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고의 골프칼럼니스트인 방민준 전 한국일보 논설실장의 맛깔스럽고 동양적 선(禪)철학이 담긴 칼럼을 독자들에게 배달합니다. 칼럼에 개재된 수묵화나 수채화는 필자가 직접 그린 것들로 칼럼의 운치를 더해줍니다. 주1회 선보이는 <방민준의 골프탐험>을 통해 골프의 진수와 바람직한 마음가짐, 선의 경지를 터득하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
방민준의 골프탐험(80)- 선비 골프와 양아치 골프

5월이 ‘계절의 여왕’이라면 10월은 ‘계절의 황제’다.
풋내 물씬한 잎이 무성하고 나비와 벌을 유혹하는 온갖 꽃이 만발하는 5월은 여인으로 치면 이팔청춘을 갓 지나 풍만하고 성숙한 단계로 접어든 때이니 ‘계절의 여왕’으로 칭송 받을 만하다.
모든 식물이 열매를 거두고 나뭇잎을 떨굴 준비를 해야 하는 10월은 남성성이 강하다. 벌여놓은 일을 수습하고 다음 세대를 위해 후계체제를 대비해야 하니 이는 황제의 몫이다.

골퍼광들은 유난히 5월과 10월에 몸살을 앓는다.
겨우내 필드에 못나가고 연습장에서 기량을 연마했으니 봄이 오면 들판에서 펄펄 날 것 같다. 그러나 정작 3, 4월이 되어 필드에 나가면 어김없이 좌절을 경험한다. 그동안의 연습에 대한 지나친 기대감에다 잔디가 완전히 생육하지 않은 필드 사정이 기량 발휘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골퍼들에겐 연록의 푸른 카펫이 깔리는 5월은 목을 빼고 기다리고 벼른 무대일 수밖에 없다.

그럼 10월은?
골퍼로서 갈무리를 해야 하는 시기다. 찬란했던 지난봄과 위대했던 지난여름에 다 이루지 못한 것을 마지막으로 마무리 짓고 싶은 계절이다.
그래서 이때가 되면 골프광들 사이엔 ‘골프 치자는 연락이 오면 콩나물을 다듬다가도 제쳐놓고 나가야 한다’거나 ‘10월 골프는 빚을 내서라도 나가야 한다’는 말이 유행어가 되어 회자된다.

이런 좋은 계절에 과연 나는 ‘계절의 황제’에 걸 맞는 골프를 하고 있는가.
골퍼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즐기는 골퍼와 싸우는 골퍼다.
대부분 골프를 시작할 땐 골프의 불가사의성이나 마르지 않는 매력 등에 이끌려 시작하지만 정작 골프채를 잡고 몇 달이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방향이 두 갈래가 나뉜다. 바로 즐기는 골퍼의 길과 싸우는 골퍼의 길이다.

   
▲ ‘신사의 스포츠’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초보 골퍼들은 ‘선비 골프’를 즐기겠다고 다짐하지만 상당수는 ‘양아치 골프’의 길로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삽화=방민준
초보시절엔 골프의 알파벳이나 구구단을 열심히 익히겠다는 겸손한 자세를 갖지만 이를 터득하고 나면 새로이 극복해야 할 벽이 나타나고 슬슬 일합의 유혹에 끌리게 된다.
처음에 맞닥뜨리는 벽은 이른바 백파(100타 미만을 치는 것)나 90대이고 더 발전하면 80대나 싱글이고 정말 소질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더파를 목표로 삼기도 한다.

어느 정도 자신의 기량에 자신감이 생기면 주변의 강자를 찾아 승패를 겨루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고 여기에 맛을 들이면 ‘떠돌이 검객’으로 나서게 된다.
‘선비 골프’와 ‘양아치 골프’로 갈리는 길목이다.

‘신사의 스포츠’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어온 초보 골퍼들은 ‘선비 골프’를 즐기겠다고 다짐하지만 상당수는 ‘양아치 골프’의 길로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친선의 의미가 가미된 내기라 해도 결코 잃지 않아야 하고 잃더라고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목적을 둔다. 스코어 경쟁에서도 동반자들보다 좋아야 하고 평소 자신의 스코어와 비해 나쁘면 화에 휩싸인다. 내기의 엄격함을 유지하기 위해 룰을 지키는 데는 철저하고 상대방이 속이지 않는지 감시의 눈을 번뜩인다. 골프를 늦게 배운 후배에 대한 배려는 찾기 어렵다.
‘양아치 골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선 동반자에 대한 배려나 신사도는 실종될 수밖에 없다.

반면 한때 경쟁을 벌이고 내기에 열중하기도 했지만 골프를 진정으로 즐기고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기 위해 경쟁심이나 쟁투심을 버리고 고고하게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는 골퍼들도 있다.
가능한 한 동반자들과 대립 갈등 대결의 구도를 만들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배려하고 양보하고 적당히 눈도 감아주고 전체적으로 물 흐르는 듯한 게임을 이끌도록 노력한다.

물론 여기에는 자신만의 게임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에 대한 철저한 배려가 뒤따른다. 단순히 볼을 찾아주고 도움을 주고 충고를 하고 원 포인트 레슨을 알려주고 하는 수준을 벗어나 동반자들이 얼마나 즐겁고 멋진 게임을 이끌 수 있을까 고민하며 노력하는가 하면 누군가 생애 최저타나 최초의 싱글 스코어를 기록할 가능성이 있을 때 보이지 않게 협력하기도 한다.

캐디에게 조용히 주인공이 스코어카드를 보지 못하도록 하고 동반자들도 스코어 얘기 대신 다른 얘기를 한다. 긴장감이나 부담감 없도록 일부러 가벼운 농담을 건네기도 하는 등 상대방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한다. 기대한 결과가 나온 후에야 진정으로 축하해주고 격려해준다.

나는 양아치 골퍼인가. 선비골퍼인가. / 방민준 골프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