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지식이 넘치는 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치관의 혼돈을 겪고 있는 ‘지혜의 가뭄’ 시대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복잡화 전문화될수록 시공을 초월한 보편타당한 지혜가 더욱 절실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고전에는 역사에 명멸했던 위대한 지성들의 삶의 애환과 번민, 오류와 진보, 철학적 사유가 고스란히 녹아있습니다. 고전은 세상을 보는 우리의 시각을 더 넓고 깊게 만들어 사회의 갈등을 치유하고, 지혜의 가뭄을 해소하여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입니다.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와 ‘미디어펜’은 고전 읽는 문화시민이 넘치는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밀알이 될 <행복한 고전읽기>를 연재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박경귀의 행복한 고전읽기(83)-계층갈등 해소를 위한 중용의 지혜
아리스토텔레스·크세노폰의 『고대 그리스정치사 사료』

   
▲ 박경귀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고대 그리스 문명이 인류 문명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 그 가운데 아테네인들이 창안한 민주정이 으뜸일 것이다. 하지만 숱한 도시국가로 이루어졌던 그리스에는 아테네 민주정 이외에도 왕정과 과두정, 혼합정 등 다양한 정치제도가 시행되었다. 여러 정치체제의 특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상당 부분 소개되어 있다. 하지만 그리스 고전 가운데 개별 국가의 정치체제를 구체적으로 기술한 전거들은 매우 부족하다. 이런 까닭에 단편으로 전해진 아리스토텔레스와 크세노폰의 저작은 더욱 중요한 사료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에서 활동했다. 그의 저작으로 전해져 온 <아테네 정치제도사>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 혹은 그 제자들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1880년경 이집트의 사막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현존하는 본문의 첫머리 부분이 소실된 상태다.

크세노폰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약 반세기 앞서 기원전 5세기 말에서 4세기 초반에 아테네에서 활동했다. 그가 쓴 <아테네 정치제도>, <라케다이몬(스파르타) 정치제도> 역시 적은 분량이지만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아무튼 아리스토텔레스와 크세노폰이 남긴 저작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가운데 대표적인 나라였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정치와 법률 등 국가 운영체제를 비교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철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와 역사가이자 군인이던 크세노폰의 정치제도사의 기술 방식과 문체가 대조적이어서 흥미롭다. 앞서 저술된 크세노폰의 두 도시국가의 정치제도사는 각각 분량이 짧다. 특히 조문화된 구체적인 정치와 법률을 기술하기보다 두 도시국가의 사회 관습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법률체계에 대해 자신의 평가적 의견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시행되어온 제도와 규정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크세노폰은 아테네 출신이었지만, 한 때 스파르타의 편에 서서 아테네와 싸우다 추방되었다가 다시 아테네로 돌아오는 등 인생 역정이 남달랐다. 이런 까닭인지 그는 스파르타의 엄격한 규율과 풍습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하면서, 아테네의 지나친 무질서와 시민정신의 타락에 대해선 비판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크세노폰은 스파르타가 인구가 적으면서도 그리스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을 ‘리쿠르고스 입법’의 훌륭함에서 찾고 있다. 리쿠르고스는 다른 도시국가와 차별화된 독특한 입법체계를 만든 전설적인 인물이다. 그는 스파르타뿐만 아니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여러 도시국가들에서 신으로 숭배되었다. 물론 실존 여부에 대해선 논란도 있다. 하지만 그의 실제 여부와 무관하게 그가 만들었다는 입법이 강성한 스파르타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음은 틀림없다.

리쿠르고스 입법의 특징은 육체적으로 강건한 시민을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 있었다. 결혼과 양육, 출산은 육체가 가장 왕성할 때 이루어지도록 통제했다. 이와 관련하여 다른 나라의 상식과는 반대의 입법이 많았다. 예를 들어, 결혼 후에도 남자가 여자 있는 곳에 자주 드나드는 것을 남에게 보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만들었다. 서로 그리는 마음이 더욱 강렬해지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더 튼튼한 자식을 낳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또 노쇠한 남편이 육체와 정신이 강건한 젊은 남자를 데려와서 여자에게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입법하기도 했다. 이는 단순히 대를 잇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수한 자질의 자식을 얻기 위한 ‘남자 씨받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했던 셈이다. 현대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스파르타는 국가적으로 뛰어난 시민들을 생산해 내기 위한 방편으로 이런 기이한 제도를 활용했던 것이다.

양육의 방식도 강건한 아이를 만드는데 초점이 맞춰졌다. 어린 아이 때부터 1년 내내 단벌옷을 입게 하여 추위나 더위에 잘 견디도록 했다. 또 전투 능력을 배양하기 위해 맨발로 다니도록 하고, 약간의 먹을거리를 훔치는 것조차 허용했다. 그 대신 범행을 저지르다 붙잡힌 경우에는 체벌을 함으로써 자기 생존력을 스스로 확보하도록 하게 했다.

