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최초 최대의 다국적 기업, 영국 동인도회사…민간기업의 열정 입증하다

동인도회사의 정의

동인도회사 하면 우선 영국과 네덜란드를 떠 올릴 것이다. 물론 프랑스와 영국이 중앙아시아와 훗날 동북아시아에까지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국가인 것은 맞지만, 인도무역의 포문을 연 것은 포르투갈 이다. 1510년 포르투갈의 인도-고아(Goah)지역 진출을 시작으로 1596년 네덜란드(인도네시아-자바섬), 1602년 영국(인도-뭄바이), 1604년 프랑스 (1664년 대거재편), 1612년 덴마크, 1731년 스웨덴 까지 16세기말부터 서유럽은 아시아 무역의 이익을 위해 경쟁과 이합집산을 반복했다.1) 쉽게 말해 동인도회사는 우리가 아는 인도만이 아닌 非기독교문명권을 통칭하는 유럽식 표현이고, 여기에는 일본, 대만, 동남아시아 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절박했던 유럽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메흐메트 2세가 오늘날의 터키-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유럽의 동방무역은 투르크 제국의 크고 작은 무역정책에 시달려야 했다. 말이 좋아 “정책”이지 사실상 “봉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역사는 때로는 생각지 못한 부분에서 기회를 안겨준다. 육상으로의 무역길이 이슬람세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을 묵과할 수는 없었던 결과 찾아낸 길이 해상을 통한 무역루트다.2) 고유명사가 되어 버린 “1492콜럼버스”와 1453년의 사건사이에 일어났던 무수한 무역정책들 사이에 역사적 사례들은 지면으로 다 열거하기도 힘들 것이다.

영국 동인도회사

17세기가 시작될 무렵 유럽은 아시아 무역을 목적으로 하는 상사(商社)를 설립했고, 그 목적은 당연히 동방무역을 통한 인한 부(富)의 획득이었다. 이 회사들은 국가주권을 가진 특허회사3)였으나 훗날 식민지를 확보와 경영을 거치며 그 자체로 국가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결과는 처음부터 계획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의 특허권이란 “영국의 민간상사는 동양의 어느 지역에서든 물리력이 된다면 통치, 무역, 법률제정과 관련한 권한뿐만 아니라 무역거점 혹은 종류에 관계없이 상업에 필요한 관청 등을 운용할 수 있는 권한을 회사에 부여”한다는 의미이다. 초기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처럼 상인들이 정치에 개입할 수는 없었지만 교역량이 커지면서 이마져도 사실상 폐기시키고 완벽한 무역의 자율권을 보장했다.

차후 영국 내에서도 동인도회사가 인도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해석이었을 뿐 당시의 인도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런던의회의 일방적 시각이었으며, 무엇보다 19세기 초반까지 동인도회사는 다른 영국의 신흥 상사들보다 정보수집능력, 효율적인 자금운용능력을 포함해 모든 분야의 경쟁력에서도 압도적이었다.

   
▲ 그림은 18세기 런던의 동인도회사 본사 전경./자료=자유경제원 ‘젊은함성’ 게시판


세계최초이자 최대의 다국적 기업, 주도세력은 왕실도 의회도 아닌
사익을 추구하는 민간기업의 열정


역사에서 “제국”을 논할 때면 그 무게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보내기 이전 동경과 경외심이 앞선다. 그러면서 논의 되는 건 그 시대의 정치 지도자들이다. 예를 들어 고구려-광개토태왕,몽골제국-칭기즈칸, 투르크 제국-메흐메드2세, 대청제국-누르하치, 대영제국-(?) 에서 막힌다.
이유가 무얼까?

과도한 중앙권력이 모든 것을 통제하던 중국과 조선이 19세기말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오류를 범했음에도 최소 오늘날의 한국에서 가르치는 세계사에서 만큼은 제국을 융성하게 만든 모든 공을 정치지도자에게만 돌리는 “못된 습관”을 가졌다.

