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 외교전략 일본 만행 폭로…5억 세계 기독교인 감동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이라는 주제로 연속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 제6차 토론회는 26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이승만은 항일투쟁을 했나?”라는 주제로 류석춘 원장(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의 발제로 진행됐다.

이날 토론자인 권혁철 소장(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은 “이승만은 일찍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소수의 일본군에게 순식간에 대패를 당하는 것과 함께 청일전쟁을 목격하면서 세계 대세와 조선의 현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즉 서양 통상 세력의 동진을 포함한 국제정세와 당시 조선이 처한 국내외적인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바탕을 둔 독립운동이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그는 혈기에 찬 무장투쟁은 당사자 본인은 물론이고 당시의 정세에서는 오히려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으며, 그 대신 세계의 보편적 이성에 호소하는 외교전략이 주효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자유경제원은 5월 13일을 시작으로 9월 10일까지 7차에 걸쳐 토론회를 한 후 9월 23일에 종합토론회를 진행한다. 자유경제원은 우남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오늘에 기여한 건국대통령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한 공은 전혀 무시된 채, 일부의 왜곡과 거짓 선동에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으므로 대표적으로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에 대해 7인의 전문가가 나서 정면 반박하고 진실을 밝히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아래 글은 권혁철 소장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
1. 이승만은 일찍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소수의 일본군에게 순식간에 대패를 당하는 것과 함께 청일전쟁을 목격하면서 세계 대세와 조선의 현실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즉 서양 통상 세력의 동진을 포함한 국제정세와 당시 조선이 처한 국내외적인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바탕을 둔 독립운동이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그는 혈기에 찬 무장투쟁은 당사자 본인은 물론이고 당시의 정세에서는 오히려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으며, 그 대신 세계의 보편적 이성에 호소하는 외교전략이 주효할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감옥에 갇힌 이승만이 27세에 쓴 다음과 같은 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연전에 혹한 말로 인연하여 온 세상이 다 믿고 따라가다가 급기 일패도지 하였으니......슬프다, 세상에 어두움이 이같이 심하뇨.” “외국인을 몰아낸다, 민요를 일으킨다 하는 것이 다 원기는 있고도 동서를 몰라 속히 변통하기를 생각하다가도 심한 화를 당한 연유라. 마땅히 문견이 있어 이러하면 되겠고 저리하면 아니 될 줄을 알아야 하겠다.”(제국신문, 1902년 9월 4일 & 10월 6일)

   
▲ 우남 이승만의 뛰어난 식견과 지도력은 대한민국의 탄생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우남이 약소 민족들에겐 더할 나위 없이 야멸찬 국제 질서의 맥락에서 힘이 약한 우리 민족이 독립하고 생존할 수 있는 전략을 찾은 덕분에 대한민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 /사진=연합뉴스
청국의 의화단에 대한 평가도 이와 다르지 않다. “최근에 청국에 의화단이라는 것이 생겨 동학과 같이 난리를 일으켜 북경을 침범하여 각국 공/영사를 살해하고 기독교 회당을 불 지르고 외국인을 몰아낸다고 하여 각국의 보호병과 여러 번 싸웠다. 천하가 군사를 일으켜 청국으로 들어가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필경 천하에 큰 난리를 만들고, 자기 나라를 망하게 하고 끝내는 자기들도 다 죽을 것이다.”(청일전 기)

외교방책 선호와 무장투쟁에 대한 이승만의 부정적 평가는 청일전쟁 패배 후에도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청국에 대해 기술한 다음의 글에서 확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 “청국이 1984년에 자기들보다 국력이 약한 일본에게 여지없이 패하고도 오늘날까지 목숨을 부지하는 이유는 자기들의 힘이 넉넉해서가 아니라 각국이 서로 세력을 다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형편을 우리가 자세히 알아서 기회를 잃지 말고 외교와 내치만 잘하면 남들이 우리를 넘겨다보는 행위가 다 막힐 것이다. 그럼에도 천하를 반대하여 여러 나라가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니 나라 하나 망하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거니와 동서양에 큰 난리를 자기들 손으로 만들어 놓으니 어찌 애달프지 않겠는가?”(청일전기)

2. 세계 보편적 이성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이승만이 택한 것은 종교, 그 중에서도 기독교였다. 다른 독립운동가들(예: 안창호)은 선교사들을 크게 인정하지 않고 비판했던데 반해 이승만은 선교사들의 역할과 5억 기독교인의 잠재력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식민지가 된 한국에서 선교사들은 유일한 대외창구였을 뿐만 아니라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3.1운동 탄압도 기독교 탄압으로 몰고 감으로써 전 세계 기독교인의 잠재력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유사 이래 최초의 무저항 혁명이며, 더욱 널리 알려진 인도의 간디 운동보다 앞선, 1919년의 평화적이고 비폭력적인 3월 혁명을 한국 사람들이 전개하였을 때, 한국인들은 세계 기독교도 전체의 압도적인 동정을 받았다. 한국 기독교인과 교회에 대하여 행한 야만적이고 잔악한 일본의 행위에 관한 비참한 이야기는 온 세계 문명국 시민들의 분노를 격동시켰다.”(Japan Inside Out) 이승만은 일본의 악정을 모두 기독교 탄압과 결부시켰으며, 이로써 일본의 식민정책을 서구 식민모국의 그것과 차별시켰다. 더구나 일본은 기독교가 아닌 신도(神道)를 따르고 있다.

일본의 기독교 탄압은 전 세계 5억 기독교인에게 커다란 명분이 된다고 그는 판단했다. “어떻게 보면 서양의 역사 자체가 <기독교 박해-기독교 공인>의 역사이다. 이 과정에서 핍박받던 민족이 자유를 찾았다. 일본이 한국 기독교를 말살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한다는 것은 역사를 역행하는 것이고 인류 대의에 어긋나며 신앙의 자유에 반하는 것으로 더욱이 기독교 정신에 거슬리는 일이었다. 이런 점에서 신도(神道)는 일본 의 식민지 정책의 아킬레스건이다. 이승만은....일본의 한국 교회 박해를 빠짐없이 강조한다. 기독교는 이승만에게 중요한 독립운동 수단이 되었다. 그가 비폭력 외교방략을 택한 배경과도 무관치 않다.”(김학은, 이승만의 정치, 경제사상, pp.80-81). /권혁철 자유경제원 자유기업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