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폭격 주장하다 해임…반공주의로 무장한 마지막 군인

   
▲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

9월 15일 그날은 65년 전 인천상륙작전이 거행된 날이다. 남침 3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밀어붙인 북한군을 패퇴시킨 결정적 작전이었다.

최근 이태식 전 주미대사가 흥미로운 글(“맥아더는 왜 한국전쟁에서 추락했을까”)을 발표했다(9월 15일, 중앙일보). 통일의 꿈이 무너진 아쉬움을 맥아더의 실패를 거울삼아 깊은 아쉬움을 토로했다.

과연 맥아더는 실패했는가? 이 전 대사의 글은 유감스럽지만 ‘콜디스트윈터(핼버스탬, 2009)’의 관점과 내용에 거의 의존한 걸로 보인다. 미국 최고의 저널리스트 중 한 명이었던 핼버스탬은 “미군이 20세기에 범한 최대의 실수는 맥아더가 군대를 압록강까지 몰아붙인 거였다(564쪽).”라고 명시적으로 밝힐 만큼 맥아더의 북진을 통탄했던 인물이다.

그의 방대한 탐사기 속에 이 전쟁(6.25)은 미국이 엉겁결에, 어쩔 수 없이 개입한 전쟁이었다는 시각이 뚜렷하다. 다만, 미국이 한국을 도운 것은 오로지 반공산주의에 입각한 것이었지, 제국주의적 욕심이 작용한 것은 조금도 아니었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그러나 한국분단사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신복룡 교수에 따르면 6.25전쟁은 미국에게 “고맙고도 기다리던 전쟁(thankful and waited war)”이었다. 이 말은 원래 미국의 좌파학자 브루스 커밍스가 처음 썼지만 미국이 6.25전쟁을 충분히 예측하고 있었다는 분석에는 이념이 다른 두 학자의 해석이 일치한다. 2차 대전 후 소련과 정리되지 않은 ‘앙금’을 해소할 ‘적임지’로 아시아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당시 워싱턴의 핵심인사들의 증언을 보면 그들이 6.25전쟁에 얼마나 넌더리를 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애치슨 선언’으로 북한에게 남침의 결정적 동기부여를 제공했던 국무장관 애치슨은 “세계 최고의 전략가들에게 저주받은 전쟁을 치르기에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최악의 장소를 물색해 보라고 했다면 만장일치로 한국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핼버스탬에게 털어놓았다.

당시 미 합참의장이었던 브래들리는 “한국전쟁은 잘못된 곳에서,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적을 만난, 잘못된 전쟁이었다”라고 훗날 트루만 대통령에게 고백했다.

무려 천 페이지에 이르는 핼버스탬의 책을 관통하는 시각은 민주당의 트루먼 정권과 보수당의 이념적 좌표였던 맥아더와의 갈등에 이야기의 맥락이 꽂혀 있다. 철저히 미국적 관점이다.

그가 맥아더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분량만 모아도 300페이지는 족히 넘을 만큼 맥아더 비난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만큼 싫었다는 방증이다.

   
▲ 1948년 8월 남한에서 반공과 자유주의를 내세운 우파 이승만 정부가 탄생하고, 그해 9월 북한에서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공산정권을 수립하면서 남북분단시대의 주도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은 정부수립 경축식에 참석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총사령관. /사진=연합뉴스

약간의 주관성은 가미됐을지언정 맥아더에 대한 핼버스탬의 평가와 서술이 객관성을 상실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본격 탐사기자다운 예리한 글 솜씨는 제국주의 시대가 막을 내리는 시기 트루먼으로 대표되던 미국의 민주당 20년 집권이 어떻게 몰락하게 됐는지를 세밀히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오히려 그의 책을 통해 한가지 분명해진 것은 미국 정가를 통틀어 맥아더만큼 진정한 반공주의자는 없었다는 거다. UN군 총사령관으로 불과 10개월간 한국 땅을 누빈 맥아더를 필적할만한 군인은 전무후무했다. 그만큼 지략이 있거나 용맹하고 충성스런 장군은 즐비했으나 그들 모두 ‘맥아더’는 아니었다.

1951년 4월 트루만 대통령이 맥아더를 해임한 것은 그가 오만하고 자신을 무시해서만이 아니라 맥아더의 만주 원폭 투하 구상이 미국의 국익에 크게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당시 만주 폭격 문제는 UN군 사령부의 결정사항이고 맥아더는 UN군 총사령관으로 UN으로부터 ‘백지수표(blank check)’를 받아놓은 상태나 마찬가지였는데도 그를 해임한 것이다.

