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79)-자연법과 절대왕권의 기초를 세우다
장 보댕(1588~1679)의 <국가론>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정치사상에 관한 고전 읽기의 가장 큰 고충 중의 하나는, 기술된 정치사상의 내용 그 자체보다, 그러한 사상을 잉태시킨 당대의 정치사회상과 시대정신, 사상가의 인생역정을 추적하고 파악하는 일이다. 아울러 사상의 배경이 된 역사문화적 맥락을 다양한 각도에서 파악하는 것도 긴요하다. 따라서 당대 사회상에 대한 이해 부족은 저자 사상의 몰이해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정치사상의 핵심 주장은 결국 당대의 현실문제에 대한 저자의 체험적 성찰과 해법이 담겨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 보댕(Jean Bodin, 1529~1596)은 1576년 <국가론Les six livers de la Rѐ́́publique>(직역하면 '국가에 관한 6권의 책')를 출간했다. 그의 <국가론>은 근대 주권론을 확립함으로써 토마스 홉스와 장 자크 루소, 존 로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미래의 왕권신수설(divine right of kings)을 기반으로 한 절대왕정의 예찬자들에게 청사진을 준 것으로 낙인 찍혀 있기도 하다.

   
▲ 프랑스의 장 보댕

먼저 장 보댕의 국가론이 탄생한 당시의 시대상황을 살펴보자. 16세기 중반의 프랑스는 로마가톨릭 세력과 신교도(위그노, Huguenots) 세력 간의 갈등과 반목이 극심했다. 이로 인해 고조된 사회적 긴장은 급기야 내전으로 증폭되어 국가의 존립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종교개혁의 광풍, 이른바 8차례에 걸친 위그노 전쟁(Huguenots Wars, 1562~1598)이 이어졌다. 전통 가톨릭을 옹호한 국왕 및 귀족의 탄압에 대항해 신교도를 옹호한 칼뱅파 남부 지방 귀족과 장인들이 서로를 이단시하며 폭력으로 맞서는 형국이었다.

이런 갈등과 반목은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던 샤를 9세 시기에 더욱 극성이었다. 결국 비극적 사건이 발생한다. 샤를 9세의 통치를 섭정하면서 프랑스의 실권을 누리던 샤를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s)에 의해 주도된 ‘성 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의 축제일의 대학살’ 사건이 그것이다.

가톨릭 귀족 세력을 부추겨 신교도 3천여 명을 참혹하게 학살한 대참사였다. 인류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끔직한 대학살극의 서막을 연 사건이다. 보댕도 종교적 관용을 주장하며 가톨릭에 대항하다 그 와중에 목숨을 잃을 뻔했던 만큼, 암담한 현실을 타개할 새로운 정치사상에 대한 그의 고민도 깊어졌던 듯하다.

   
▲ 성 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의 축제일의 대학살
36년간 종교 전쟁의 난폭한 광기에 국토는 황폐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처참하게 피폐해졌다. 이후 위그노(신교도)의 지도자격인 나바르(프랑스와 에스파냐 접경지역에 있던 왕국)의 왕 엔리케 3세가 1589년에 앙리 4세로 프랑스 왕위에 오르면서 사태 수습의 전기가 된다. 그는 종교 전쟁의 혼란한 사태를 종식시키고자 1592년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이어 1598년에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낭트칙령(The Edict of Nantes)을 발표하여 위그노 전쟁을 종결시킨다.

   
▲ 위그노 전쟁을 종결한 앙리 4세

종교 전쟁의 종결은 앙리 4세의 개종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국왕이 프랑스 국가의 존립을 위해 개인의 종교적 양심을 희생함으로써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랑과 관용을 역설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기독교인 사이에서도 이를 현실에서 실현하는 일은 그토록 힘이 들었던 것이다.

장 보댕의 <국가론>은 이런 현실의 격변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려한 시대적 필요의 산물로 볼 수 있다. 종교적 이해와 세속적 권력의 쟁투로 분열되고 혼란한 사회의 질서를 바로세우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었다. 이는 곧 국가의 통치권이 강력하게 확립되기를 희구하던 사회적 열망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와 열망에 부응하는 지성적 반응이 어떤 방식으로든 표출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종교 전쟁의 잔인한 파괴와 살육을 경험한 지성인들은 종교적 관용을 강력하게 옹호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는 종교 권력 대신 국가 권력이 사회 질서의 수호자가 되어주길 갈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낭트칙령
이런 사회문화적 국면이 국가의 본질에 대한 그의 성찰과 현실적인 정치의 대안사상을 재촉했을 듯하다. 장 보댕은 <국가론>는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는 <국가론>의 첫머리에서부터 “국가란 다수의 가족과 그들의 공유물로 이루어진, 주권에 의한 정당한 통치(droit gouvernement)이다”라고 정의한다. 그는 <국가론>에서 국가의 개념 정의를 명확히 하고 국가가 달성해야 할 목적과 수단을 정립하고자 했다.

