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교육에서 부정되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승만 정부
   
▲ 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의 정통성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서 가장 심하게 매도되고 폄훼되는 대한민국의 지도자다. 역사교과서에 어떤 것이 서술되었다는 것은 이미 일정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역사교과서에 서술되기 전에 이미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 있었고, 그것이 일정부분 받아들여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부터, 왜 이승만 대통령과 이승만 정부를 그토록 공격하고 또 부정하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의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역사교과서를 통한 이승만 대통령과 그 시대에 대한 비판과 매도의 내용은 확인할 수 있으며, 또 그 영향을 추론하는 것도 가능하다.

1. 중고등학교 교육에서 부정되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승만 정부

현재 우리나라의 고등학교 역사교육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교과서는 다음의 2가지다. 하나는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 중에서 전국적으로 가장 많이 채택된 교과서이고, 다른 하나는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들이 실제로 가장 많이 참고하고 또 사용하는 저들의 대안교과서로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다.

미래엔 교과서는 아래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나라 전체 고등학교 1,715개교 중에서 525개교가 선택한 교과서로서 전국의 30.5%의 학교에 보급되었다.

   
▲ 표1. 2014학년도 고등학교 한국사 채택 현황./사진=자유경제원 정책제안 게시판

한편, 전국역사교사 모임이 저술한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는 2002년 2002년 3월에 초판이 발행되었으며, 2002년 5월 21일에 제2판 제1쇄가 발행되었고, 2008년 2월에 제2판 27쇄가 발행될 때까지 151,000부가 발행되었다. 2012년 4월에 제3판이 발행되었으며 현재까지 20만부 이상 판매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전국의 중고등학교 역사교사들은 거의 구입하여 참고하고 있을 것으로 파악되며, 필자가 보기에 우리나라의 고등학교뿐만 아니라 중학교 현장에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실상의 교과서는 아래의 그림에 있는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라고 생각된다.

   
▲ 전국역사교사 모임이 저술한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는 우리나라 고등학교뿐 아니라 중학교 현장에도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사진=『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 표지

출판사 서평 부분에는 출판사 서평은 “역사 교과서와 역사 수업을 바꾼 최초의 한국사 대안교과서”라고 선전하고 있으며, 출간 10주년을 기념하여 전면 개정 증보판을 냈음을 밝히고 있다. 출판사는 “기존 검인정 교과서와 대립하거나 충돌하고 있지는 않으며, 그 성과를 담아내면서도 지금까지의 역사학계와 역사교육계는 물론 우리 사회가 이루어낸 역사적 성숙도를 담아내고 있다.”고 하면서 검정교과서 및 역사학계의 통설들과 충돌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출판사 입장에서는 마케팅을 위한 방편이기는 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 실제로 검정교과서와 그다지 충돌하지 않는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본문의 서술내용을 과감하게 줄이는 대신에 사진 혹은 삽화 자료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부제를 '20세기를 넘어 새로운 미래로’라고 하고 있으며, 2012년 개정판은 표지의 메인 그림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의 악수하는 모습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개화기의 자동차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독립문과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떠나는 농민가족의 모습으로 배경을 두고 있다.

2. 미래엔 한국사 교과서의 이승만 대통령 및 이승만 정부에 대한 서술

<미래엔>이 발행한 고등학교 한국사의 이승만 대통령 및 이승만 정부에 관한 서술은 아래와 같다.

1)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조선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다>

“좌익 세력은 미군의 진주를 대비하여 건준을 해체하면서 조선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고, 전국 각 지방에 인민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주석에는 이승만, 부주석에는 여운형이 선임되었으나, 이승만은 취임을 거부하였다.”(p.308)

2)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이승만은 통일정부 수립이 어렵다면 남한만이라도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정읍 발언’을 발표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p.310)

“좌우합작위원회는 모스크바 3국 외무 장관 회의결정에 따른 '통일 임시 정부 수립, 유상매입과 무상분배 원칙하의 토지개혁, 반민족 행위자 처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좌우 합작 7원칙’에 합의 하였다(1946.10). 김구는 좌우합작 7원칙을 '8.15 이후 민족이 거둔 최대 수확’이라며 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 등 우익은 좌익과의 협조 자체를 거부하였다. 박헌영이 이끄는 좌익도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 개혁과 친일파 즉각 청산을 요구하며 반대하였다.”(p.310)

3) <유엔 소총회, 남한 단독 선거를 결의하다>

“유엔 소총회가 열려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서만 총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의하였다. 이에 김구는 단독 선거가 민족 분단의 길이며, 민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반대하였다. 반면,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총선거를 환영하며 선거 준비에 힘썼다.(p.311)

4) <유일한 합법정부인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다>

“제헌 국회는 무소속 85석으로 다수를 차지했지만 이승만이 이끄는 대한독립촉성 국민회가 55석을 얻어 원내 제1당이 된 한국 민주당 등 군소우익 정당과 연합해서 과반을 차지하였다. 그 결과 국회의 간접 선거를 통해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내각을 조직한 이승만은 8월 15일 미군정 종식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민주공화국임을 밝혔다.”(p. 313)

