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문상진기자] 노벨상 시상이 시작된 가운데 논란 많은 역대 수상자가 눈길을 끌고 있다.

5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노벨 의학상을 시작으로 오는 12일까지 올해 각 부문 노벨상 시상이 이어진다.

노벨상은 지난 1901년 첫 시상 이래 수상자 선정을 둘러싸고 적격 여부나 정치·문화적 편향성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노벨상 시상이 시작된 가운데 논란 많은 역대 수상자가 눈길을 끌고 있다. /사진=YTN 방송화면

특히 노벨평화상과 관련해선 알프레드 노벨의 유지에 위배된 '불법적 사례'가 많다는 주장이 노벨상 수상 단체들에서도 제기되는 실정이다.

마하트마 간디는 5차례나 평화상 후보에 올랐으나 상을 받지 못했다.

소설 '구토'의 프랑스 작가 장 폴 사르트르는 1964년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됐지만 "서양 편중, 작가의 독립성 침해, 문학의 제도권 편입 반대" 등을 이유로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독일 공영 도이체벨레 방송과 AP통신 등 몇몇 외신은 5일 노벨상 시즌을 맞아 가장 논란이 많은 역대 노벨상 수상자 사례를 각기 정리해 보도했다.

◆ 1912년 평화상 = 수상자 엘리후 루트 전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의 필리핀 점령정책을 입안한 인물이다. 미국의 점령 당시(1899~1902년) 필리핀인 120만명 가량이 피살됐다는 주장이 있어 논란이 일었다.

◆ 1918년 화학상 = 독일 화학자 프리츠 하버가 암모니아 합성법을 발명, 화학비료 제조를 통해 세계 식량생산 증대에 기여한 공로로 받았다.

'공기로 빵을 만든 과학자'란 칭송을 듣던 하버는 이후 1차대전 당시 여러 독가스를 개발해 사용을 적극 주창, '화학무기의 아버지'라는 악명도 갖게 됐다.

같은 화학자이던 부인은 이를 만류하다 무시당하자 자살했고, 유대인인 하버는 1934년 히틀러에 의해 독일에서 추방당했으며, 나치수용소 유대인 학살 때 그가 개발한 독가스 치클론B가 사용됐다.

◆ 1935년 평화상 = 독일의 평화운동가이자 작가인 카를 폰 오시츠키가 받았다. 지금 기준으로는 나치 독일이 비밀리에 재무장한다는 것을 폭로하고 투옥당한 그의 수상이 문제 될 것은 없다.

그러나 당시엔 독일 국내 정치 개입과 나치 정권에 대한 도발로 여겨졌으며, 히틀러는 자신의 통치 기간에 독일인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했다.

독일의 보복을 우려한 노르웨이 정부 압력을 받아 노르웨이 왕실 가족은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심사위원 2명도 사임했다.

◆ 1945년 화학상 = 핵분열을 발견한 독일 과학자 오토 한이 받았다. 한은 이 발견의 군사적 응용연구는 한 바 없지만 결국 핵폭탄 제조에 사용됐다.

노벨위는 1940년 수상자를 결정했으나 히틀러의 수상 금지 탓에 한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고 전쟁이 끝난 몇 개월 뒤에 상을 받았다.

◆ 1948년 의학상 = 스위스의 파울 뮐러는 말라리아 등 감염병을 옮기는 모기를 비롯한 해충을 박멸하는 DDT를 제조했다.

2차대전과 그 이후 한동안 이 살충제는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는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생물체 내에 축적돼 인간과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비판을 받고 사용이 금지됐다.

◆ 1970년 문학상 = 동서 냉전이 최고조에 있던 당시 구소련 반체제 작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에게 문학상이 수여되자 소련은 이를 적대행위로 여겼다.

솔제니친은 시상식에 참석한 뒤 귀국하지 못할 것을 우려, 소련에 머물렀으며 4년 뒤 강제적으로 소련에서 망명한 뒤에야 수상했다.

