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익 추구 않는 예술작품은 없어…성공땐 다수에 행복 선물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12일 마포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예술인이 본 사익-사익이 예술을 발전시킨다>를 주제로 제2차 토론회를 개최했다.

‘공익’은 좋은 것이고 ‘사익’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팽배하다. 하지만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장경제 체제에 전혀 맞지 않는 낭설이다. 시장경제의 핵심은 사익추구이며, 사익을 바로 보고 개인의 사익 추구를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공익적인 일이다. 예술인들은 사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발제를 맡은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남정욱 교수는 “어찌 보면 사익을 논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사익을 추구하는 이유나 사익이 가져오는 이익을 말하느니 적당한 운동은 건강에 좋다는 명제가 참신하다”며 “개인의 동기 유발 중 사익에서 출발하지 않는 것이 없다. 예술의 분야에서도 사정은 같다. 생계 걱정 없는 사람이 예술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작품을 쓰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익을 노리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경우는 드물다”고 말문을 열었다.

남 교수는 이어 “오늘 다루고자 하는 사익은, 사익은 사익이되 중심이 이타적 동기에 놓이지 않아야 하며, 개인적인 이익 추구로 출발했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타인의 삶에 윤택과 즐거움을 줘야 한다”며 “이 기준으로 보면 해리포터를 쓴 조앤롤링이 대표적인 경우가 될 수 있다. 그녀는 빈곤 탈출을 이유로 글을 썼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은 전 세계 모든 아이들에게 호그와트라는 마음 속 또 하나의 학교를 선물했다”고 소개했다. 아래 글은 남정욱 교수의 '사익에 대한 문화 인류학적 고찰' 발제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 남정욱 교수
1.

어찌 보면 사익을 논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사익을 추구하는 이유나 사익이 가져오는 이익을 말하느니 적당한 운동은 건강에 좋다는 명제가 오히려 참신하다. 개인의 동기 유발 중 사익에서 출발하지 않는 것이 없다. 예술의 분야에서도 사정은 같다. 문학부터 보자면 사익을 노리지 않고 작품을 쓰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당연한 일이다.

물론 생계 걱정없는 사람이 예술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작품을 쓰는 경우를 상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명예욕 혹은 대중에 대한 영향력의 강화 욕구라는 측면에서 보면 결국 무형의 이익을 추구한 셈이다.

가령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왜 썼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예수 믿으라고 썼소.” 라고 대답했다. 한편 도스토예프스키는 도박 빚을 갚으려고 소설을 썼다. 일종의 강요된 사익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사익은 그런 사익은 아니다. 사익은 사익이되 중심이 이타적 동기에 놓이지 않아야 하며 두 번째로는 개인적인 이익 추구로 출발했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 타인의 삶에 윤택과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이 기준으로 보면 현대의 신화인 조앤 롤링이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이다. 그녀는 빈곤 탈출을 이유로 글을 썼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은 전 세계 모든 아이들에게 호그와트라는 마음 속 또 하나의 학교를 선물했다.

조앤 롤링은 1965년 7월 31일 잉글랜드의 브리스톨 인근 소도시 예이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좋아했고 자기가 지어낸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는 취미가 있었으며 여섯 살때는 동물을 소재로 한 동화까지 지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와 제인 오스틴의 <에마Emma>를 탐독했으며 대학 시절에 톨킨의 <반지의 제왕>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다.

   
▲ 영화 해리포터.
대학에서 불문학과 고전학을 공부한 조앤 롤링은 졸업 직후 몇 년간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에서 일했지만 직장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머릿속에 업무보다 각종 이야기들이 들끓고 있었으니 업무가 되었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결국 해고 통지서를 받은 조앤 롤링은 맨체스터 상공회의소에서 다시 사무직으로 근무하게 된다. 런던에서 맨체스터로 기차 통근을 하던 시절, 고장으로 기차가 몇 시간 지체된다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창밖을 내다보던 조앤 롤링의 머릿속에 비상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마법학교에 입학하라는 통지서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마법사인지 몰랐던 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 바로 ‘해리포터’의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1997년 6월 26일, 첫 권 <해리포터와 현자의 돌(Harry Potter and the Philosopher's Stone)>이 출간된다. 책은 하드커버와 문고판으로 동시에 출간되었는데 하드커버는 겨우 500부를 찍었을 뿐이다. 여기서부터 기적이 일어난다. 미국의 한 출판사인 스콜라스틱(Scholastic)에서 10만 달러를 지불하고 책의 판권을 사간 것이다. 1쇄만 무려 5만 부였다. 스콜라스틱은 책의 제목을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Harry Potter and the Sorcerer's Stone)>로 바꿨다. ‘Philosopher’라는 단어가 아이들에게 어렵다는 판단이었고 덕분에 우리나라에서도 ‘현자의 돌’ 대신에 미국식으로 된 ‘마법사의 돌’로 번역되었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처음부터 돌풍을 일으킨 건 아니다. 처음 책이 출간된 직후 런던의 한 서점에서 조앤 롤링이 낭송회를 열었을 때 앞에 앉아있던 사람은 겨우 둘이었다. 그러나 마법의 실이 전 세계를 옭아 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07년 모두 일곱 권으로 완간된 ‘해리 포터’ 시리즈는 지금까지 67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4억5천만 부 이상을 팔아치웠다. 워너브라더스가 2001년 처음 제작했던 ‘해리포터’ 시리즈는 주연을 맡은 아이들의 코 밑에 수염이 나고 2차 성징이 나타나는 등 소년이 아닌 청년이 주인공이 되는 기이한 상황을 연출하면서도 2011년 7월 마지막 8편인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을 개봉하면서 10년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10년간 64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마지막 작품까지 계산하면 대략 74억 달러(약 7조8000억 원)의 수입을 거둘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해리포터’ 시리즈가 1997년부터 2006년까지 올린 전체 매출액(소설, 영화, 관련 캐릭터 판매액 포함)은 우리 돈으로 308조 원으로 같은 기간 한국의 반도체 수출 총액 231조 원의 1.3배 이상이다.