공동식사를 제도화하고, 젊은이들이 연장자에 대해 예의범절을 엄격히 지키도록 했다. 또 노인의 경우에는 장로의회에서 의원이 될 자격여부를 심사함으로써 노년에 이르기까지 일생을 올바른 삶의 덕(arete)을 쌓는데 경쟁하도록 만들었다. 이는 스파르타인들이 육체적 경쟁 못지않게 덕의 함양을 통한 정신의 경쟁도 중요시했음을 말해준다.

특히 비겁자에 대해서는 손해와 불명예가 따르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제재했다. 크세노폰이 스파르타의 이런 제도를 보고 스파르타에서는 “부끄러운 삶보다 죽음을 택하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고 말했을 정도다. 이런 사회적 관습은 자연스럽게 시민들의 상무정신을 더욱 투철하게 만들었다. 이런 기풍이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전쟁 당시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과 300명의 용사가 페르시아의 대군에 맞서 전멸할 때까지 싸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

   
▲ 스파르타 아크로폴리스에서 발굴된 실물 크기의 반신 전사 상이다. ‘레오니다스’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물론 실제 레오니다스 상으로 볼 근거는 명확하지는 않다. 전쟁 영웅의 조각상으로 신전의 박공벽에 안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인한 스파르타 전사의 형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 투구의 상단을 볏 모양으로 장식하고 얼굴을 보호하는 투구의 옆면에 숫양의 머리를 부조한 점이 독특하다. 또 콧수염을 기르지 않았던 스파르타의 풍습도 엿볼 수 있다. 스파르타 고고학 박물관, ⓒ박경귀
스파르타의 사회체제와 정치체제도 독특했다. 엄격한 사회 규율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동등하게 적용됐다. 특히 두 명의 왕을 두었다. 어찌 지존이 한 하늘 아래 둘이 있을 수 있는가. 하지만 스파르타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권력을 틀어쥔 한 명의 왕은 폭군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즉 그들은 왕이 참주가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것이다.

그래서 두 명의 왕을 두어 서로 견제하고 만들었다. 그것도 믿을 수 없었던지 왕의 정치와 행정을 감독하는 다섯 명의 감독관 에포로이(ephoroi)를 두었다. 이중 삼중의 견제장치가 작동되게 했던 셈이다. 이 모든 것은 소수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종국에 폭정으로 흐르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고자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고안된 것이다. 이로써 왕과 시민 사이에 권력의 분점을 통해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크세노폰은 스파르테의 정치체제에 대해 우호적인 평가를 내린 반면, 아테네 민주정의 타락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한다. 아테네에는 민중의 무식, 무질서, 저속함이 가득하다고 꼬집는다. 자유인과 예속노동자 및 거류외인들에게도 평등권을 부여한 탓에 예속노동자마저 오만하고 건방져졌다는 것이다. 크세노폰이 기술한 아테네 ‘노예’들의 생활을 보면, 고대 그리스 노예에 대한 현대인의 상식적인 인상을 벗어난다.

아테네의 노예들은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우리의 노예제도와 상당히 달랐다. 아테네 노예에게는 상당히 많은 자율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특히 해상세력이 발달한 곳에서 예속노동자는 단지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받고 주인은 그 소득을 차지하는 관계였다. 나머지 일상생활에서 그들은 자유로웠다. 노예와 주인의 관계는 한정된 직무에 대해 고용자와 피고용자의 관계였지 주인이 노예의 일생생활을 폭넓게 제약하는 관계는 아니었다는 의미다.

이런 차원에서 역자가 ‘노예’라는 용어대신 ‘예속노동자’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이 이해된다. 아무튼 크세노폰은 바로 아테네 민중보다 더 잘 사는 ‘예속노동자’도 많았던 아테네의 현실을 개탄하면서 느슨한 신분 제도의 모순을 비판했던 것이다. 특히 아테네인들의 지나친 평등주의의 추구가 가져온 무질서와 방종에 대해 한탄했다.

