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만든 NL정서가 민족 나르시즘의 괴물 만들었다
   
▲ 조우석 주필

국사교과서 좌편향 문제는 그게 ‘젊은이들의 독극물’이란 점에서 걱정이다. 오죽했으면 4년 전 국방부가 “현행 국사교과서로 배운 젊은이들이 군대에 들어오면서 전투력에 문제가 생기고 있다”고 하소연했을까? 위중한 지금 상황에서 최고통치자와 당정(黨政)이 검정제를 국정제로 바꿀 것을 결단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자해(自害)의 단계를 넘어 반역적 성격이 분명한 국사 교과서가 교실에서 읽히는 아찔한 상황을 체제수호의 차원에서 대처하겠다는 절박한 인식이다.

분명한 건 국사학계 전체가 문제란 점이다. 검정 교과서들의 반 대한민국, 반 국가의 성격을 바꿀 자정의 기능을 저들은 이미 상실했다. 그점에 대한 사회적 합의도 대강은 이뤄졌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경제원에서는 ‘역사학자들만 모르는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데, 필자에게 주어진 이 시간을 국사학자들에게 ‘숨은 신(神)’내지 ‘정신적 스승’으로 떠받들여져온 인물 하나를 제거하는데 쓰려 한다.

그 정신적 스승이 국사학자 그룹에서 공유하고 있는 민중사관이란 것의 몸통에 해당하는데, 그를 둘러싼 거짓 신화를 벗겨내지 않고서는 국사교과서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인식 때문이다. 국사학자들의 90% 이상이 좌편향됐고, ‘우리민족끼리’의 NL(민족해방)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한 참담한 현상을 혁파하기 위해선 어쩌면 그게 가장 확실한 방법일 수 있다. 이런 비판작업을 필자 같은 저널리스트가 해야 하는 이유도 자명하다.

국사학자들의 한계를 우리 모두가 잘 알기 때문이다. 단언컨대 저들은 자기갱신 능력, 질문을 던지는 기능 그리고 시대가 요청하는 창조적 지성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없다. 실은 소수의 핵심 국사학자들을 제외하곤 ‘숨은 신’의 존재를 미처 의식 못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편협한 민족주의 정서에 갇혀 있는 국사학자 대부분이 ‘그 분’으로부터 지적-정서적 세례를 받았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 국사학계 전체가 그러하고, 1970년대를 전후해 지금까지 문학을 포함한 인문사회과학 전체도 마찬가지다.

   
▲ 국사학자들의 정신적 스승은 국사학자 그룹에서 공유하고 있는 민중사관이란 것의 몸통에 해당한다. 그를 둘러싼 거짓 신화를 벗겨내지 않고서는 국사교과서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다. 현재 국사학자들의 90% 이상이 좌편향됐고, ‘우리민족끼리’의 NL(민족해방)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때문에 이 글은 그런 학문적 틀을 제공했던 ‘숨은 신’, 그러나 유통시간이 끝난 그에게 학문적 사망선고를 내리는 작업인데, 요즘의 군사용어로는 지휘부에 대한 원점 타격이다. 좌편향화된 국사교과서를 만들어내는 세력 즉 다수 국사학자들과 원로 좌파 국사학자(전 고려대 강만길, 전 국편위원장 이만열 등을 포함한 서중석 교수 등 중진학자 그룹)에 대한 응징은 물론 보다 근본적인 외과수술을 통한 적출(摘出)요법이다. 이 글이 다소 비대중적이고, 또 현학적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하는 수 없다. 한 번은 밟아야 할 수순이다.

‘숨은 신’은 전 연세대 사학과 교수인 경제사학자 김용섭(1931년 생)을 지칭한다. 해방 이후 한국의 지식사회는 일제가 심어줬던 식민사관(한반도 정체성 이론)의 족쇄를 극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었는데, 그걸 풀어낸 영웅적 해결사가 김용섭이었다. 김용섭은 기념비적 저술 <조선후기농업사연구>(1970)에서 조선후기에 자생적 근대화의 싹을 규명했다. 그걸 내재적 발전론 혹은 자본주의 맹아론이라고 하는데, 일제가 심어준 식민사관의 독을 없애줄 위대한 해독제로 즉각 각광을 받았다.