해리 포터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을 해 보자. 조앤 롤링은 대학 시절 <반지의 대왕> 을 열심히 읽었다고 하는데 <반지의 제왕>을 읽고 ‘해리 포터’를 썼다고 하면 명백한 퇴보다.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관이라든지 캐릭터의 깊이 같은 건 아예 비교할 수준도 되지 않는다. 내러티브도 헐렁하다. 솔직히 말해 해리포터는 시시한 판타지에 불과하다.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평범함, 부모의 죽음과 복수라는 빤한 궤적 그리고 평범한 소년이 위대한 마법사가 되는 이야기는 모르긴 해도 세계 각국에 널렸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 후줄근한 소설이 그토록 돌풍을 일으켰을까. 해리 포터가 성공한 이유는 그녀의 절박함, 사회보장국으로부터 주거 및 수입 보조금으로 주당 140달러를 받던 한 가난한 싱글맘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그 절실한 바람이 만만찮게 불우한 주인공인 해리 포터에게 그대로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그 어떤 절박함, 간절한 소망이 작품 속으로 녹아 들어가 극 중 캐릭터를 살아 숨 쉬게 만들었으며 그것이 역시 같은 바람을 마음속 어딘가에 지니고 있는 독자들과 화학반응을 일으킨 것이 해리 포터 신화의 비밀인 것이다. ‘빈곤 탈출 = 해리 포터’라는 신화의 공식을 명백한 사익의 추구 외에 그 어떤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사익은 다수의 행복을 증진하는 기관차의 동력이다.

   
▲ 영화 쉬리.
2.

1998년 초 영화 ‘타이타닉’이 개봉했을 때다. 서울 관객 200여 만 명에 전국 관객 ‘추산’ 450만 명(당시에는 정확한 집계 시스템이 없을 때다)으로 8년 전 ‘사랑과 영혼’이 썼던 흥행기록을 순식간에 뛰어넘은, 말 그대로 꿈의 숫자였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 기록을 넘어선 게 바로 ‘쉬리’다. 그것도 ‘타이타닉’ 개봉 후 불과 1년 만에. 이 전까지 한국 영화 신기록은 ‘서편제’의 116만이었다. 그것도 봄부터 가을까지 초장기 상영한 끝에 억지로 얻은.

‘타이타닉’을 침몰시킨 ‘쉬리’가 500만 명의 고지를 향해 질주할 즈음엔 공중파의 9시 뉴스까지 그 감동의 순간을 생중계 했다. 서울 시민의 30%가 관람 했으며 초등학생까지 감독이 이름을 알고 있었던 ‘쉬리’의 연출자는 강제규. 요새 말로 하면 영화 한 편으로 ‘국민 감독’의 지위에 오른 그는 당시 데뷔작 한 편을 성공적으로 마친 신인 감독이었다. ‘타이타닉’을 3D 영화로 알고 있고(타이타닉은 2012년 3D로 재개봉했다) ‘쉬리’는 송강호의 데뷔작 정도로 기억하는 요즘 관객들 앞에서 웬 고색창연한 이야기? 하실 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 영화 산업에서 ‘쉬리’는 결코 가볍게 처리하고 넘어갈 빛바랜 기록이 아니다. 얌전하게 말하면 ‘쉬리’ 한 편으로 한국 영화는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쉬리’가 없었다면 한국 영화 산업의 현재는 지금의 이 자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시사회 보고 나온 사람들의 공통적인 반응은 “한국 영화 같지 않네.”였다. 총격전 장면은 정말 대단했다. 이전까지 한국 영화는 총격전에 가짜 총이 등장했다. 강제규 감독은 처음으로 미국의 깁슨사에서 대규모로 총기를 대여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총기 대여업체 중 하나인데 한국 영화 제작사社에 대한 신뢰가 없던 시절이라 보험까지 들어야 했다. M16 10정 등 30정 가까이 들여온 건 처음이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건 전체 제작비다. 멜로 영화는 5억 원대, 사이즈가 좀 있는 영화는 10억에서 12억 정도 했다.