중앙집권을 오랫동안 경험한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외교와 통치는 당연히 국가의 몫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는 우리에게는 상사(商社)가 외국에서 영토를 소유하고 통상의 자율권과 화폐 제조권을 가진 후 종극에는 통치권을 얻는다는 것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서유럽의 대외적 팽창을 논할 때 빼놓으면 안 되는 세력이 사익을 추구하던 개인집단의 힘이다. 이것은 봉건제도가 가진 특유의 긴장감이 만들어낸 문화일 수도 있고, 개인가치를 다른 문명보다 일찍 깨달은 유럽의 인식 변화였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으나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인도에서 막대한 부를 획득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부를 추구하고 싶던 민간주도의 개인집단과(기업) 거기에 발맞추어 자율권을 허락한 영국왕실의 열린 사고에 그 배경이 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1601년 제1차 항해시절 보급선을 포함하여 겨우 5척의 선박을 아시아로 보낼 자금력밖에 없었지만 120년 만에 세계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성장했으며, 200년 후에는 인도에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는 역사상 최강의 다국적기업이 되었다. 1857년 인도의 세포이 항쟁으로 통치권을 잃고 해체에 내몰렸지만 무려 250년이 넘게 장수한 회사였다.

간과하면 안 되는 사실은 동인도회사가 기존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훗날 프랑스의 도전까지 물리치고 가장 막대한 이윤을 얻는 과정에서 영국의 국고유출 없이 자력으로 아시아에서 대영제국의 기초를 구축하는 성과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대영제국 건설의 뼈대는 동인도회사 시스템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세계경영(Global Management)의 3대 성공사례 중 하나로 영국의 인도 통치를 꼽으며 그 바탕을 엘리트 행정관 채용에서 찾는다. 동인도회사는 상업목적의 무역뿐만 아니라 행정을 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해지자 인도 현지에서 스스로 학교5)를 세워 행정관을 양성했는데 포트 윌리엄 컬리지 (Fort William College)가 대표적 예이다. 이 대학은 런던의 동인도대학으로 변모했고 그 대학의 교수가 불후의 명저를 쓴 「인구론」 의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 이다.

   
▲ 그림은 과거 동인도 회사의 공식휘장(Official Seal of East India Company)./자료=자유경제원 ‘젊은함성’ 게시판

동인도회사는 더 나아가 학생을 임원의 추천만으로 뽑는 폐쇄적인 채용에서 벗어나 본국(영국)의 공무원보다 더 먼저 공개시험제도를 통해 전문 인력을 채용하기까지 이르렀다.

특이한 점은 동인도회사가 상업으로의 경영을 접고 영국정부를 통한 인도를 직간접적으로 통치하는 과정에서 동인도회사의 시스템을 그대로 차용했다는 것이다. 영국이 인도인을 가장 장기적이고 대량의 인력을 고용한 것은 재화를 생산하기 위한 인력이 아닌 군대였다. 영국에게 고용된 인도군은 국내 문제인 인도의 내전뿐만 아니라 청나라, 버마, 이집트등 에서 벌어지는 해외 전쟁에도 파견되었다.

   
▲ 그림은 Madras Army East India Company (동인도회사가 고용한 정규인도군). 이들의 인식 속에 인도라는 국가가 영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을까? 오히려 이들에겐 동인도회사가 국가 혹은 고용인 이라는 인식이 강했을 것이다. 지역별로 독립된 세력들이 무굴제국이라는 통념보다 더 앞섰기 때문이다./자료=자유경제원 ‘젊은함성’ 게시판

잘 안 알려진 사실 이지만 1,2차 아편전쟁에서도 핵심 축을 담당했던 병력들도 동인도회사의 사무역인(私貿易人)을 통해 고용된 인도계용병들이었다.6) 이 집단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1947년까지 영국과 유럽의 크고 작은 전쟁에 동원되었다.