한국도 일본과 같은 발전 경로를 걷고 있었으나 이게 사악한 외세 일본의 침략을 받고 왜곡됐음을‘과학적으로’ 규명했기 때문이다. 한국인 모두가 심정적으로 믿고 싶었던 것을 김용섭이 학문의 이름으로 설명해줬으니 학계 전체가 만세 부를 경사였다. 구체적으론 이렇다. 그는 본래 연구밖에 모르는 학자로 유명했다. 1997년 연세대 정년 퇴임 이후에도 매일 아침 도시락 2개를 싸들고 연희동의 연구실로 찾았을 정도로 공부벌레였다.

그럼 내재적 발전 혹은 자본주의 맹아를 어떻게 규명했단 말일까? 구체적으로 18~19세기 조선시대의 토지대장 자료를 꼼꼼하고 세밀하게 분석하고 파헤쳤다.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외세가 개입하기 전 조선 후기에 농업생산력이 무럭무럭 발전하고 있었고, 사적 소유가 확립되는 중이었다는 우리가 믿고 싶었던 가설을 그가 여보란 듯이 입증했다. 토지사유화가 지체됐기 때문에 자생적 근대화가 불가능했다는 ‘정체성 이론’의 논리를 그런 구체적 자료와 논리로 돌파한 것이다.

“외래 이론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근대역사학에 걸맞는 실증적 연구”라는 점에서 학계가 그를 찬양했다. 학문적 엄정함에서 넘볼 수 없는 큰 봉우리라는 평가(이경식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 등)를 누구나 한다. 하지만 김용섭 이론에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도식(圖式)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사람들은 굳이 문제 삼지 않았다. 국가와 민족을 지향하는 강력한 목적론이 들어있다는 점도 대충 넘겨버렸다.

직후 민족주의 사학이 국사학계의 지배적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요즘 말로 그게 대세였다. 내재적 발전론은 국사학을 넘어 국문학계의 사설시조, 판소리계 소설, 탈춤 등 민중문화에 대한 재발견으로 이어졌다.(그리고 이게 훗날 1980년대 운동권의 문화적 모태인 1970년대 민중문화운동 그리고 창비 그룹 백낙청의 민족문학론으로 발전한다.) 일견 감사한 일이다. 그 이전 한국사회에서로 만연했던 민족성에 대한 비하, 이른바 엽전의식이 극복된 것도 김용섭 그 이후다. 박정희 시대의 기적적인 경제개발 성공과 시기적으로 맞아떨어진 측면도 없지 않다.

   
▲ 편협한 민족주의 정서에 갇혀 있는 국사학자 대부분은 자기갱신 능력, 질문을 던지는 기능 그리고 시대가 요청하는 창조적 지성으로 거듭날 가능성이 없다. 사진은 미래엔 국사교과서 현대사 첫 페이지.

어쨌거나 다산 정약용을 마치 근대의 탐정처럼 다루고, 정조를 서구의 계몽군주처럼 묘사하는 문학-영화를 포함한 다양한 문화상품의 등장이란 모두 그 덕이다. 조선후기에 폼 나는, 우리만의 자본주의적 발전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는 ‘나르시즘의 자뻑’이었다. 이제 앞뒤가 꿰어지시는가? 그점에서 김용섭 사학은 해방 이후 반일(反日)-반 외세의 한국인 멘탈리티를 설명해주는 패러다임일 수도 있는데, 그건 동시에 양날의 칼이기도 했다.

부정적인 점을 지적하자면, 김용섭 사학은 이후 너무 마구 달린 결과 민족주의사학을 거쳐 1980년대 민중사학으로 가지를 쳐나갔고 급기야 오늘날 좌편향의 친북 교과서라는 희대의 괴물을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원인제공했다. 민중사학은 “역사발전의 주체는 민중”이라는 명제에 따라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을 목표로 한다. 일테면 김용섭의 아류인 전 고려대 교수 강만길은 1970년대부터 기존 한국사 연구가 분단체제 고착에 이바지한 학문이라고 비판했다.

