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포 세대 가장한 철지난 이데올로기 전파…사회주의적 엘리트 의식 강제

자유경제원은 ‘자유북소리’ 코너를 통해 편향과 거짓으로 점철된 언론과 교육, 왜곡된 신념을 아무 것도 모르는 학생들에게 주입하려는 도서와 예술을 고발한다. 편향된 시각과 서술은 기본이고 사실관계를 왜곡하는 우리나라 언론계 교육계에 자성을 촉구하고, 편향된 내용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전하는 예술, 도서계의 반성을 꾀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자유경제원은 ‘자유북소리’ 코너를 시작했다.

자유북소리 코너의 문제의식은 공익을 내세운 공영방송까지 오염된 대한민국 언론계, 그릇된 방향으로 학생들을 호도하는 일부 몰지각한 교사들 교육현장, 386세대의 단골 레퍼토리를 답습하는 문화예술계에 있다. 향후 자유경제원은 자유북소리 코너를 통해 정기적으로 전문가와 일반시민들의 의견 및 제보 모두를 받아 대한민국을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한다. 아래 글은 자유북소리의 ‘예술고발’ 게시판에서 최공재 영화감독이 작성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헬조선 잔혹동화 읽어주기’ 칼럼이다. [편집자주]

 

   
▲ 최공재 영화감독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헬조선 잔혹동화 읽어주기

줄거리

주인공 수남(이정현)은 고등학교를 갈 것인가 바로 취업할 것인가를 두고 망설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하지만, 학교에서 배운 것은 아무 소용없음을 알게 되고 후회한다. 공장에서 일하는 귀가 안 좋은 규정은 집을 사고 싶은 로망이 있다. 그와 사귄 수남은 보청기부터 달지 않으면 결혼하지 않겠다는 협박에 수술을 하지만, 규정은 수술 후 보청기 고장으로 손가락이 잘리는 사고를 당하게 된다. 잘린 손가락을 수남의 주머니에 넣어뒀는데 수남이 깜박하는 바람에 접합수술을 받지 못한다. 그 충격으로 규정은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폐인생활을 한다. 수남은 이런 규정을 위해 규정의 꿈인 집을 사기로 결심하고, 십 년 동안 온갖 일을 하며 돈을 모으지만 집값도 같이 올라 결국 대출을 받아 집을 마련한다.

하지만, 새로 이사 온 집에서 규정은 벽에 봉을 박고 거기에 목을 매단다. 수남이 겨우 살려내지만 규정은 식물인간이 되고, 집을 살 때 받은 대출의 이자와 규정의 병원비에 시달리던 수남은 집이 재개발될 거란 소식을 접하게 된다. 수남은 빚을 청산할 생각에 재개발에 반대하는 사람들 심리상담사, 재개발반대 대표를 죽이고, 이를 수사하는 형사 2명도 죽인다. 그리고 규정을 퇴원시켜 오토바이에 태운 후 신혼여행을 떠난다.

   
▲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재라기보다는 과거의 이야기에 집착한다. 386세대의 단골 레퍼토리를 답습한다. 감독은 안국진. /사진=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Earnestland, 2014)의 포스터

영화평

이 영화가 현재 젊은이들의 현실을 그린 5포세대 영화라고들 한다. 과연 그럴까?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재라기보다는 과거의 이야기에 집착한다. 가난해서 대학도 못 가고 공장에 취직했다가 공장에서 사고를 당하고, 그런 남자를 평생 간호하면서 죽으라고 일했지만 쌓여가는 건 빚, 그리고 재개발을 통한 일확천금의 꿈.

이 모든 과정들은 386세대의 단골 레퍼토리일 뿐 현재의 젊은이들과는 괴리가 분명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현재의 젊은이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영화의 초반, 무수히 많은 자격증을 따는 주인공의 모습 때문이다. 수많은 자격증과 스펙들을 쌓아봤자 성공할 수 없는 세상이라는 자괴감만이 현재 젊은이들의 마음을 관통하면서 그 다음부터는 똑같은 패턴의 이야기들을 이어 간다. 영화 속 이정현이 분한 여주인공 수남은 지지리 운도, 복도 없는 인물이다. 정말 열심히 살지만 되는 일 풀리는 일 하나도 없는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는 인물이기는 하다.