식민지,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넘어

정치경제사를 공부하다 보면 항상 궁금한 것이 인도(무굴제국) 같은 큰 나라가 어떻게 13분의 1 크기에도 못 미치는 영국에게 지배를 받았느냐 이다. 인구로 따져도 18세기말 무굴제국의 인구를 3억으로 가정했을 때 1천만이 조금 넘던 영국의 지배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소한 내 개인의 학창시절에 가장 궁금했던 부분이다. 그러면서 부연설명도 없이 서구의 착취문화로 곧바로 귀결된다. 참 이상하다. 그렇다면 그것을 시작부터 막지 못한 피지배자들은 얼마나 바보였을까? 역사는 망원경이 아닌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할 때가 있다.

무굴제국은 오늘날의 인도와 파키스탄, 아프카니스탄, 방글라데시 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영토와 인적자원을 가진 나라였지만 사실상 지역별로 군벌과 독립된 행정조직이 있는 봉건체제였다. 제국의 명맥을 가지고 있던 시절에도 무굴제국은 끊임없는 내전과 각지의 반란을 제압해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고 모양세만 제국 이었을 뿐 중앙왕조가 완벽한 통치시스템을 구축했던 시기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

내전과 반란을 거듭하다보면 지역의 영주와 왕들은 강한 연대세력을 찾기 마련이고, 이시기에 맞춰 유럽의 인도 진출이 본격화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쉽게 말해 유럽의 동인도회사들은 인도의 내전에 적극 참여했고, 인도의 군벌과 왕들 역시 경쟁적으로 유럽세력과 손잡았다.

여기에서 경제적 시각을 대입한다면 영국의 동인도회사와 다른 유럽 상사(商社)들 역시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세력과 이합집산을 거듭했고, 군벌들과 왕들 역시 통상무역을 하고 있는 유럽과 손을 잡아야만 자본축적이 가능한 세력이 더 많았다.

   
▲ 그림은 과거 무굴제국 최대범위. 사실상 여러 왕조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봉건체제였다./자료=자유경제원 ‘젊은함성’ 게시판

잦은 내전의 결과는 마침내 1739년 페르시아-아프샤르 왕조의 침공을 받은 후부터 사실상 제국의 위상은 사라지고 1785~1858년7)까지 공식적으로 “동인도회사”의 지배시기가 온다. 통치력을 상실한 무굴제국을 지켜봤던 지방의 실력자들은 동인도회사의 통치에 딱히 반감을 갖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무굴제국의 붕괴는 서구의 침탈과는 무관한 지역정세의 문제가 더 컸다.

민간기업의 효율성과 자유무역의 역동성
결과는 카스트제도의 붕괴


인도 지배의 시작은 영국왕실이 아닌 동인도회사였다. 이 시기 영국의 인도 “관리”를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보기는 매우 무리가 따르고, 무엇보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도덕적인 평가는 더더욱 힘들다.

국가이익과 개인의 이익 더 나아가 집단의 이익여부가 타인에게 도덕성까지 검증받을 이유가 없었던 게 역사의 사례이기 때문이다.

동인도회사가 인도에 끼친 또 다른 영향은 다름 아닌 카스트제도의 붕괴에 있다. 통상무역을 목적으로 다른 문명권에 진출한 만큼 영국(인)의 입장에서 그 사람의 신분적 한계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연히 영국입장에서도 “우리가 인도의 카스트제도를 무너뜨려 저들을 구해야 한다”와 같은 신파극을 연출할 이유는 없었겠지만, 결론적으로 봐도 신분상승의 기회로 동인도회사와 노골적으로 연대하고 싶은 개인과 신흥세력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온 게 그 결과이다.