그렇기에 맥아더의 해임은 미국이 더 이상 한반도에서 공산주의를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싸워야 할 ‘전의’가 사라졌음을 보여주는 상징과도 같았다.

워싱턴에 머물던 대부분의 장군들과 정치인들이 미국의 주적으로 오로지 '소련'만을 의식하고 있을 때, 분연히 일어나 만주를 폭격해야 '중공'의 발호를 ‘발본색원’할 수 있다고 판단한 사람은 맥아더 한 사람뿐이었다.

맥아더가 고집불통이지도 호전적이지도 않고, 후임 리지웨이처럼 워싱턴의 정략적 흐름을 고도로 고려할 줄 아는 신중한 군인이라 38선 언저리에서 적당히 휴전하였더라면 당시의 그 많은 미군 희생자와 미국의 총 전쟁비용은 줄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 한반도 통일의 명분은 그만큼 약해졌을 게다. 분단의 고착화는 다름 아닌 ‘그냥 이대로가 서로 편하다’는 인식이 통일의 명분을 완전히 지배할 때이다. 동북아 공간에서는 그 때도 이미 한반도의 통일을 지지한 국가나 세력이나 이념은 없었다. 이 전 대사의 맥아더 실패론은 미국기자의, 미국의 국익만이 반영된 입장에서 내린 미국적 평가를 그대로 차용한 것에 불과하다.
 

   
▲ 작전명이 ‘크로마이트’였던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20세기 전쟁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상륙작전으로 평가된다. 미국 제1해병대대의 인천상륙작전을 지켜보고 있는 맥아더 장군과 미군 지휘부. /사진=연합뉴스
아이러니하게도 콧대 높기로 그지 없었다는 맥아더만이 공산주의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중국과의 한판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미군이었다는 사실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실로 크다.

불과 10년 전 좌파행동대는 맥아더 동상 철거시도를 극렬한 폭력을 동원해서 관철시키고자 했고 그 시절 좌파정부는 수수방관했다. 그 결과는 동상 하나에 깃든 ‘가치’ 하나를 무너뜨리기 위한 그들의 시도가 대한민국 법치의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뼈아픈 상흔뿐이었다.

이태식 전 대사는 칼럼에서 “‘전쟁은 곧 정치의 연장’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생각이 각광받는 새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라고 글을 맺는다. 클라우제비츠의 이 명언은 전쟁을 바라보는 인식의 확장을 도왔을 뿐, 그것이 ‘각광받는 시대’라면 그 시대는 결코 새로울 수도 평화로울 수도 정의로울 수도 없는 몰가치적 혼돈의 시대일 뿐이다.

그리고 전쟁을 정치의 연장으로만 보는 순간, ‘진정한 승리’는 사라진 시대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의 명분과 현실적 실리는 언제나 정치적 타협으로 수습될 테니 말이다. 맥아더가 말한 ‘승리’는 적당한 정치적 타협의 결과가 아니었다. 기독교적 가치에 충실한 ‘정의감’이 인간 맥아더를 지배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그 시절 맥아더는 “승리를 대체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편지 글로 워싱턴의 소극성을 질타하고 지지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훗날 청문회에서 맥아더는 김일성에게 있어서 ‘(6.25)전쟁은 정치의 마지막 과정이었다.’(war is the ultimate process of politics)라고 증언한 바 있다. 김일성이 주도한 북한 체제의 형성과 목적이 한반도 적화를 위한 출발점에 불과했다는 것을 정확히 꿰뚫은 것이다.

역사상 현직 대통령을 폭발적으로 능가하는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누렸던 유일한 군인이면서, 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뿌리 뽑는 길은 만주 폭격 밖에 없다는 담대한 통찰력을 지녔던 맥아더의 행적에 대해 모든 미국인은 미국적 관점에서 그를 비난할 수 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역사적 맥락 속에서 살아남은 한국인이 똑같이 따라 한다면 그건 '염치'가 없는 짓일 뿐 아니라 역사의식조차 없는 것이다. 핼버스탬에게 맥아더는 실패한 장군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게 맥아더는 포화 속에서 기적적으로 피어난 승리의 상징이다.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