이 대견해 보이는 이 비정상적 상황을 빨리 끝내야 한다. 종합국력이 북한보다 30 배 이상 큰 대한민국이 북한에게 쩔쩔매는 이러한 비정상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영화 연평해전은 국가로서 정상이 아닌, 대한민국이 언제라도 당할 수 있는 일을 구체적으로 우리국민들에게 보여준 작품이다. 우리는 실제로 당했다.

천안함 격침, 연평도 포격사건 등이 그것이다. 언제 북한이 다시 도발할까? 핵무기 체계를 완성할 때까지 시간을 벌고 있는 것 같다. 핵무기 체계를 완성(실전배치 완료)한 후 북한은 다시 도발을 하게 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강력히 응징할 수 있을까? 재래식 분쟁에도 강력히 응징 못한 대한민국이 핵 무장을 완료한 북한의 도발에 강력히 응징한다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심각하게 고민해 보자. /이춘근 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