그는 국가를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모인 인간들의 사회”라고 본 고대인들의 정의에 동의하지 않았다. 행복 추구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존립이고, 특히 “가족, 주권, 국가의 공공선”이 긴요하다고 보았다. 특히 플라톤이나 토머스 모어가 상정하는 이상적 국가를 “현실성을 결여한 사변적 개념”이라고 논박하고, ‘행복하게’보다 ‘정당하게’를 중시했다.

그는 자연과 인간, 신성한 것들에 대해 관조하는 지복한 삶이 개인이 추구하는 행복이라는 점과 개인의 행복과 국가의 행복이 일치해야 한다는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정의의 실현이나 백성들에 대한 보호, 생필품이나 식량문제와 같은 일상적 활동을 방기한다면 국가의 질서는 수립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덕의 실천을 최고의 선으로 보고, 영혼을 관조하는 삶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장 보댕은 백성의 삶을 유지하고 보호하기 위해 필수품을 공급하는 것과 같은 가장 기본적인 일들이 먼저 행해져야 한다고 보았다. 보댕은 그런 과정에서 도덕과 이성이 지향되며, 국가가 그 목적을 달성해내는 만큼 백성의 행복도 따라서 증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보댕은 개인들의 행복을 담보하는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서 훌륭한 질서를 갖춘 국가가 절실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결국 그는 가족의 집합체, 즉 사회의 행복은 확고한 주권에 의한 국가의 공공선의 실현에서 찾아질 수 있다고 강조함으로써 철저한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보댕은 사회 질서의 회복이 없이 개개인의 행복이 보장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런 인식은 처참한 역사적 경험에 의해 시대적으로 공유될 수 있는 생각이었다. 프랑스는 영국과의 백년전쟁(1337년~1453년)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위그노 전쟁으로 비참한 상황을 체험했다.

수십 년 동안의 전쟁으로 기초적인 국가의 권능과 기능이 무너져버리고, 백성들의 일상은 갈기갈기 찢겼다. 종교적 광기는 백성들 간에 서로를 이단으로 몰아 처참한 살인극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댕이 강력한 주권을 갖춘 국가의 ‘정당한 통치’를 염원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장 보댕이 국가의 주권에 대한 논의에서 정치적 이상론을 배격하고 냉정한 현실론을 전개한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그는 주권이란 “국가의 절대적이며 영구적인 권력”이라고 정의했다. 그에게 주권은 절대성과 영속성을 동시에 갖춘 권력이라야만 하고, 주권자는 그러한 주권을 가진 자라야만 한다. 보댕은 그러한 주권자만이 무정부적 혼란을 극복하고 사회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 주체가 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리라.

보댕의 이러한 관점으로 본다면, 80년간 독재관직을 얻었던 로마의 술라나, 종신독재관직을 맡았던 카이사르도 절대적 주권자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을까? 자칫 그렇게 생각할 수 여지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보댕의 정치철학을 곡해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보댕의 철학적 사유의 특징이 제대로 드러난다.

보댕은 위임의 기간이 끝나면 소멸되거나, 평민회의인 트리부스회의의 거부권에 영향을 받던 술라나 카이사르는 단지 독재적 대리인일 뿐 원초적인 절대적 권력을 가진 주권자가 아니라고 보았다. 일정기간 동안 또는 영구적으로 타인의 권력을 행사할 때 그 권력의 행사자는 결코 주권자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국가의 목적인 ‘정당한 통치’를 위해 주권자는 국가라는 공적인 인격의 대변자여야 한다. 그는 “한 군주에게 주어진 조건적이며 의무를 수반하는 주권은 주권이 아니며, 절대 권력도 아니다”라며, 주권자인 군주를 신 이외에는 어떠한 책임을 지지 않는 절대적 명령권을 가진 존재로 규정한다. 즉 주권군주는 자신이 제정한 법에 종속되지 않으며, 오직 신법과 자연법에만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왕권신수설의 신봉자들이 주장하는 '신성한 왕권(divine kingship)'의 존립 근거로 차용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보댕은 주권 군주는 자신의 법이건, 선왕의 법이건 간에 법으로부터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정당하고 합리적인 약속만을 이행하며, 자신이 수호하기로 약속하고 맹세한 법의 정당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경우 백성들의 동의 없이 이를 위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보댕이 보는 주권 군주는 모든 현실법으로부터 초월적 존재가 된다. 왜 그래야만 된다는 것일까? 보댕은 주권자는 신법과 자연법에만 복종해야 하므로 결코 타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주권자는 필요한 경우 법을 제정하거나, 불필요한 법을 폐지, 또는 무효화하거나, 다른 법으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주권 군주가 만약에 법에 종속되거나 또는 누군가의 명령을 받는 위치에 있어서는 이 같은 일을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는 주권군주가 국가의 올바른 통치를 위해서 법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선장이 배를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서 키를 장악하고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는 얘기다. 이런 원리는 귀족정 국가의 영주에게도, 민주정 국가의 인민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보았다.

보댕은 어떤 정체이든 주권자에게 절대적 권력이 주어질 때만 정당한 통치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결국 주권 분할의 불가능성을 신봉한 그의 인식 속에 혼합정체나 권력의 분할에 의한 대의제적 구조는 용인될 수 없었던 듯하다.

