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문서]북에 NPT 가입 권유 러시아, 93년 탈퇴선언에 반대
지금 北핵보유국 인정 시사 발언·유엔 제재감시 활동 종료시켜
[미디어펜=김소정 기자]북한이 1993년 3월 12일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자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중심으로 발빠르게 움직였다. 4월 1일 미국은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영국, 러시아와 함께 북한의 NPT 탈퇴 철회를 촉구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생산된지 30년이 지나 비밀해제 돼 외교부가 29일 공개한 1992~1993년 외교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북한의 NPT 탈퇴를 막기 위해 북미 간 직접 접촉을 추진하고, 남북대화를 독려했다. 또 중국의 결정적인 역할을 촉구했다. 중국은 이 문제를 안보리에서 토의하는데 반대했다가 나중에 동의했다.

주베이징 미국대사관측이 4월 4일 우다웨 당시 아주국 부국장을 접촉한 이후에야 중국측은 김일성 생일(4월 15일) 계기 북한에 고위급사절단을 파견해 이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겠다고 시사했다. 

이처럼 30년 전에도 북핵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과 미국이 협력하면서 중국에 역할을 촉구하는 구도가 지금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 외교문서를 통해 나타났다. 이는 북핵 문제가 국제정세에 따라 수면 위로 부각되거나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뿐 북한의 핵개발 의지는 변함없이 유지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상임이사국간 협의가 진척되면서 4월 8일 안보리 의장성명을 채택했다. 성명엔 북한 핵 문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NPT 준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1992년 2월 발표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지지했다. 또 북한 핵검증 문제 해결을 위해 IAEA가 북한과 협의를 계속할 것을 권장했다.  

또 안보리는 5월 11일 북핵 문제에 관한 결의 제825호를 채택했다. 북한에 대해 NPT 탈퇴 결정 재고 및 IAEA 특별사찰 수락을 촉구하고, 유엔 회원국에 대해 북한에 권유하는 노력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결의에 반대하는 국가는 없으나 중국과 파키스탄 2국가가 기권했다.

당초 북한의 NPT 가입은 1985년 소련의 권유로 이뤄졌다. 따라서 러시아는 미국과 함께 북한 NPT 탈퇴에 적극 반대했다. 4월 29일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러시아는 미국, 영국, 프랑스와 한국, 일본까지 함께한 6개국 실무회의에서 결의안에 찬성했다. 이에 반해 중국은 당시에도 북핵 문제를 안보리에서 협의하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을 나타냈으나 미국 등 상임이사국의 중지를 따랐다.
 
   
▲ 외교문서./외교부 제공

이런 노력 때문에 북한은 6월 11일 NPT 탈퇴 유보 결정을 내렸다. 비록 일시적인 것이지만 당시 중국, 러시아의 가담이 북한의 태도 변화에 얼마나 유용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러시아 군축대사는 3월 18일 제네바 군축회의(CD) 본회의에 “NPT체제 손상에 무관심할 수 없다. 북한은 자신의 행동이 야기할 결과를 심각히 고려해야 하며, 탈퇴 결정을 재고해야 한다”며 “NPT의 무조건적 준수가 북한의 이익은 물론 한반도의 안전에 도움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외교문서를 통해 북한의 첫 NPT 탈퇴선언을 계기로 북핵 문제가 남북 간 문제에서 북미 간 문제로 바뀐 것도 알 수 있다.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한 초기 안보리 의장성명에선 남북이 1991년 1월 31일 체결하고 그해 12월 남북이 나란히 서명한 뒤 1992년 발표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지지를 강조했다. 하지만 북한은 4월 23일 유엔 사무총장 특사 파견도 거부하며 핵 문제는 북미 간에 다뤄져야 한다는 기본방침을 내세웠다.    

북한은 1985년 12월 NPT에 가입한 이후 남한과 함께 1991년 12월 21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채택, 1992년 1월 30일 IAEA와 핵안전협정 서명, 같은 해 3월 19일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의거해 남북핵통제공동위(JNCC) 발족했다. 이후 1992년 5~12월 북한은 IAEA 임시사찰을 5차례 수용했다. 따라서 북한 핵문제가 부각된 초기엔 북핵 논의가 남북한 중심으로 이뤄진 것이다.

결국 북핵 문제가 장기화되면서 국제정세가 요동치는 와중에도 북한의 구심력은 커진 셈이다. 북한의 NPT 탈퇴 유보에 결정적이었던 것은 6월 2일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와 북한의 외교사령탑으로 불리던 강석주 노동당 국제 담당 비서 간 뉴욕 만남으로 시작된 북미 고위급회담이었다. 당시 북한은 내정불간섭을 주장하며, “현재 가동 중인 모든 흑연방식 원자로를 경수로 방식으로 전환하는 데 미국이 협조한다면 모든 핵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의했다.  

이에 대해 갈루치 차관보는 “마치 야구경기 초구에 나온 커브볼처럼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면서도 유용한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으로 외교문서에 나와 있다. 그러나 우리정부는 의구심을 나타냈다. 제네바 현지에 체류하던 주미 한국대사관 참사관은 북한 측이 경수로 방식 전환 문제를 들고나온 것에 대해 “지연전술 책동이 아닌지 우려된다”고 했다.

북한은 1994년 10월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한의 핵 프로그램 동결도 합의됐다. 하지만 결국 2002년 10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의심이 증폭되면서 제네바 합의가 붕괴됐고, 북한은 2003년 1월 NPT를 탈퇴했다. 그리고 지금 우크라이나전쟁 중인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북한과 밀착하면서 28일(현지시간) 열린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 임기연장 표결에서 거부권을 행사, 대북제재 감시활동도 중단시킨 상황이다. 

30년 전과 달리 지금 중국과 러시아는 안보리를 무력화시키는데 노골적이고, 러시아의 태도 변화는 더욱 두드러진다. 북한은 이런 상황을 적극 이용하면서 ‘신냉전 외교’를 펴고 있으니 난제가 겹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2018년 전격 이뤄진 북미 정상회담은 김정은이 집권 7년째가 되도록 중·러와 정상회담을 갖지 못할 정도로 고립된 상황이 결정적인 배경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북핵 문제는 국제관계로 풀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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