크세노폰은 아테네의 지나친 민주적인 제도가 만들어낸 나태한 시민정신도 지적했다. 특히 잦은 축제 기간 동안 공무를 전혀 처리하지 않고, 심지어 재판도 진행하지 않는 관행은 시급히 개선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럼에도 아테네가 민주정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통치체제를 혁신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스스로 전망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목소리로 민주정이 가장 제대로 시행하기 어려운 정치체제이고, 우중(愚衆)의 폭정과 방종으로 흐를 소지가 많다고 비판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아가 크세노폰은 다른 동맹도시에게 조세의 징수와 재판권의 시행에서 상당한 차별과 불이익을 주는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행태도 비판한다. 특히 동맹국 시민의 범죄행위를 아테네 법정에서 재판하는 것은 아테네 민중의 야비한 행태라고 질타한다. 크세노폰이 스스로 “아테네 정치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분명하게 말하는 이유는 그만큼 타락한 아테네 정치제도의 개혁을 강렬하게 희구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정치제도사를 편년체 방식으로 객관적 사실 위주로 기술하고 있다. 솔론의 입법이 아테네에 민주적 성향의 기초를 다진 것으로 평가한 것을 제외하곤, 아테네의 정치적 격변과 제도의 변천에 대해 특별한 평가적 의견을 내놓지 않고 구체적인 정치제도사의 내용을 차분히 기술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저술로 아테네의 법제를 상세히 살필 수 있게 된 점은 참으로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테네의 정치제도사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크세노폰의 <그리스 역사> 등의 사서나 문학작품에 나오는 단편적인 내용만으로 그 윤곽을 추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먼저 아테네의 주요 관직의 선출 제도와 방식, 재판제도 운영, 행정관리의 임무와 직무 수행 절차를 소개하고 있다. 또 민회와 법률 관습 체계도 상술하고 있다. 귀족이 중심이 된 아레오파고스 의회와 민중이 중심이 된 민회의 운영, 그리고 시민의 사회생활에 대한 규율과 민사상의 분쟁 해결, 제례의 시행 규칙 등 광범위한 분야를 다루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민주정의 기틀을 다진 솔론의 개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 아테네의 현인 솔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솔론이 귀족파와 민중파, 부자와 가난한 자 양쪽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어느 한편에 치우지지 않고 중립을 지켜내며 중용적인 법률을 입법한 과정을 여러 편의 솔론의 시를 인용하면서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정치제도사의 기술 방식으로서는 상당히 인상적인 대목이다. 솔론이 얼마나 중립적 입장에서 혁신적 입법을 세우려 진력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솔론은 자신의 개혁정치를 이렇게 회고한다.

"민중에게 충분한 은혜를 베풀었다.
명예를 줄이지도 않았고, 과도하게 주지도 않았다.
힘이 있고 돈이 있는 사람들
그들도 아무런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나는 양편 모두를 위해 강한 방패를 들고 서서
어느 편도 부당한 승리를 거두지 않도록 하였다."

귀족과 민중의 대립 사이에서 솔론은 어느 한편에 과도한 이익이 돌아가 갈등의 증폭되지 않도록, 즉 어느 편도 승리하지 않도록 만드는 절묘한 입법과 정책을 시행하려 애썼다는 이야기다. 솔론은 범상한 정치가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사회갈등의 요체를 꿰뚫어 보는 안목과, 이를 해결할 유효한 정책 수단을 강구할 줄 아는 지혜를 두루 갖췄던 것이다.

오늘날 계층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많은 국가에서 솔론과 같은 지혜와 뚝심을 가진 훌륭한 지도자가 절실하다. 국가 부도의 위기에 이른 오늘날의 그리스야말로 자신들의 훌륭한 조상인 솔론과 같은 현인이 다시 나타나길 염원할 것 같다.

솔론은 민중이 지도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고 민중 또한 어떻게 대접받아야 하는 지에 대해서도 의미심장한 시를 남겼다.

"민중은 이렇게 지도자를 따를 때 최선의 상태가 된다.
너무 자유로워도 안 되고 너무 압박받아도 안 된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사람에게
부가 많이 생길 때는 충족이 자만을 낳는다."

솔론은 민중에게는 지도자와 국가 법률에 순종하며, 건강한 정신과 자족의 미덕을 갖출 것을 권장했다. 또 권력을 가진 통치자들에게는 민중에게 지나친 자유를 주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지나친 통제를 가해서도 안 된다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국가권력에 대한 민중의 자발적 복종과 권력자의 자기 절제의 덕목을 강조한 것이다. 어느 한편이 상대에게 자신에게 유리한 덕목만을 일방적으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 국민과 권력자들이 각자 자신에게 요구되는 미덕을 먼저 실천하고 상대의 덕목을 요청할 때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진다. 솔론의 갈파는 이런 덕목들이 희미해진 지금의 우리 사회에 주는 따끔한 교훈 같기도 하다.

이렇듯 2천 5백년이 넘은 오늘날에도 고대 그리스 정치제도사가 주는 시사는 적지 않다. 스파르타나 아테네 모두 시민들의 자유를 신장시키면서도 시민들이 방종으로 흐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고민했다. 또 평등과 불평등사이의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입법을 위해 끊임없이 갈등과 대립을 겪기도 했다.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나 아테네의 솔론과 같은 영명한 정치가의 출현과 그들에 의한 현명한 입법은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양대 도시국가의 번영의 초석을 다졌다. 물론 부국강병을 위한 훌륭한 정치제도의 설계도 중요하다. 하지만 건강한 사회 기풍의 조성이 뒤따라야 한다.

스파르타인들은 비겁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회 기풍을 통해 강성 군사국가로 도약했다. 또 아테네의 경우 솔론과 같은 걸출한 지도자가 나서서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기 절제와 중용, 그리고 배려의 정신을 적극 권장했다. 이런 노력이 귀족과 민중의 계층갈등으로 분열되었던 아테네의 사회통합을 이루는 데 기여했다. 국민 행복시대를 열기 위해 국민통합을 추구하는 우리도 건강한 국민정신의 진작을 위해 애쓰던 스파르타와 아테네인들의 지혜를 다시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박경귀 대통령 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국민통합기획단장

   
 ☞ 추천도서: 『고대 그리스정치사 사료』, 아리스토텔레스, 크세노폰 외 지음, 최자영·최혜영 옮김, 신서원(2002), 1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