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우 기자
판사는 남자의 수갑을 풀어주지 않았다.

2015년 10월 16일 오전, 서울중앙지방법원 서관 5층에서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엄상필) 심리로 개최된 피고인 이모(25)씨에 대한 선고공판장에는 조금 특별한 긴장감이 떠돌았다. 이 씨의 혐의는 살인과 사체유기 및 상해. 그는 지난 5월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린 ‘시멘트 암매장 살인사건’의 범인이었다.

판사의 명령에 따라 재판정 안으로 들어온 이 씨는 마른 체구에 키가 무척 컸다. 구치소 생활에 지친 듯 얼굴은 유독 새까매보였고 표정은 침울했다. 방청객석 맨 앞줄에 앉아있는 유족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피고인석으로 간 그의 두 손엔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여자친구였던 김모 씨를 여러 차례 폭행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했던, 그녀의 시신을 여행가방에 구겨 넣고 충북 제천의 한 야산에 묻은 뒤 시멘트로 암매장했던 바로 그 손이었다.

“사람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존귀한 가치”

이날은 이 씨가 처음으로 사법부의 선고를 받는 날이었다. 검찰이 구형한 형량은 무기징역. ‘실질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는 대한민국에선 법정 최고형에 해당하는 형량이다. 판사는 “원래 수갑을 푸는 게 원칙이지만 피고인에 대한 구형량, 그리고 기타 사유를 고려해 수갑 사용을 허락한다”고 밝혔다.

검찰의 의지를 존중해 법정최고형을 선고할 심산인 걸까. 판사는 차분한 어조로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기자가 재구성한 내용으로 실제 판결문과는 다소 차이가 있음).

   
▲ 사람을 죽인 범죄자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받은 경제사범. 경제사범보다 낮은 형량을 선고받은 살인자. 기이한 아이러니 속에서 생명의 고귀함을 언급한 판결문은 조금쯤 공허하게 들렸다. /사진=MBC 방송화면 캡쳐
“피고인은 공소가 제기된 살인과 사체유기, 상해 등에 대한 범죄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있습니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존귀한 가치이고 이를 침해한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피고인의 행위에 의해 24세였던 피해자는 꿈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으며, 유족들 역시 평생 치유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유족들은 피고인의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물론 피고인을 강력하게 처벌한다고 해서 피해자의 생명이나 유족들의 상처가 회복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피해자와 유족들의 돌이킬 수 없는 억울함과 고통은 재판부가 형량을 정함에 있어 중요한 고려사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피고인은 범행 후 자살을 시도했다 자수했고, 그 이후 범행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피고인은 결정적 증거인 피고인-피해자간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모두 삭제해 피고인의 진술 이외에는 범행동기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피고인은 피해자를 살해한 다음날부터 사체유기에 필요한 도구를 준비했습니다. 충북 제천의 한 야산으로 사체유기 장소를 정한 피고인은 그 인근에 머무르면서 하루는 구덩이를 파고 그 다음날 시체를 묻은 이후 각 지방을 돌아다니며 유기도구를 은폐하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이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출근을 하기도 했고, 피해자의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내서 피해자가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가장하기도 했습니다. 유족의 전화통화 재촉이 이어지자 그제야 자살을 시도했고 자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정황으로 보면 현재 피고인이 보여주고 있는 반성의 태도나 자수 등이 과연 진지한 것인지 전혀 의문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현재까지 나온 정황으로는 계획살인의 의도를 찾을 수 없으며, 그 진의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고는 해도 피고인이 한 자수를 자수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한 피고인에게 형사처벌 전력이 없는 점 등을 고려했을 때 대법원이 정한 양형기준에 의거, 형량은 징역 7~13년 정도로 산정됩니다. 다만 재판부의 판단으로는 그 양형의 기준은 지나치게 낮다고 판단돼 이 상한보다 높은 형을 선고하기로 합니다.

재판부는 피고인을 징역 18년에 처하며, 위치추적 전자장치(전자발찌) 부착 청구는 기각합니다.”

판결문은 그 뒤로도 이어졌지만 재판정의 그 누구도 내용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징역 18년’이라는 말이 들린 동시에 방청객석 앞줄에 앉아있던 유족의 어머니가 ‘쿵’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무죄를 선고해 주세요”

재판정은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고 판사는 휴정을 선언했다. 피해자의 아버지, 군 복무 중 휴가를 내고 재판에 참석한 피해자의 남동생, 그 외 친구들과 친지들은 이 장면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린 뒤 어머니에게서 들려온 서슬 퍼런 절규는 그곳의 모두를 숨죽이게 만들었다.

“판사님. 차라리 무죄를 선고해 주세요. 범인을 죽이고 저도 함께 죽겠습니다.”

넋이 나간 부인의 모습을 보고도 묵묵부답 말이 없었던 피해자의 아버지는 지난 7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상당히 이성적인 태도로 범행의 맥락과 뒷이야기를 들려줬었다. 그런 그조차 이날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1심 선고 이후 피해자의 남동생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남긴 글
우연이었을까. 시멘트 암매장 사건의 살인범이 징역 18년을 선고 받은 이날, 똑같은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된 '3조원 사기대출 사건' 1심 재판에서 재판정은 모뉴엘 박홍석 대표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했다.

3조원은 대한민국 1년 국가예산의 100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무수하게 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한 모뉴엘 사건에 징역 23년형은 너무 가벼운 처벌이 아니냐는 지적도 없지 않은 형편이다. 경제사범에 대해서 강력사건 못지않게 엄한 처벌을 원하는 여론이 반영된 결과라고 봐도 좋겠지만, 정작 강력사건에 대해서는 가해자에게 관대하다고밖에 볼 수 없는 판결이 하나의 경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사람을 죽인 범죄자보다 높은 형량을 선고받은 경제사범. 경제사범보다 낮은 형량을 선고받은 살인자. 기이한 아이러니 속에서 생명의 고귀함을 언급한 판결문은 조금쯤 공허하게 들려왔다.

“더 말할 필요도 없이 사람의 생명은 그 무엇보다도 존귀한 가치이고 이를 침해한 행위는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습니다.”

빼앗긴 목숨의 무게는 얼마인가. 어마어마한 금전 피해가 났을지언정 살아서 아웅다웅할 수 있는 사람의 죗값보다도 가벼운 것인가. 이런 식의 비교는 살인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에게는 또 다른 상처가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갈 곳을 잃어버린 그들의 분노와 상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수많은 물음표들이 거처를 찾지 못한 채 비탄과 절망의 블랙홀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가 버리고 있었다. [미디어펜=이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