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82)- 민주주의의 우민(愚民) 폭정을 경계하라
크세노폰(기원전 430년?~355년?)의 『헬레니카』

   
▲ 박경귀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요인은 다양하다. 국방력, 경제력, 정치체제, 문화역량, 국민정신,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하지만 총체적 국력의 진퇴를 결정짓는 요인은 역시 건강한 국민정신을 이끌 걸출한 지도자의 존재다. 이 책은 페리클레스라는 탁월한 지도자를 잃은 아테네가 어떻게 분열과 반목 속에 쇠망해 갔는지, 그리스 세계가 만성적 내란으로 어떻게 자신들의 역량을 고갈시켜 갔는지를 잘 보여준다.

크세노폰의 『헬레니카(Hellenika)』는 투키디데스가 완성하지 못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전쟁 말기인 기원전 411년부터 362년까지 49년간의 그리스의 역사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소중한 사료이자 당대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현실감 있게 묘사한 고전이다. 크세노폰은 자신이 직접 참여하거나, 지인을 통해 들은 바를 일부는 연대순으로, 일부는 사건중심으로 재구성했다.

당시는 그리스 도시국가 사이에 전쟁이 끊이지 않던 전국시대(戰國時代)였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었던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정작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경쟁으로 인해 혼란과 무질서로 빠져들었다. 해군력이 강한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과 강한 보병을 가진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주도권 다툼은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치열하게 전개됐다.

동맹의 맹주 자리를 놓지 않으려는 두 패권 국가의 경쟁이 가열되는 와중에, 그 틈새에서 균형자 역할을 해보려는 코린트의 부상과 제3의 패권 국가로 등장하려던 테베의 반스파르타 연합전선은 그리스 세계의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의 합종연횡(合從連衡)을 촉진시켰다. 게다가 페르시아는 그리스 세계의 혼란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때론 아테네, 때론 스파르타와 연합하여 자국과 인접한 소아시아 도시 국가들은 물론 그리스 본토 국가들 사이에 반목과 분열을 부추겼다.

그리스 세계의 혼란은 정치체제의 불안정에도 기인했다. 이미 한계를 드러낸 아테네식 민주정과 스파르타식 2인 왕정은 물론, 10~30명이 공동통치하는 과두정 등 어느 정체도 안정적으로 작동되지 못했다. 그 가운데 패권 국가들이 동맹 국가들에 자신들이 선호하는 정파를 지원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외교적, 군사적 대립을 격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동맹은 국제적 평화보다 자국의 이익에 따라 언제든지 깰 수 있는 취약한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정파적 이익에 따라 적국과 서슴없이 손을 잡는 정치인들의 배신은 일상화되었다. 스파르타 편에 서서 군사전략을 자문한 아테네의 알키비아데스의 배신이 아테네의 패배를 재촉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나마 스파르타의 경우 리산드로스나 아게실라오스 같은 걸출한 인물이 군사적, 정치적 역량을 발휘해서 스파르타의 패권과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 책이 주는 인상적인 교훈 몇 가지를 들어보자. 기원전 406년 아테네 해군은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스파르타에 크게 승리했다. 아테네 함선은 25척이 파괴되고, 스파르타 동맹군 함선은 69척 이상이 파괴되었다. 아테네 장군들은 남은 배 47척으로 전투 중에 난파한 배와 선원들을 구하러 나섰다. 그런데 바람이 심하게 불고 파도가 거세 앞길을 가로막았다. 결국 선원들을 구하지 못하고 귀환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선동가 아르케데모스가 민회에서 선원을 구하지 못한 장군들을 모두 기소하고 엄벌에 처해야 한다고 선동했다. 흥분한 민중은 한 사람씩 죄의 유무를 따지고 기소된 사람들의 해명을 듣는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기소된 사람을 모두 사형에 처해야 한다며 일괄 표결하고자 했다. 더구나 칼릭세노스는 기소된 장군 8명의 사형 여부를 한 번의 표결로 끝장내자고 선동했다.

때마침 그날은 소크라테스도 무작위 추첨에 의해 선임된 민회의 행정위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행정위원들의 민회에 표결 안건을 상정하는 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불법적인 표결을 비난하고 동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민중들의 험악한 분위기에 눌려 나머지 행정위원들은 표결에 찬성했다. 이 때 에우립톨레모스는 기소된 장군들을 변호하며, 재판의 불법성을 지적하는 연설을 했다.

“한 사람씩 따로 하루 동안 세 부분으로 나누어 재판을 합시다. 첫 번째는 여러분이 함께 모여 이들이 죄가 있나 없나를 판단하고, 두 번째는 그들에 대한 비난을 듣고, 세 번째는 그들의 해명을 들으십시오. 이렇게 하면 죄인을 큰 벌을 받을 것이고, 죄 없는 사람은 아테나이인 여러분에 의해 풀려나 억울하게 죽지 않을 것입니다.”

사리가 분명한에우립톨레모스의 연설도 격앙한 민중을 설득시키지 못했다. 결국 인민재판식의 일괄 판결로 달아난 2명을 뺀 6명의 무고한 장군들이 처형되었다. 아테네 역사에서 승리한 장군들이 처형당한 어이없는 최초이자 유일한 사건이었다. 민주주의가 우민(愚民) 정치로 흐른 표본으로 기억할 만하다.