   
▲ 그림은 통상의 키워드로 묘사한 유니언잭./자료=자유경제원 ‘젊은함성’ 게시판

결론적으로 영국은 17세기부터 동방무역의 자율권을 민간에게 허용했고, 동인도회사의 경영능력과 효율성이 가져온 막대한 부를 기반으로 삼아 아프리카, 북미, 중앙아시아를 아울러 동아시아까지 전세계로 진출한 발판이 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관료적(Bureaucratic)해석과 정치적 규제는 최대한 배재되었다. 그 결과 유럽에서 딱히 부국도 아니었던 영국이 3세기 가까운 패권을 쥔 원동력이 되었고, 더더욱 간과하면 안 되는 사실은 동인도회사의 중앙아시아 활동이 계속되는 동안 본국인 영국에서는 1차와 2차에 걸친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종합하면 눈에 띄는 것은 민간의 경제활동을 최대한 보장하고 규제를 최소화 하는 당시 유럽의 분위기이다. 유럽에는 여전히 왕가가 존재하는 입헌군주제의 국가가 많다. 이번 사례로든 영국과 네덜란드야 말로 대표적인 국가들이다.

“저들은 왜 여전히 입헌군주제를 유지할까?”

경직된 중앙권력을 움켜쥐고 상업의 중요성과 상무정신마저 천박한 가치로 여겼던 자격미달의 왕조인 조선왕조가 붕괴된 된지 100년이 넘었다. 대한민국은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국가적 가치로 내걸었지만 오늘날의 실상은 매우 달라 보인다.

만약 오늘날 한국의 관료사회와 여의도 정치판이 대한민국에서 18세기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버금가는 기업집단이 존재하는 걸 과연 그냥 보고 넘어갈까?

질문을 바꿔야겠다. “저들은 왜 여전히 입헌군주제가 유지될까?” 이다.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영국은 공식적으로 Class System이 인정되는 공인된 계급사회지만 그 계급이 헌법적 규제로부터의 자유까지 보장해 주지는 않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심리적인 우월감이 은근히 존재할 뿐이다. 이러한 영국의 사회분위기에서 400년 전 영국으로 시계태엽을 돌려보자. 지금보다 더 엄격한 신분사회 속에서 상위계급에 있는 인물들 이외의 전문가 집단을 키운 세력이 다름 아닌 왕가와 세습귀족이기 때문이다.8) 그 이면에는 봉건적 계급구조가 아닌 순수한 이윤창출이라는 합목적 욕망이 건전하게 인정된 결과이다.

비대해질 데로 비대해진 기업규제와 민간에게 잘못 뇌리에 박힌 反기업정서, 여전히 사농공상의 신분구조로 사회를 해석-유지하고 싶어 하는 경직된 관료시스템에 종사하는 행위자들이야말로 대영제국의 팽창과정에서 민간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이 가져다준 역동성과 긍정적인 결과물들을 얼마나 이해할까 반문해 볼 시기이다.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

(이 글은 임종화 경기대 무역학과 객원교수가 자유경제원 홈페이지 ‘젊은함성’ 게시판에 기고한 글입니다. 자유경제원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1) 현지에 직접상사를 둔 것과 자국의 안에 회사를 설립한 연도 차이는 국가별로 다르다.

2) 전유럽의 국가들이 무역정책에 좌지우지 된 것은 아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우 이스탄불안의 재산권과 항구사용권 및 상품의 유통을 상당부분 보장 받았다. 은근한 이슬람으로의 개종(改宗)권유가 바탕에 깔려있을 뿐이다.

3) 특허회사 (Chartered Company with Sovereignty)

4) 톤으로 계산한다면 약 1,500톤

5) 2년후 현지 폐교 후 1806년 런던 동인도대학을 설립. 훗날 헤일리베리 컬리지(1806~1858)

6) 오늘날까지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네팔 구르카 용병들의 역사도 동인도회사 고용제도에서 출발

7) 그 이후는 대영제국의 직접지배시기 (1857년~1947년)

8)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공식적으로 세습귀족 제도는 존재하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명예직(?)에 국한 시키는 제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