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아서 북한은 중국의 '리베로'…박 대통령 방미 주목

   
▲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
핵을 고집하는 북한 때문에 중국의 대북 ‘피로감’(Fatigue)이 쌓이자, 중국이 드디어 변하지 않겠냐는 섣부른 기대감이 고조된 적이 있다. 불과 1년 전, 북·중 관계가 ‘혈맹’이 아니라 보통국가 관계로 변하고 있다는 낙관적 전망이 부상했다. 작년 시진핑 주석의 방한은 그런 바램에 정점을 찍었다.

조선노동당 창건 70년이었던 쌍십절(10월 10일)을 전후해 우려됐던 북한의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는 다행히도 가시화되지 않았다. 예상(?)과 달랐던 북한의 태도 변화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중국의 압박이 통했다는 의미인가?

지난 8월 말 북한주재 중국대사가 중국 전승절(9월 3일)을 앞두고 새삼 뜬금없이 북·중 혈맹관계를 강조하고 나선 일은 중국 공산당 서열 5위 류윈산 상무위원의 평양방문을 암시하는 긍정적 단서였는지 모른다.

북한군 2만여 명과 주민 10만여 명을 동원해 사상최대 규모라는 열병식 연설에서 김정은은 화답이라도 하듯 시위성 군사력 과시보다 ‘인민애’를 강조하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번 경우를 한·미·중의 북핵 공조가 승리(?)한 것으로 착각한다면 민망한 일이다. 사실 ‘승리’라는 표현 자체가 객쩍다. 북한은 언제고 미사일 발사건 핵실험이건 할 수 있는데 승리라고 말하면 그건 기만이거나 선동이다.

반대로 이번 열병식의 밋밋함(?)은 북한이 유연한 현실주의적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한다. 현실주의적이라 함은 이익과 이념(명분)이 충돌할 때 이익을 우선하는 정서를 반영한다.

   
▲ 북한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10일 오후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육성연설과 함께 2만여명 병력이 동원된 대규모 열병식이 개최됐다. 이날 외빈 중 유일하게 류윈산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주석단에 올라 김 제1위원장 바로 옆에 나란히 섰으며, 열병식 동안 두 사람은 종종 환담하는 모습을 보였다./사진=TV조선 영상 캡처
국제정치학의 핵심 개념 중에 ‘억지’(Deterrence)와 ‘강제’(Compellance)가 있다. 둘 다 군사력과의 크기와 동원 가능한 국력의 총량을 공통분모로 삼는다.

억지와 강제에 대한 고전적 정의(Shelling, 1966)는 '상대가 무엇을 하도록, 또는 하고 있는 것을 중지하도록 만드는 위협과 무엇을 아예 시작하지 못하게 하는 위협간의 차이'로 설명한다. 전자가 강제이고 후자가 억지다.

최근(Goldstein, 2000)의 세련된 설명은 '억지란 상대에게 자신의 행동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보다 그로 인해 초래될 비용이 크다는 걸 인식시켜 그 행동을 단념시키는 것'으로 다듬어졌다.

미사일과 핵이라는 선택 가능한 무력시위를 ‘시작하지 않은 일’은 한·미·중으로부터 가해진 억지의 성공이 아니라 북한이 얼마나 현실주의적 계산에 능한지 나타내는 사례로 접근해야 북한 정권의 속셈을 가늠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단념은 일시적이며 임시적인 잠깐 동안의(interim) 부작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북·중관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지정학적 수요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동북아 안보관계의 필연성에 뿌리내리고 있다.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절묘한 수사로 양국 관계의 특수성을 전세계에 알린 노회한 국가원로들이 포진해 있는 중국은 오로지 자신만이 쓸 수 있는 대북카드를 쥐고 있는 거의 유일한 나라다.

북한의 핵 집착에 대해서도 중국의 진심은 이를 관리 가능한 일이라고 믿을 것 같다. 북핵에 휘둘리는 한국, 일본, 미국과 달리 중국으로선 ‘북핵 불가’ 원칙을 유지하되 북한발 도발은 중국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는 방향으로 안보지형도가 흘러가기에 이해관계의 강도가 다를 수 밖에 없다.

현실을 보자. 북·중 접경 길이는 무려 1600km라고 한다. 경부고속도로의 4배에 맞먹고 남북한 총 길이 1100km 보다 길다. 북한의 종합 핵 시설단지 영변과는 불과 100여 km에 불과하다.

중국의 최대 과제 중 하나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14개 국가들과 중국 내 56개 소수민족을 별 탈없이 유지·관리하는 일이다. 중국 지도부에게 북한이 가진 상징성은 클 수 밖에 없다.

동북아시아에서 북한은 중국이 자기 입맛대로 쓸 수 있는 ‘리베로’ 카드라는 점을 류윈산의 평양방문은 다시금 보여주고 있다.

북한의 핵 추구는 지대추구 행위(Rent-Seeking Behavior)와도 같다. 북핵에 이해가 얽혀있는 관련국들로부터의 ‘보상’이 북한에게는 거저 얻는 지대수입과도 같다. 이 지대비용의 주요 물주는 미국이나 한국 같지만 흥정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위자는 중국이기에 북한의 존재는 여타 접경국과는 격이 다른 것이다.

6자회담의 폐쇄로 한동안 북핵문제를 포함, 북한 이슈가 고립돼 있는 것으로 보였다. 류윈산의 방북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관심과 김정은의 ‘자제’가 북한 대외관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지, 역사 속에 묻힐 찾잔 속 이벤트로 전락할지 아직은 단정하기 이르다. 곧 있을 박대통령의 방미가 각별한 이유다.

6자회담의 실패로 한동안 소원했던 북·중관계는 여전히 살아있다. 앞으로 어떻게 자리매김을 할지 귀추가 주목될 뿐이다. 이 틈새에 한국이 섣불리 뛰어갈 자리란 없다.

한국이 독자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면 미국과 일본을 주도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역량이 있음을 중국이 인정할 때 한국의 자리는 조금이라도 ‘감안’될 것이다.

곧 있을 박대통령의 방미가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모범답안은 이미 나와있다. /김효진 남북경제연구소 기획연구실장·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