하지만, 영화의 상상력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불쌍하기 그지없는 사회적 약자로 설정된 순간, 그녀는 이제 거침이 없어진다. 자신의 남편을 위해서,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동들에 면죄부가 씌어진다. 사람을 죽이는 것도, 그걸 수사하는 형사를 죽이는 것마저도 단지 열심히 살려는 주인공에게 굴레를 씌우는 나쁜 인간으로 설정해 정당성을 부여한다. 재개발지역의 이권을 위해 그녀에게 악독한 짓을 저지르는 인물로 해병대 복장을 한 퇴역군인을 설정해 기존 세대에 대한 386식 거부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야비한 인간상을 대변하는 퇴역군인 (명계남 분). /사진=영화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Earnestland, 2014) 스틸컷.

재개발지역의 이권을 챙기려는 야비한 인간으로 퇴역군인(명계남)이 등장한다. 현재 젊은이들의 좌절감을 대변해주는 것처럼 포장된 이 영화는 그렇게 또 그들의 심리를 이용한 철 지난 이데올로기 속에 집어 던져 버렸다.

또한, 자본에 잠식당한 한 개인의 이야기를 다루며 자본주의 속 인간의 개인성향을 정신병적 증세에 가깝게 위험하게 드러내고 있다.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의 엔딩 부분을 아쉬워하는 이유는 그렇게 개인의 두려움을 극대화시키다가 해피엔딩으로 끝을 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남편이 죽자, 열 받아서 병원이나 경찰서, 청와대를 폭발시켰으면 환호성을 쳤으리라.

이렇듯 영화 전체를 점철하고 있는 키워드는 '불행’과 그에 대한 '면죄부’이다. 열심히 살지만 결코 행복해질 것으로 보이지 않는 여자, 수남의 삶을 통해 '헬조선(헬Hell: 지옥+조선의 합성어로 한국이 지옥에 가까운 국가라는 뜻의 신조어) 이데올로기’를 한껏 극대화 시킨다. 대한민국 곳곳의 '수남’들은 하필이면 재수없게 헬조선에서 태어난 불행한 나라의 앨리스다.

난 이런 영화들에 참 아쉬움을 갖는다. 분명 세상에는 이 영화 속 여주인공인 '수남’같은 인물은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고 해서 실제 수남이 그런 식으로 행동할 수 있을까? 정말 수남을 위한다면 그녀의 아픔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방식은 어땠을까. 그렇게만 된다면 관객은 그녀의 아픔에 좀 더 접근하고, 세상의 문제에도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수남의 불행한 인생사를 자본주의, 우리 사회의 병폐 탓으로 돌려 공감을 사기 위한 영화적 장치들은 너무나 노골적인 탓에 오히려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이러한 헬조선 잔혹동화들은 우리에게 '아무리 성실하게 살아봤자 소용없다. 인생사 새옹지마 모두 썩은 사회 탓일 뿐’는 교훈을 던져주려는 듯 하다.

1980년생인 어린 감독이 왜 이런 식의 이야기구조를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은 이내 풀리게 된다. '노근리 사건’을 다룬 '작은 연못’을 시작으로 '문성근’이라는 정치적으로 변질된 문화권력자와, 노무현 정권의 문화부 수장이었던 이창동 감독의 '시’를 작업하며 그는 정규코스(?)를 거쳐 386세대의 정신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다. 그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한국 영화계 문화권력의 시스템은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 수사를 하는 형사들이 좁은 방에서 그녀의 양옆으로 앉아 그녀의 답답함을 표현하며 공권력의 거부반응을 표현하고 있다./사진=영화 작은 연못(A Little Pond, 2009) 스틸컷.

감독은 한국전쟁을 노골적으로 비판한 이 영화를 시작으로 영화계 386문화권력과 만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영화적 완성도는 매우 마음에 들었다. 감독이 하루 빨리 문성근, 명계남, 이창동으로 이어지는 문화권력 이데올로기의 세상에서 벗어나 조금은 더 살만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된다면 멋진 감독이 될 거란 확신이 설 정도로 말이다. 그의 영화적 재능이 이데올로기에 의해 소멸되지 않았으면 한다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는 한국영화계에 사회주의적 엘리트 의식을 강제하는 '한국영화 아카데미(KAFA)’를 통해 완성되었다. 재미있는 것은 올 9월에 그곳에서 진행한 'KAFA: 나쁜 영화들’이란 상영회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면서 스스로 나쁜(그 의미는 다르겠지만) 영화라고 인정했으니 예술고발 코너의 '나쁜 영화 1호’로 놓기에 손색이 없을 것이다. /최공재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