◆ 1973년 평화상 = 헨리 키신저 미국 국무장관과 북베트남 지도자 레둑투는 베트남전 휴전협상 기여를 인정받아 수상자로 선정됐다.

그러나 레둑투는 "조국이 아직 평화롭지 않다"며 수상을 거부했고 키신저는 노르웨이 주재 미국 대사에에게 대리 수상을 요청했다.

반전주의자들의 비판 속에 노벨상 심사위원 2명이 사퇴했으며, 이후에도 베트남전은 확산하며 2년여를 더 끌다 미군 철수로 끝났다.

◆ 1976년 경제학상 = 정부의 주 역할을 화폐의 안정적 공급이라며 여타 시장 개입을 극도로 반대한 '자유시장'의 주창자인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받았다.

좌파는 프리드먼의 경제사상 자체를 문제 삼았으며, 인권단체들은 악명 높은 칠레의 군사독재자와의 관계에 대해 비판하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피노체트는 프리드먼의 경제이론에 영감을 받았다고 칭송했으며, 프리드먼은 노벨상을 받기 한 해 전에 칠레를 방문해 피노체트와 만나기도 했다.

◆ 1994년 평화상 =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기구 의장과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의 중동 평화 노력을 인정하고 평화회담을 촉진하기 위해 공동수상자로 선정했다.

그러나 이듬해 라빈 총리가 평화협상에 반대하는 이스라엘 극우 민족주의자에 의해 암살되고 무력충돌은 오히려 확대됐다.

노벨상 심사위원 카레 크리스티안센은 '테러리스트' 아라파트 선정은 잘못이라며 사임했으며, 추후 또다른 위원은 이스라엘의 공격성 때문에 페레스의 수상이 취소되기를 바랐다고 밝히기도 했다.

◆ 2004년 문학상 = 오스트리아 페미니스트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가 발표되자 '도대체 누구지?'라는 반응이 많았다.

위원회는 독일어권 밖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가인 옐리네크 선정 사유로 "소설과 희곡 저변에 흐르는 음성과 반(反)음성의 음악적 흐름이 사회의 진부함과 지배권력의 부조리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한 심사위원은 옐리네크의 작품이 "예술적 구조의 흔적이 없이 삽으로 퍼서 쌓은 듯한 텍스트의 덩어리"라며 사임했으며, 평단 안팎에선 정치적 편향성이 작용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 2005년 평화상 =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핵무기 확산을 막은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반핵단체 등으로부터 "민수용 핵발전소 건설을 촉진하고, 원자폭탄 제조의 빌미를 제공한 단체"라는 비판을 받았다.

◆ 2009년 평화상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되자 세계의 많은 사람이 놀라며 노벨위를 비판하고 조롱했다.

위원회는 지구온난화 대처, 유엔 지원, 핵무기 없는 세상 만들기 등에서 많은 외교적 성과를 이뤘고 앞으로도 잘하도록 격려하려 선정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시 오바마는 대통령 취임 1년도 안 된 시점이었다. 추후 당시 백악관 비서실장이던 람 이매뉴얼 조차 미국 주재 노르웨이 대사에게 "노르웨이가 오바마에 '아첨'하고 있다"며 '면박'을 준 일화가 공개되기도 했다.

◆ 2011년 의학상 = 프랑스의 율레스 호프만, 미국의 브루스 보이틀러, 캐나다의 랠프 스타인만 등 3명이 면역체계 활성화 관련 발견으로 공동 수상했다.

논란은 미국 뉴욕 록펠러대학 교수인 스타인만이 수상자 발표 며칠 전 암으로 사망한 사실이 알려지며 벌어졌다.

노벨상 규정상 수상자는 생존자여야 한다. 수상자 발표 이후 12월10일 물리학상 시상식 사이에 사망하면 관계없으나 발표 전에 사망해서다.

노벨위는 긴급회의를 열어 수상자 선정과 발표 당일까지도 생존한 것으로 알았기에 예외를 인정키로 했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