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과 건국·냉전·6·25 전쟁 혼란기 세계정세 흐름 꿰뚫어

자유경제원은 13일 ‘해방 70년, 광복 67주년’ 기념 특별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는 송복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와 복거일 작가의 기조강연에 이어 Session 1-‘대한민국 건국의 역사적 의미’, Session 2-‘대한민국–시장경제를 택해 부국을 이루다’로 나뉘어 진행됐다.

세션 1은 현진권 자유경제원 원장의 사회로 ‘대한민국 역사’의 저자인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의 ‘건국의 역사적 의의와 현실’이라는 주제 발표에 이어 강규형 명지대학교 기록대학원 교수, 류석춘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원장, 이명희 공주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이한우 조선일보 문화부장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세션 2는 박동운 단국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의 사회로 김학은 연세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의 ‘대한민국-시장경제를 택해 부국을 이루다’는 주제 발표에 이어 김승욱 중앙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 조우석 문화평론가가 토론을 펼쳤다.

자유경제원은 “해방 후 3년 만에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건국은 극심한 좌우 갈등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이념으로 하는 근대국가를 세웠다는 데 가장 큰 의미가 있다”며 “광복 67주년을 기념하여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아래 글은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의 '대한민국의 행운은 시장경제로 방향을 잡은 것'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 자유경제원은 지난 13일 ‘해방 70년, 광복 67주년’ 기념 특별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에서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이 '대한민국의 행운은 시장경제로 방향을 잡은 것'이란 주제로 토론하고 있다.

해방과 더불어 기업인들 등장

대한민국과 시장경제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를 연상케 한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에는 3년 간 미군정이 이어졌고, 이때 자유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형들이 이 땅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우리의 국가가 수립되기 전이었고, 또 일제 36년의 왜곡된 남농북공(南農北工)의 산업구조와 갑작스러운 남북분단과 좌우익의 격돌로 인한 혼란으로 인해 경제가 원활히 작동하기 힘들었다.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고 헌법이 제정되면서 해방과 국토분단으로 인한 혼란과 무질서가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제헌헌법의 경우 명백하게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토대로 한 헌법이라고 하기에는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다수 가미되어 있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개헌을 통해서 수정하여 명실상부한 시장경제 민주주의로 출범하게 된다.

해방 후 우리가 처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각 분야에서 국가를 운영할 인재의 부족이었다. 일본 제국주의는 한국을 하나의 독립된 경제 단위가 아니라 원자재와 식량 공급 기지로 삼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이 땅에서 벌인 악행이 여러 가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했던 일은 인재 양성을 의도적으로 가로막았다는 점이다.

일제 강점기 국내 유일의 대학이었던 경성제국대학에 경제학부가 개설되지 않은 것은 한반도에서 고급 경제 전문가를 키우지 않겠다는 식민당국의 의사표시였다. 일제 시대에 한국인 의사나 변호사는 다수 배출됐지만 상업이나 경제를 전공하여 산업계, 경제계에서 맹활약하는 경제인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 결과 해방 후 우리 사회에는 근대화 된 기업 운영 경험이 있는 기업가나 산업분야의 고급 기술 인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오늘날 대기업이나 그룹, 재벌 소릴 듣는 김연수, 박흥식, 이병철, 김용완, 구인회, 설경동, 전택보, 최태섭, 이정림, 정주영, 정재호, 김성곤, 이양구, 신덕균, 김지태 등 기업가들은 해방과 6·25 전쟁, 시민혁명과 군사쿠데타의 정치적 격변 속에서 생성 소멸됐다.

조선상공회의소는 1946년 5월 19일 창립총회를 거쳐 정식 출범했고, 두 달 후인 1946년 7월 31일에는 한국무역협회가 발족했다. 이처럼 무역관련 협회, 기업관련 협회가 결성되고 기업인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보면 시장경제의 꽃이 이 시기부터 피기 시작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대한민국 건국 당시 경제 여건은 거의 최악의 상태였다. 무엇보다 남농북공의 산업구조 하에서 인위적으로 분단이 되면서 남과 북의 경제가 단절된 데서 오는 혼란이었다. 당시 남한은 인구는 2200만으로 북한의 900만 명보다 압도적 우위였으나 발전설비(발전량)은 남한은 불과 11.5%(4%)인 반면 북한은 88.5%(96%)를 차지했다.