전 한양대 교수인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1974), 『우상과 이성』(1977)도 원조는 김용섭의 <조선후기농업사론>이다. 빼놓을 수 없는 게 따로 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해금된 북한학계의 연구성과가 대거 한국사회에 소개되면서 지금 좌편향 국사학의 모델이 고착됐다. 기존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이 북한 마르크스주의 사학을 만나 끝내 민중사학이라는 반역의 역사학으로 진화해버린 것이다. 여기에선 역사인식의 주체가 대한민국이 아니다. 국민-국가가 아닌 민족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민족 타령을 반복하다보니 ‘우리민족끼리’의 종북의식 씨앗도 뿌렸다. 그 원조 중의 원조 역시 김용섭인데, 그래서 김용섭은 두 얼굴을 가졌다. 식민사학을 극복한 영웅이자, 지금의 병든 국사학계를 만든 원조다. 그런 그의 숨겨진 면목이 우리민족끼리의 친북주의 내지 종북주의인지도 모른다. 오늘 첫 공개하는 충격적인 일화 하나가 그걸 암시해준다.

김용섭은 1999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인사차 찾아온 연세대 사학과 출신의 제자와 대화하다가 은연중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왜 김대중 대통령은 당장 38선을 열지 않는 것이야?” 자신의 제자 A(현재 M대학 교수)가 학부 시절에 가졌던 386세대 식의 운동권 마인드를 여전히 갖고 있을 것을 전제로 하고 그런 발언을 한 것이다. 놀랍지 아니한가? 그게 실언일 리 없다면, 그동안 감춰져온, 국사학자들이 전혀 몰랐던 김용섭의 멘탈리티를 드러내주는 중차대한 암시일 수 있다.

나의 잠정결론은 이렇다. 김용섭, 그 자신이야말로 ‘우리민족끼리’의 NL(민족해방)정서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물론 확신을 품었던 위인이다. “그 분이 세상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게 후학들의 증언인데, 그 또한 김용섭의 제대로 보지 못한 소리에 불과하다. 어쩌면 내재적 발전론을 첫 개진했던 학자다운 기괴하고, 뒤틀린 정치의식의 실체가 그것인지도 모른다. 즉 그가 갖고있던 NL정서란 2015년 지금 좌파 무리가 내세우는 한미연합사 해체, 연방제 통일, 국가보안법 폐지 등의 구호와 별반 차이가 없다.

   
▲ 김용섭 사학은 민족주의사학을 거쳐 1980년대 민중사학으로 가지를 쳐나갔고 급기야 오늘날 좌편향의 친북 교과서라는 희대의 괴물을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원인제공했다.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이 북한 마르크스주의 사학을 만나 끝내 민중사학이라는 반역의 역사학으로 진화해버린 것이다. 사진은 9월 8일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국사교과서 국정화를 통한 교육정상화를 촉구하며 기자회견을 하는 보수단체 회원들./사진=연합뉴스

지금까지 성역으로 남아있는 김용섭에 대한 나의 이런 문제제기는 국내에서 거의 처음으로 알고 있다. 9년 전 열렸던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성균관대 윤해동 교수가 약간의 학문적 비판을 가한 게 전부였다. 그는 “(김용섭의) 내재적 발전론이 민족 지상주의 논리에서 만들어졌기에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을 마비시킨다”며 “내재적 발전론의 전통을 붙들고 있는 것은 헛된 일이며 전통은 필연적으로 붕괴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쉽게도 그게 전부였다. 이후 반향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언제까지 그런 정신적 착란-반역적 태도를 학문의 이름으로, 관념의 사치 차원에서 허용할 것인가? 김용섭에 대한 나의 이런 판단을 거들어주는 썩 훌륭한 판단자료가 따로 있다. 국사교과서를 관류하는 집단정서인 좌파 민족주의 혹은 NL정서를 ‘민족 나르시즘’의 타락이라고 경고했던 사람이 논객 박성현인데, 그게 진실이다. 그에 따르면 지금 국사학계는 “순수하고 착한 조선민족의 고고함을 조명하는 민족 나르시즘”에 빠져있다.(‘역사교과서 국정화 전쟁을 위한 출사표’)

나르시즘에 빠진 그들은 한국근현대사를 외세 대 민족의 대립구도로 파악한다. 왜 그러한 침략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문명사적 통찰은 없이 ‘나쁜 놈’이 ‘착한 우리’를 짓밟았다는 식이다. 그런 국사학은 결국 피해망상적 정신분열증으로 타락한다. 그렇다면 김용섭이야말로 집단 나르시즘 혹은 피해망상증을 정당화시켜준 사람이다. “왜 김대중 대통령은 당장 38선을 열지 않는 것이야?”란 발언은 김용섭 스스로 민족 나르시즘에 빠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헌법적 가치를 외면했고, 동시에 친북정서를 체화했다는 증거다. 다음은 함께 경청해야 할 박성현의 발언이다.

