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봉건·반제국·반전체주의 항일 독립투쟁으로 보편 가치 확립

자유경제원(원장 현진권)은 [우남 이승만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 :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과 진실]이라는 주제로 연속토론회를 개최하고 있다. 제6차 토론회는 26일 자유경제원 리버티홀에서 “이승만은 항일투쟁을 했나?”라는 주제로 류석춘 원장(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의 발제로 진행됐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김광동 원장(나라정책연구원)은 “일본에 대항한 모든 투쟁이 의의가 있거나 정당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중심으로 하면서 독립의 방향과 내용이 근대문명을 지향하며, 자유와 민주라는 보편가치를 확립시키고자 하는 방향에 입각하여 봉건주의를 극복하고, 제국주의(전체주의)에 대항하는 것일 때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승만의 항일투쟁은 다른 항일운동과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고, 가장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진 항일투쟁이었다. 이승만의 항일투쟁은 일본 패망과 독립국가를 만들어내는데 가장 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 기여한 투쟁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근대문명과 자유민주 보편가치를 지향하는 미국 등 연합국 체제가 일본과 전쟁에 나서도록 하고, 일본 패망에 따른 전후질서에서 한국의 독립을 모색했던 이승만의 항일독립투쟁은 가장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것으로 민족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한편 자유경제원은 5월 13일을 시작으로 9월 10일까지 7차에 걸쳐 토론회를 한 후 9월 23일에 종합토론회를 진행한다. 자유경제원은 우남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오늘에 기여한 건국대통령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채택한 공은 전혀 무시된 채, 일부의 왜곡과 거짓 선동에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으므로 대표적으로 이승만에 드리워진 7가지 누명에 대해 7인의 전문가가 나서 정면 반박하고 진실을 밝히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핵심이라고 밝혔다. 아래 글은 김광동 원장의 토론문 전문이다. [편집자 주]

   
▲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
I. 일본에 대항한 모든 투쟁이 의의가 있거나 정당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중심으로 하면서 독립의 방향과 내용이 근대문명을 지향하며, 자유와 민주라는 보편가치를 확립시키고자 하는 방향에 입각하여 봉건주의를 극복하고, 제국주의(전체주의)에 대항하는 것일 때 역사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승만의 항일투쟁은 다른 항일운동과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고, 가장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진 항일투쟁이었다.

이승만의 항일투쟁은 근대적 보편가치를 구현시킬 목적에 따른 독립운동의 연장선이 있었고, 그것은 a. 구질서적 '조선'을 기반으로 한 봉건 왕조체제를 회복하기 위한 항일이 아니었고, b. 소련(러시아)과 중국 공산당의 공산체제라는 전체주의이자 제국주의의 또 다른 속국(위성국가)를 만들기 위한 항일과는 전혀 달리, 한반도 우리 민족이 근대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자유민주 가치를 지향하며, 번영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방향에 입각한 '반봉건, 반제국, 반전체주의' 항일 독립투쟁이었다.

II. 이승만의 항일투쟁은 일본 패망과 대한의 독립국을 만들어내는데 가장 현실적이고 실질적으로 기여한 투쟁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일본은 1895, 1931, 1937년 거대한 중국을 연이어 패배시키고, 1905 러시아를 패배시켰으며, 1941-5년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과 정면으로 전쟁을 펼치던 나라였다.

   
▲ 이승만의 항일투쟁은 다른 항일운동과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고, 가장 정통성과 정당성을 가진 항일투쟁이었다. /사진=연합뉴스
일본 군국체제는 1500년대 부터 시작된 부분적 근대체제의 연장선에서 1940년대 700만 명의 군 병력을 동원했고, 180만 명을 사망시키는 전쟁동원 및 수행 체제를 만들어냈다. 일본은 110개 사(여)단과 260만 명 상비 병력은 물론 8개 항모전단의 운용 및 2만대가 넘는 항공기 및 전투기를 운영하며 아시아태평양의 거대 군국주의 체제였다.

1921년 이후 우리 민족의 역량으로는 정규군 중대급 이상의 전투를 펼칠 수 없는 현실적 상황 하에서 일 본 군국체제를 패망시키는 역량은 제2차 세계대전이라 불리는 세계사적 전쟁, 특히 원자폭탄 투하를 포함한 태평양전쟁의 승리에 의해서 가능했다.

그런 면에서 근대문명과 자유민주 보편가치를 지향하는 미국 등 연합국 체제가 일본과 전쟁에 나서도록 하고, 일본 패망에 따른 전후질서에서 한국의 독립을 모색했던 이승만의 항일독립투쟁은 가장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것으로 민족사적 의의가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독립을 만드는데 기여한 세계 질서체제인 카이로선언, 테헤란선언, 얄타회담(1945. 3) 및 포츠담 회담(1945. 7)을 통해 실제 구현되었고, 결과적으로 입증된 것이기도 하다. 또한, 스탈린의 공산제국 확대 전략의 일환이자 한반도 전역에 또 다른 공산 식민체제를 만들고자 했던 전후질서에 맞서, 신탁통치 반대와 6.25 침략전쟁 대응을 통해 대한민국을 만들어 세운 것으로도 확인된다.

스탈린은 중국의 가오강(高岡) 소비에트정부를 기반으로 중국본토를 공산화하는데 성공했지만, 한반도에서는 김일성 소비에트정부를 발판으로 한반도 전역을 공산주의로 끌고 들어가지는 못하게 되었는 바, 그것은 반제국주의, 반전체주의에 맞선 자유민주적 문명독립 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이승만의 혜안과 지도력의 결과다.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