   
▲ 자유경제원이 주최한 ‘해방 70년, 광복 67주년’ 기념 특별토론회.
해방 직후의 난감한 현실

1948년 1월 통계를 보면 남한의 전력소비량 10만㎾ 중 7만 1000㎾를 북한에서 공급하는 전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1948년 5월 10일 제헌의원 선거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이 사전 통보 없이 5월 14일에 북하에 공급되던 전기 공급을 끊어버림으로써 남한 사회는 암흑천지로 변했고, 공장들을 비롯하여 전차 등 교통수단이 올 스톱 상태에 빠졌다.

게다가 남한은 농업이 주산업이었으나 비료가 한 톨도 생산되지 않아 북한 지역의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 생산되는 비료를 공급받아 농사를 지었으나 이것도 끊겼다. 이때부터 남한은 충주비료공장이 정상 가동되기 전까지 매년 미국이 지원하는 원조자금 2억 5000만 달러 중 1억 달러 정도를 비료 도입에 사용해야 하는 난감한 현실에 부딪쳤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일제 식민통치기구인 조선총독부는 1945년 8월 15일 항복 직후 일본인들의 철수 자금 마련 위해 막대한 통화를 시중에 풀었다는 점이다. 국내에 있는 현금이 모자라자 8월 24일 일본에서 비행기로 지폐를 공수하여 일본군 퇴각 비용 및 총독부 관리들 퇴직수당을 지급하는 바람에 엄청난 화폐가 시중에 풀려나갔다. 덕분에 시중에는 인플레가 만연하기 시작했다.

당시 남한의 도매물가지수는 1945년 8월을 100으로 할 때 1950년 12월에는 4980로 무려 물가가 50배나 폭등하는 광란 상태를 연출했다. 이 와중에 자기 토지가 없는 소작인들의 문제가 심각한 갈등요소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1947년 통계를 보면 200만 호 농가호수 가운데 자기 토지를 이용하여 농사를 짓는 자작농은 불과 36만 호(16%)에 불과하고, 지주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 90만 호(42%), 그리고 자소작농 혹은 소자작농이 42%를 차지하고 있었다. 소작료는 매년 수확물의 50~60%에 달해 대다수 소작농들은 빈곤의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유상몰수-유상분배 방식의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소작 관계를 하루아침에 청산했다. 농지개혁으로 지주라는 전근대적 계급이 사라지고 자본가 계급이 이 땅에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한국 사회도 식민지 반봉건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본격 전환했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신생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체계적인 발전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1948년 12월 미국과 한미원조협정(ECA)을 체결하면서부터다. 한국판 마샬 플랜이라 불리는 ECA 협정이 체결되면서 미국으로부터 체계적인 원조가 시작되어 식량, 비료, 석유, 원료, 공업시설, 발전함 2척, 그리고 기술원조가 제공되었다.

미 원조당국은 이러한 원조물자를 기반으로 하여 한국의 각 분야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장기계획 수립을 권고했고, 이 권고에 의해 정부 각 부처는 부처별로 산업부흥 5개년계획, 5개년 물동계획, 농림증산 3개년 계획, 석탄생산 5개년계획, 전력증강계획 등 의미 있는 중장기계획을 수립했다.

이 와중에 시행한 경제안정 15원칙으로 광란의 물가가 차츰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모든 면에서 해방과 국토 분단으로 인한 혼란이 차츰 정리되고, 사회가 안정을 찾아가는 상황에서 6‧25가 발발하여 하루아침에 사회의 모든 기반이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3년여의 전쟁으로 인해 대한민국 국민 200만 명이 죽거나 다쳐 남한 전체 국민의 10%에 해당하는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방직공업과 화학공업의 70%가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또 사회간접자본과 공업시설의 60%, 주택 36%가 파괴돼 전 국민의 36%가 집 없는 설움을 겪어야 했다. 한국은행은 전쟁으로 인한 총 피해액을 30억 달러로 추산했는데, 이것은 전 국민의 2년 치 국민총생산이 파괴 혹은 소멸되었음을 뜻한다.