“협소하고 뒤틀린 그런 관점을 유포시키는 자들의 속내는 평양 전체주의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한편 평양 전체주의에 대한 부역질을 도덕적인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김용섭 식의 내재적 발전론이란 민족 나르시즘을 가능하게 만드는 거대한 허구에 다름 아니며, 결국은 지금 국사학자들처럼 마비된 정치의식과 친북, 반대한민국의 반역 정신으로 뻗어갈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맞다. 재확인하지만, 김용섭 사학은 유통기간이 끝났다. 그걸 암시해준 게 문학평론가 김윤식이다. 김윤식은 평론가 고(故) 김현과 함께 그 유명한 저술인 <한국문학사>(1973년)를 썼는데, 그게 모두 김용섭의 강력한 영향 아래서 가능했다.

김용섭이 조선후기에 자본주의의 맹아를 발견했다고 과감하게 끌어올리는 바람에 김윤식-김현은 한국문학의 기원을 영·정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문학사>를 쓸 수 있었다. 그래서 김윤식은 2006년 학계모임에서 “식민사관과의 투쟁은 내 세대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한국에서 근대의 씨앗이 자생적으로 자라고 있었다는 김용섭의 내재적 발전론이 있었기에 한국근대문학의 기원을 18세기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근대화론이 한 시절의 진리일뿐 변화된 지금 시대엔 더 이상 유통될 수 없는 것임을 암시했다. “칼 포퍼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말한 ‘진리는 논박될 수 있을 때라야 진리이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라. 반증 가능성이 없다면 진리가 아니다. 우리 시대를 관통했던 진리가 진리일 수 있었던 것도 지금과 같은 반증가능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고 선언해 주변을 놀라게 했다.”

그것은 김윤식으로 상징되는 시대적 진리가 역사적 속견(俗見)으로 떨어질 가능성을 용인하겠다는 것, 다시 말해 자신을 역사의 종착역이 아닌 수많은 간이역일 수도 있음에 대한 암시라고 당시 한 일간지가 보도(동아일보 2006년 5년 29일자 문화면) 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의미심장하게 되물었다. “우리가 힘겹게 구축한 진리가 진리로 통용될 수 있었기에 국민소득 1만 달러 시대도 가능했다. 이제 당신들 차례다. (우리 세대의 진리를 넘어서) 못해도 국민소득 3만7000달러 시대를 만들어 낼 자신이 있나?”

실로 의미심장하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그 발언은 김용섭과 자신이 만들어낸 자본주의 맹아론과 내재적 발전론이 벽에 부딪쳤다면, 2015년을 사는 우리가 새로운 길을 뚫으라는 조언으로 들린다. 그게 진리를 구하는 자세이리라. 그래서 불교에서는 감히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정신을 말한다. 부처를 보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 그게 맞다.

내재적 발전론이 편협하기 짝이 없는 복고적 민족주의 정서로 발전하고, 국가 대신 민족을 들먹이는 기이한 우리민족끼리 신조로 변질된 것이 지금 검정 교과서들의 뒤틀린 정신세계다. 끝내 통일지상주의의 환상에 빠져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지적-정치적 파산(破産)으로 변질됐다는 점도 기회에 재확인하는 바이다. 그걸 새삼 드러내기 위해서 김용섭의 실체를 밝혀야 했다. 결론은 자명하다.

국사학자들의 정신적 스승 김용섭부터 친북-반대한민국의 뒤틀린 정치의식을 품고 있었다는 것, 그건 민족 나르시즘의 가짜 신화를 뻥튀기하는 순간(‘내재적 발전론’을 부풀리는 순간) 이미 배태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국사학계가 김용섭을 죽여야 하며, 그래야 새로운 시야 속에 진리를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조우석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