아테네인들은 얼마 되지 않아 자신들이 중대한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서야 당시 민중을 현혹한 사람들을 기소했다. 몇몇은 달아났고, 한번 표결로 사형에 처하자고 선동한 칼릭세노스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아 굶어 죽었다. 하지만 민중들의 오판을 이끈 선동가들과 부화뇌동한 민중들의 잘못된 표결로 무고하게 죽은 6명의 장군들의 원혼은 안식할 수 있었을까?

   
▲ 아테네 시민법정에서 사용된 청동 투표용구이다. 배심원들은 투표함에 이 용구를 넣었다. 유죄라고 생각할 때는 가운데에 구멍이 나 있는 원반을, 무죄로 판단할 경우에는 구멍이 막힌 용구를 투입했다. 아테네 아고라 박물관 ⓒ박경귀
다수 민중이 주인인 민주주의가 최악의 참주정치로 돌변한 사례도 이 시기에 일어났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하자, 스파르타의 뒷배를 과시하며 30인 과두정이 들어섰다. 2년이 채 안 되는 동안이었지만, 30인 참주정의 통치는 잔혹했다. 수많은 무고한 시민을 혁명의 이름으로 죽였다. 정파적 이익에 매몰된 정치인들이 민중의 삶을 얼마나 피폐시키고, 인간성을 파괴할 수 있는 지 잘 보여준다.

하지만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하던 과두파에 대항한 트라시불로스와 몇몇 지도자들의 살신성인의 용기와 투쟁을 통해 민주정이 회복된다. 그 치열한 과정은 자유를 신앙처럼 존중했던 아테네인들의 희미해져가던 저력을 확인시켜준다.

30인 참주정의 잔혹한 통치에 대한 아테네 시민들의 트라우마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399년에 아테네 시민들은 소크라테스를 신을 믿지 않고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했다. 아테네 시민들은 평소 민주주의의 폭정을 경계하고 비난한 소크라테스가 달가울 리 없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30인 참주정의 주도세력이었던 크리티아스가 소크라테스의 제자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증오가 소크라테스에 대한 경계와 미움으로 전가된 측면도 있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말기로 갈수록 어제의 동맹이 오늘의 적이 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 가운데 주변국들의 잦은 배신과 위협으로 곤경에 빠져도 스파르타와 맺은 동맹을 끝까지 신실하게 지키며 국가를 보존했던 약소국가 '플레이우스'의 행적은 돋보인다. 크세노폰이 극구 칭송하는 이유가 이해된다.

테베의 침략으로 스파르타가 존망의 위기에 빠졌을 때,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연합을 이끌어냈던 플레이우스인 프로클레스의 연설도 인상적이다. 오랫동안 앙숙이던 두 도시국가 사이의 연합은 누구도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프로클레스는 설득력 있는 연설로 이를 성사시켰다.

그는 먼저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이민족 페르시아와 맞서 싸워 그리스 세계를 구한 혈맹임을 상기시킨다. 또 아테네가 궁지에 몰린 스파르타를 돕는다면 영원한 우방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특히 아테네가 과거의 나쁜 일을 기억하지 말고 아테네가 받은 은혜를 은혜로 갚는 것이 올바른 처사라고 역설했다.

이 책은 그리스가 내부 갈등과 분열, 끊임없는 소모전으로 도시국가의 국력을 쇠잔시켜 마침내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정복을 성공하게 만든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게 해준다. 한편으론 도시국가적 문화에서 동방군주적 헬레니즘 시대로 넘어가는 길목의 모습을 담고 있다.

그리스 세계의 약화와 해체과정도 잘 보여준다. 민주주의가 다수 민중의 폭정으로 흔들렸던 시기다. 자유시민의 이념을 기초로 한 민주정치체계의 이상은 민중의 포퓰리즘 속에서 사라져갔다. 시대의 융성기 보다 오히려 시대의 쇠퇴기에 역사적 교훈을 얻을 것이 더 많다.

5세기 아테네 황금기의 민주주의는 참여와 절제가 조화를 이루었다. 그런 토대가 그리스 문명의 융성을 가져왔다. 하지만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그 여파로 오랫동안 계속된 그리스 도시 국가 간의 내전은 민주주의의 이상을 앗아갔고 그리스 문명을 급격하게 쇠락시켰다.

크세노폰은 이런 그리스 문명의 쇠락의 과정을 안타깝게 그려내고 있다. 저자 자신이 장군으로 군과 전투에 대한 이해가 높았던 만큼, 다양한 전투 상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독자들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생존을 위한 치열한 외교전에서 드러나는 설득의 전략, 숱한 전투에서 보여주는 지휘관의 용기와 리더십, 다양한 전투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통해 군사전략을 살필 수 있는 점은 덤이다.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 원장

   
▲ ☞ 추천도서: 『헬레니카』, 크세노폰 지음, 최자영 옮김, 아카넷(2012). 3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