하지만 주권군주가 스스로 정한 현실법 위에 군림한다면, 그러한 군주가 덕성을 잃어버리고 폭압과 횡포를 자행할 경우 어떻게 제어할 수 있을까? 보댕은 이에 대한 담보를 자연법에서 찾는다. 법을 제정하는 것은 군주이지만, 그 법의 근원은 자연법에 근거하는 것이므로 자연의 도리인 자연법의 구속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초월적인 것 같은 군주도 자연법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다.

나아가 군주가 한 “정당한 계약과 약속은 맹세와 관계없이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주권군주가 법에 구속되지 않지만 약속의 이행은 도덕적 규범에 따르는 것이고, 도덕적 규범의 뿌리에는 신법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보댕이 그린 주권군주의 모습은 실정법에 구애받지 않고, 그 누구로부터도 명령을 받지 않는 초월적 인격체이다. 하지만 자연적 도리와 도덕적 규범에 의해 자기 규율을 받는 제한된 인격체인 셈이다. 주권 군주의 이원적 성격 중 전자는 ‘국가’라는 법제적 총체의 대변자로서의 공적 인격이고, 후자는 국가의 주권을 행사하는 사적 인격인 것이다. 군주로부터 초월적 존재로서의 <국가>의 개념을 발굴해 낸 장 보댕의 이러한 사유의 가치는 실로 의미 깊다.

그러나 보댕이 <국가론>에서 제시한 국가 주권의 설계도는 당시 어느 나라에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성격을 띤 것은 아니었다. 당시 영국은 대헌장(Magna Carta, 1215)의 정신에 따라 군주의 권력을 분할하고 실질적 입법권을 의회에 양도하여 분권적 국가통치체제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다.

보댕의 주장은 영국의 정치적 개혁의 방향과 달랐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의 시대적 환경에는 보다 적합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는 지방적 분화와 귀족의 권력 분점이 오랫동안 진행되었다. 이런 토대 위에 사회 계층 간, 종교 집단 간 반목과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러한 사회 분열은 급기야 36년간의 비참한 종교전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혼란과 무질서를 일소하고 국가의 권위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댕의 <국가론>은 중앙집권적 왕권의 강화에 대한 이론적 해법을 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프랑스와 영국의 정치체계 및 문화의 차이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영국의 지방분권적 체제와 프랑스의 중앙집권적 체제의 특징이 그렇다. 이런 프랑스의 정치체제의 특질에 보댕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아무튼 보댕의 주권 개념이 당대의 희구와 현실 정치 구도를 적합하게 그려낸 것일 수는 있겠다. 아니면 거꾸로 그의 강력한 국가 주권 개념이 프랑스적 현실 구도의 고착과 계승에 기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장 보댕이 주장한 주권 이론은 그가 원하든 원치 않았든 간에 프랑스 역사에서 200여년 이상 절대왕정을 구가한 부르봉 왕조(House of Bourbon)를 열었던 앙리 4세에게 더 없이 반가운 정치사상으로 차용되었다(후에 ‘태양왕’으로 불리었던 루이 14세, 프랑스 혁명으로 1793년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루이 16세가 모두 부르봉 왕조에 속한다).

보댕의 <국가론>는 절대 왕권을 옹호하고자 하는 많은 정치가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왕리 4세의 법률 자문가 베로아는 <왕권론>(1587)을 써서 앙리 4세의 왕권강화에 기여했다. 영국의 제임스 1세는 <자유로운 군주국의 진정한 법>(1598)이라는 논문에서, 왕은 지상에서 신의 대리이고 왕권에는 제한이 없다고 주장하며 왕권신수설을 창도했다.

또 로버트 필머는 <가부장권론>(1642)에서 최초의 가부장 아담의 신권을 왕이 전수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들의 이론적 응용은 각각의 정치사회상에 대한 조응으로서 자기정당화를 위해 윤색된 측면도 있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이 장 보댕의 정치사상의 영향과 전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정한 거리를 둘 필요는 있을 것이다.

어쨌든 보댕이 절대주의(absolutism)의 사상적 계보의 시원임은 틀림없다. 보댕은 전통적 봉건군주의 통치권력 속에 혼재되어 모호했던 <국가의 주권>을 캐어내고 분리시켜 그 실체의 속성을 규정하고 정립했다. 이로써 초기 근대(early modern) 국가의 주권 이론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결국 보댕은 교황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 신학의 체계 속에 종속되었던 국왕을 자연법의 영역으로 한 발짝 벗어나오게 했다. 이런 차원에서 70여년 후에 토마스 홉스가 신과 완전히 결별된 사회계약의 결과로서의 ‘인공 인간(artificial man)’인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창조할 수 있도록 예비했다고 볼 수 있다.

   
▲ <리바이어던>(1651년) 초판 속표지
이런 점에서 보댕의 주권사상은 근대성(modernity)의 분기를 이룬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 보댕의 정치사상과 학문적 성취는 토마스 홉스에 비해 많이 가려져 있고, 저평가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장 보댕의 다양한 저술의 번역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도 아쉽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추천도서: 『국가론』, 장 보댕 지음, 임승휘 옮김, 책세상(2005), 20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