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우 기자

2015년 9월 12일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가 이끄는 자유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며 일본 정치역사에 한 획을 그은 지 10년이 되는 날이다.

“정치는 세력이 하는 것”이라는 명제는 거의 법칙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여기에도 예외는 있다. 자민당 내부 파벌이 가히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본 정계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어떤 파벌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위기를 극복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세력의 후원 없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고이즈미의 비결은 간단했다. ‘대중에 직접 호소’하는 것. 2005년 9월은 이 방식이 절정으로 치달은 시기였다.

당시 일본의 최고 이슈는 우정개혁, 즉 우편·간이생명보험·우편저금 등 우정 3사업의 민영화 여부였다. 29세였던 1972년 처음으로 중의원에 당선돼 1992년 우정성 대신에 취임한 고이즈미에게 우정사업 민영화는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정치적 상징이었다.

1995년 자민당 총재선거에 출마한 시점에서부터 고이즈미는 ‘우정사업 민영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결과는 낙선. 2001년 4월 24일 3수 끝에 자민당 총재에 당선된 고이즈미는 4월 26일 마침내 일본 제87대 내각수상에 취임했다.

2001년 8월 13일에는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행하며 한국인들에게 충격을 줬지만, 그해 가을 김대중 대통령과 청와대에서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이는 2015년의 한일관계가 얼마나 악화돼 있는지를 짐작케 만드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 자신의 의사에 따라주지 않는 의원들을 무시하고 유권자들에게 직접 질문을 던진 고이즈미의 선택은 포퓰리즘이라는 비판과 카리스마라는 찬사를 동시에 얻었다. /사진=2005년 8월 8일 중의원 해산 당시 NHK 보도화면

고이즈미가 일본 정계 역사에 남을 만한 승부수를 던지게 되는 계기는 2004년 참의원(상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민주당에 근소한 차이로 패배하면서부터 마련됐다. 리더십에 대한 근본적 의구심이 서서히 고개를 들던 이 시점 고이즈미는 자신의 숙원인 ‘우정 민영화’에 더욱 강한 드라이브를 거는 방식으로 화답한다.

결국 2005년 8월 8일 우정 민영화 관련 법안이 참의원 본회의에서 부결되자 고이즈미는 엄청난 승부수를 던진다. 국회를 해산시켜 버린 것. 뿐만 아니라 중의원 해산결의에 서명을 거부한 농림수산성 대신을 파면시키기까지 했다. 이른바 ‘우정 해산’이라 불리는 이 사건을 목격하며 일본이 경험한 충격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고이즈미의 파격은 계속 이어졌다.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자민당 원로의원들을 공천에서 배제시켜 버린 것이다. 나름대로 탄탄한 세력을 갖고 있었던 이들은 자민당을 탈당해 신당을 결성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는 것으로 보이자 언론들은 고이즈미 자민당의 총선 패배를 예측했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2005년 9월 11일 실시된 제4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선거에서 고이즈미 주도체제로 재편된 자민당은 총 480석 중 296석을 가져가며 압승을 거뒀다. 반면 자민당에서 독립한 의원들이 창당한 신당들이 확보한 의석은 단 3석. 이와 같은 결과가 확정된 9월 12일은 고이즈미가 연출한 정치 쇼가 완벽한 성공을 거둔 날로 기록됐다.

자신의 의사에 따라주지 않는 의원들을 무시하고 유권자들에게 직접 질문을 던진 고이즈미의 선택은 포퓰리즘이라는 비판과 카리스마라는 찬사를 동시에 얻었다. 백발의 사자머리를 하고 다니는 이혼남 총리의 이 정치활극은 초식계(草食系)로 진입하고 있던 일본인들에게 대리만족을 선사했던 게 아닐까.

2005년 9월의 승부는 정치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감을 줬다. 특히 2003년 고이즈미에 의해 자민당 간사장에 취임, 2005년 10월 관방장관에 임명됐던 한 남자는 2014년 ‘중의원 해산→총선 압승’의 공식을 그대로 재현하며 자신의 정치력을 강화시켰다.

그의 이름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10년 전의 그는 선배 정치인의 ‘역대급 파격’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정치란 때때로 스스로를 궁지에 몰아넣은 뒤 자기 자신을 구출하는 과정인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2015년 9월 12일은 그런 날이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