‘쉬리’는 그 세 배인 30억 원이었다(줄이고 줄여 최종적으로는 23억 원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투자사인 삼성의 이런 저런 지원을 따져보면 실은 그 이상이다. 첩보 본부 촬영 장소로 사용했던 곳은 삼성 SDS였는데 그걸 세트로 지으려면 돈으로는 환산불가다). 단순계산으로 하면 세 배지만 그걸 그렇게 단순하게 계산하면 곤란하다. 가령 10억이 제작비라면 그 이후부터 초과되는 1억은 초반에 투자한 1억과는 전혀 성격이 다른 부담이다. 그러니까 최소한 다섯 배 이상이란 얘기다. 강제규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이즈를 키워야 질적인 발전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파이를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 영화를 보는 관객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다고 믿는 것이 당시 정서였다. 나는 아니라고 봤다. 영화가 좋아지면 한국 영화를 외면하는 관객도 극장을 찾을 것이고 그러면 파이 자체가 커진다고 믿었다. 증명했다. 영화의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나라 영화는 망한다. 프랑스가 그랬고 일본이, 대만이 그랬다. 산업화가 이루어지면 질적인 수준이 높아지고 다양한 영화가 가능해진다. 머릿속에 있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제작비 때문에 접는다면 얼마나 억울해.” - 강제규 -

영화의 산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나라 영화는 끝이라는 게 강제규 감독의 생각이었다. 그 생각을 한 걸음 더 밀고 나간 게 ‘태극기 휘날리며’다. 시나리오를 토대로 뽑은 예산은 140억 원이었다. 한국에서 100억대 영화가 기획된다는 사실은 영화의 질적인 변화를 의미한다. 영화의 출발은 이랬다. 조감독이 가져온 다큐 한 편에 강제규는 완전히 필이 꽂혔다(본인의 표현을 그대로 쓰자면 쿵~ 하고 뭔가가 울리는).
 

전사자의 유품을 확인하러 간 할머니가 삼각자를 보고 자기 남편이라고 끄덕이는 내용이었는데 강제규 감독이 생각했던 6.25전쟁의 모든 상징이 그 한 편의 다큐에 담겨 있었다. 그렇게 영감을 받아 출발한 게 ‘태극기’의 시작이다. 정말이지 지극히 사적인 욕구다. 영화는 제작비의 40%는 확보해야 출발이 가능하다. 손이 닿을 수 있는 돈은 다 끌어 모았다. 60억까지는 맞췄는데 나머지 80억에 대한 투자는 불확실했다. 게다가 그 시기는 2월이었다. 겨울 장면부터 촬영해야 중공군이 퇴각하는 장면을 찍을 수 있었다. 놓치면 1년 기다리거나 아니면 접어야 한다. 모두가 말릴 때 강제규 감독은 무조건 밀어붙였다. 촬영에 들어갔고 트레일러(짧은 예고편)를 만들어 칸에서 틀었다.
 

칸에서 소식이 왔다. 태극기 상영하는 부스에서 외국 사람이고 한국 사람이고 다 난리인데 박수 치는 사람까지 있었다. 당시 칸의 모든 포커스는 ‘태극기’였다. 가능성을 타진한 쇼 박스가 나머지 제작비를 대기로 제안을 해 왔다.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성사된 게 ‘태극기 휘날리며’다. 강제규 감독은 ‘은행나무 침대’, ‘쉬리’, ‘태극기’로 트렌드를 주도했고 영화의 산업화를 대중의 눈높이를 올려놓았으며 영화를 산업의 단계로 끌어올렸다. 그가 시도했던 모든 것은 기준이 되었다. 그만큼 강제규 감독은 힘들었지만 후배들은 덕분에 그만큼 편했다고 말하면 과다한 존중일까. 인터뷰 중 한 대목으로 답을 대신한다.

“99년의 ‘쉬리’는 그게 99년이었으니까 의미가 있는 거다. ‘태극기’도 마찬가지고. ‘마이 웨이’ 역시 그런 점에서 의미가 있는 영화다. 그러나 항상 시작점에 있다 보니 내게는 기준이 없었다. 여유도 없었고. 기준이 없으면 풍요롭고 다양하게 영화를 만들기 힘들다. 후배들은 조금 편할 거라 생각한다. ‘태극기’가 있었으니까 ‘웰컴 투 동막골’도 나오고 'JSA'도 나올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런 소재와 형식이 관객들에게 먹힐지 다시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소재를 비틀고 용해하고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 내기도 수월하고.” - 강제규 감독 -

‘쉬리’는 지금도 역대 박스오피스 41위에 올라있다. 역대 박스오피스 100위 중 2000년 이전에 개봉한 영화는 ‘쉬리’가 유일하다.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