6년 만에 전후복구 마무리

1953년 7월 휴전 후부터 본격적인 전후복구가 시작되어 1959년 전후복구를 완료했다. 다시 말하면 1959년에 가서야 우리나라 경제와 산업 수준이 전쟁 전, 그러니까 1950년 수준을 회복했다는 뜻이니, 우리는 10년 세월을 전후복구에 빼앗긴 셈이다. 당시의 전후복구와 관련된 주요 상황을 일지식으로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이러한 전후복구 기간 중에 미국은 ‘기술원조’를 통해 한국의 전후복구를 도왔다. 그것은 한국에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시장경제의 착근을 위한 든든한 지원이었다. 기술원조는 원조를 제공받는 나라의 경제 사회 발전에 필요한 인재양성이나 기술습득, 행정능력의 효율성을 높이는 작업, 혹은 그 나라가 필요로 하는 산업기술 인력의 해외 파견 등에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다. 기술원조는 우리 사회 전반에 다양한 영향을 주었고, 특히 인재양성에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의 기술원조 자금으로 이루어진 인재육성 사례는 다음과 같다.

기술원조자금으로 인재육성

▲서울대와 미네소타대학의 공대‧의대‧농대 간 계약 체결
이 계약의 의거하여 서울대와 미네소타대학 간에 교수를 상호 교류하고, 우리 학생들을 미네소타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 교류사업에 700만 달러가 투입되었고, 연구와 관련된 많은 기계와 설비들이 미네소타대학을 통해 도입됐다. 오늘날 국내 박사 중에 미네소타대학 출신이 가장 많은 이유는 이승만 시절 체결된 상호 교류협력 계약의 결과다.
▲피버디사범대학와 연계하여 중고등학교 교육 프로그램 개선작업
▲워싱턴대학과 연세대, 고려대 간 협정으로 경영학과 신설
해방 후엔 화신의 박흥식, 경방의 김연수 정도를 제외하면 경영자다운 경영자가 드물었는데, 연세대와 고려대에 경영학과가 설치됨으로써 수많은 인재들이 국내에서 선진 경영기법을 공부할 수 있게 됐다. 국내의 명문 사학 두 곳에 경영학과가 개설되어 훈련받은 고급 인력들이 배출됨으로써 우리나라 산업사와 기업사에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됐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설립
▲국방부 산하의 국방대학원(현재는 국방대학교로 개칭) 설립
이처럼 기술원조자금으로 수많은 엘리트 인재들을 국비 유학생으로 선발하여 해외에서 공부를 시켜 선진기술과 문물, 제도, 노하우 등을 익혔다. 통계에 의하면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53년부터 1960년까지 교수, 학자, 공무원, 엔지니어 등 2만 명이 국비 유학생으로 해외유학 및 연수 등을 다녀왔고, 장교단 및 하사관단 1만 명이 미국에서 교육을 받고 귀국했다. 박정희 시절의 경제개발계획에 참여한 엘리트들 가운데 절대다수가 이승만 시절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 유학을 가서 공부하고 온 인재들이었다.

당시 한국에 파견된 미국 원조단은 대부분이 엔지니어와 테크노크라트들이었는데, 높은 수준의 안목과 역량을 가진 인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한국 관리들에게 “하루빨리 자립경제로 나가려면 수출을 적극 장려하고, 외국 회사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하라”고 조언했다. 정부가 1959년에 외자도입법을 제정 공포한 것도 미국 전문가들의 조언 덕분이다.

이런 노력들이 1960년대에 수출드라이브 정책으로 꽃을 피웠고, 걸프 오일 등 석유회사, 영남화학을 비롯한 비료회사 등 외국기업이 한국에 진출하는 발판이 됐다. 미국에서 파견 나온 인재들에게 우리나라 관리와 기술자, 기업가들이 교육을 받고 계몽도 당하면서 산업화, 근대화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40여 년을 세계 최고 최대의 산업대국인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고급 교육을 받은 엘리트였다. 그는 선진국 생활을 통해 인재의 중요성, 산업화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고, 산업화를 달성하려면 기본이 무엇인지, 어떤 일부터 해야 하는지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해방과 건국, 글로벌 차원의 냉전 개시, 6·25 전쟁이라는 혼란기에 세계정세의 흐름을 정확히 꿰뚫어 보면서 미국 중심의 해양 동맹에 편승하여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라는 국가의 진로를 제시한 이승만을 지도자로 만난 것은 우리에겐 행운이었다. 같은 시기, 자주라는 이름으로 폐쇄경제, 쇄국정책을 바탕으로 한 공산주의 체제를 도입한 북한은 오늘날 세계에서 실패국가의 모범으로 전락한 것과 비교해보면 명쾌한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김용삼 미래한국 편집장·동원대 특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