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조차 어린애 취급…좌우보다 상하 세대갈등의 사회로
   
▲ 이원우 기자

당초 의도는 ‘국민 간 화합’이었던 8월 15일 광복절 콘서트 ‘나는 대한민국’은 결과적으로 갈등과 분란의 도화선이 되고 말았다. 김연아 선수가 박근혜 대통령의 손을 거부했다는 논란 때문이다. SNS에서는 일대 난리가 났었지만 다행히 논란은 조금씩 잦아드는 모양새다.

이 문제로 글을 쓰게 된 건 한 가지 미심쩍은 점 때문이다. 논란이 이렇게까지 커진 데에는 김연아 선수의 ‘나이’도 한 몫을 차지한 것은 아닐까? 쉽게 말해 아직 20대인 김연아가 국가의 상징인 박근혜 대통령 옆에서 좀 더 사근사근하지 않았던 게 ‘괘씸함’의 감정을 촉발한 부분은 없었을까 싶었던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문제는 세대론(世代論)으로도 해석할 여지가 생기게 된다. 맹렬한 속도로 고령사회에 근접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갈등 양상을 미리 보여준 해프닝인지도 모른다는 의미다.

역동성 잃어버린 대한민국, 30대조차 ‘어린 애’

한 인간이 집단 내에서 점하게 되는 지위는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농촌 지역에선 60대가 청년회장을 맡는 일이 드물지 않다. 70대 노인이 돼도 90대의 부모 앞에서는 그저 아이일 뿐인 것이다. 바깥에 나갈 때 “차 조심 길조심 해야 한다”는 말을 들어야 한다. 대한민국의 상황이 이와 비슷하다.

과거엔 어땠을까? 1961년 5‧16에 가담했을 당시 김종필의 나이는 36세였다. 김대중은 20대 중반에 목포해운회사 사장에 취임했고 30대 중반에는 ‘사상계’에 글을 기고하며 독자적인 정계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명박은 37세에 현대건설 사장이 됐다. 노무현은 30대 중반 인권변호사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자, 여기에서 질문. 그렇다면 2015년의 대한민국에서 30대 중반은 어떤 나이일까? 정답은 간단하다. ‘그냥 청년’이다. 그럼 20대는? 더 간단하다. 그냥 ‘애’다. 50년 전에는 구국의 결단을 내리고 조국의 향방을 결정짓기도 했던 20~30대가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는 그저 애 취급을 받는다. 예전 같았으면 기성세대 대접을 받았을 39세가 지금은 ‘청년’ 카테고리에 분류된다. 어른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질적 측면에서도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미 공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그들 앞에서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세상을 배워가는 건 필요하지만, 어떤 때는 정신이 아득해지기도 한다. 앞으로 30년을 겸손만 하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기 때문이다. 훌륭하신 선배들은 30년 후에도 얼마든지 존재할 것이다. 그들의 연륜과 경험은 더욱 깊어져 있을 텐데 지금 하지 못하는 도전을 그때라고 할 수 있을까?

요즘 2030들에 대한 분석에서 자주 들리는 얘기는 “보수화(保守化) 됐다”는 주장이다. 현재의 20대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적인 세대인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정치적으로 보수화됐다고 판단하는 건 너무 단선적인 해석이다.

어쩌면 보수화처럼 보이는 이 현상은 ‘위축’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상적‧정신적인 독립을 하지 못한 상황이라 의견 개진에도 애로가 있다는 얘기다. ‘나 같은 게 감히 의견을 말해도 될까. 나보다 잘난 사람은 항상 있는데.’ 청년들이 정신적인 독립을 하려야 할 수 없는 상황은 한국 사회의 담론구조를 완전히 새롭게 재편해 놓을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갈등은 좌우보단 ‘상하’?

얼마 전 86세대에 대한 좌담회에 참석한 일이 있다. 청년보수, 청년진보, 기성세대 보수, 기성세대 진보로 구성된 4인 중 한 사람으로 발언하는 과정에서 나는 가벼운 충격을 받았다. 좌우의 관점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기성세대 패널의 주장에 동의하는 부분이 많이 있었던 한편으로, 좌우가 다를지언정 나이대가 같은 패널에게서 더 많은 ‘공감대’를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두 2030이 같은 현상에 대해 다른 진단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불과 10년 전만 해도 처해 있는 상황, 하고 있는 생각이 비슷했을 확률이 높다. 온 국민이 네이버로 인터넷을 시작하고 비슷비슷한 TV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이 나라에서 30년을 살았는데 달라 봐야 뭐가 그렇게 다를 수 있겠는가.

2015년의 대한민국은 좌우 갈등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어 보인다. 사실 아무리 소리 높여 싸워도 이 논쟁구도가 근시일 내 종식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신 이 좌우갈등은 ‘세대 간 상하갈등’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인다.

대한민국의 고도 압축성장은 과거엔 ‘한강의 기적’이었지만 현재에는 세대 간 단절의 한 요인이 된다. 대한민국이 고속으로 성장하던 시절의 논법을 현재의 청년들에게 ‘노하우’로 전수해봐야 현실 적용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서로 간의 이질감은 더욱 커진다.

   
▲ 청년들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것도 말이 좋을 뿐이다. 결국 청년들을 할당된 자리나 받아가는 수동적 존재로 보는 잠재의식의 표출에 불과하다. 심지어 김연아조차 수틀리면 ‘어린 애’의 하나로 포섭돼 장유유서의 논리구조 속에 갇힐 가능성을 우리는 이번에 목도했다. /사진=채널A 방송화면 캡쳐

고도성장 시기의 대기업들은 문어발처럼 계열사를 확장했지만 지금은 있던 계열사를 합쳐서 2개이던 일자리도 함께 M&A 되는 판국이다.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싶으면 뭐라도 해서 경험을 쌓으라고 말은 쉽지만, 경험 쌓으려고 지원한 인턴십 면접에서 “지금까지 무슨 경험을 쌓아왔냐”는 질문을 받는 게 역동성을 상실한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청년들의 ‘정신적 독립’이 필요하다

청년세대는 수적으로 많지도 않을뿐더러 열심히 노력해도 성과가 잘 나오지 않는 느낌을 받는 기묘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미 현재의 20대들은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취업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형이상학적인 것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현실적인 현재의 청년들은 어쩌면 386세대의 반대말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런 현실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정치권은 이미 냄새를 맡고 청년들의 표를 얻기 위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런데도 여야가 전부 실패하고 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일단 내가 공천 받고 남는 건 청년 몫으로’ 뭐 이런 식이다.

청년들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것도 말이 좋을 뿐이다. 결국 청년들을 할당된 자리나 받아가는 수동적 존재로 보는 잠재의식의 표출에 불과하다. 심지어 김연아조차 수틀리면 ‘어린 애’의 하나로 포섭돼 장유유서의 논리구조 속에 갇힐 가능성을 우리는 이번에 목도했다.

올해 8월 15일엔 유독 광복절과 독립(獨立)의 상관관계를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청년들의 정신적 독립에 대한 담론이야말로 지금 정말로 필요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전자는 과거에 관한 것이지만 후자는 미래에 관한 문제이므로.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