5) <좌절된 반민족 행위자 처벌>

“반민특위가 일본 경찰 출신 노덕술을 검거하자, 대통령 이승만은 좌익 반란 분자 색출 경험이 풍부한 경찰관을 마구 잡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특별 담화를 발표하였다. 이어 공산당과 내통했다는 구실로 반민특위 소속 국회의원들을 구속하였다. 경찰들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일도 벌어졌다. 결국 반민특위가 해체되어 민족 정기를 바로잡는 과제는 뒤로 미뤄졌다.” (p.314)

6) <농지개혁을 실시하다>

“경자유전의 원칙에 따라 농지개혁이 실시되었다(1950). 농지개혁으로 지주·소작제가 거의 사라졌으며, 대부분의 농민이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농지를 제외한 토지는 개혁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반민족행위자의 토지 몰수 조항은 포함되지 않았다. 유상분배에 따른 부담으로 농민이 농지를 되팔고 다시 소작농이 되는 경우도 있었고, 지가 증권을 현금으로 바꾸기 어려워 중소지주층이 산업자본가로 전환되지 못하고 몰락하였다.”(p.314)

7) 가상포스터로 보는 광복 직후 남한 주요 정치세력의 성향 (p.315)

   
 

8) <지루한 협상 끝에 휴전이 성립되다>

“정전회담에서는 휴전선 설정과 포로 교환 방식 등에 대한 협의가 쉽지 않았다. 한때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을 반대하면서 북송을 거부하는 반공 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하여 회담이 지연되기도 하였다.” (p.318)

9) <이승만, 장기 독재 체제를 추구하다>

“6.25 전쟁 직전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반 이승만 성향의 후보가 대거 당선되었다(1950). 이승만 정부가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반민족행위자를 옹호하여 국민의 기대를 저버렸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부산 피난 국회에서 국민방위군 사건과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폭로되자 국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될 가능성은 더욱 낮아졌다.

이에 이승만은 자유당을 창당하여 지지기반을 넓히고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였다. 개헌안은 일부 국회의원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하는 등 공포 분위기 속에서 기립 투표라는 불법적인 방법으로 국회에서 통과되었다(발췌개헌, 1952). 이후 이승만은 직선제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었다.

전쟁 후 자유당은 '3선 금지’ 조항을 초대 대통령에게 적용하지 말자는 개헌안을 발의하였다. 개헌안은 국회표결 정족수 1명이 모자라 부결이 선언되었다. 하지만 이틀 후 국회의장은 반올림을 적용하여 개헌안이 통과되었다고 번복하였다(사사오입 개헌, 1954). 결국, 1956년 선거에 출마한 이승만은 민주당 후보 신익희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단독 후보가 된 상황에서 세 번 연속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진보 성향의 대통령 후보 조봉암의 돌풍이 만만치 않았고, 부통령에는 민주당 장면이 자유당의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에 자유당은 조봉암을 간첩죄로 몰아 제거하고, 국가 보안법을 개정했으며,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경향신문을 폐간하였다.” (p.320)

10) <1년 전부터 부정 선거를 준비하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펼쳐 공산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다. 그러나 민주주의 원칙과 절차를 무시하고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을 단행하여 장기 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50년대 말에는 미국의 무상원조가 크게 줄어 경기다 침체되면서 국민의 고통과 원성이 높아졌다. 한편,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제4대 대통령 선거 실시 1년 전부터 내무부 장관을 중심으로 공무원과 행정력을 동원해 부정 선거를 조직적으로 준비하였다.”(p.324)

11)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다>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사망하자, 단독 후보가 된 이승만의 당선은 확실시 되었다. 그러나 고령인 이승만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생기면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해야 했다. 정부와 자유당은 공무원, 마을 이장, 경찰,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이기붕을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온갖 부정을 저질렀다. 야당후보의 선거 유세를 방해했고, 선거 방일에 투표함을 통째로 바꿔치기하는 경우도 있었다.”(p.324)

12) <4.19 혁명, 장기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다>

“정부는 이기붕 부통령 당선자 사퇴와 이승만의 자유당 총재직 사임으로 사태를 수습하려 했지만, 대학 교수들은 이승만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결국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나겠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고(4.26.)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이로써 독재 정권은 붕괴되고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p.325)

<미래엔>이 발행한 고등학교 한국사의 이승만 대통령 및 이승만 정부에 관한 서술은 이상이다. 위와 같이 이승만 대통령과 이승만 정부에 대한 서술은 부정적인 측면 일변도로 서술되었다. 거의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부분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강력한 반공정책을 펼쳐 공산 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냈다.”라는 서술이다.

   
▲ 올바른 사관을 가르치고 긍정의 힘으로 전통은 계승하고 잘못된 정책은 바로 잡아 더욱 선진사회로 가겠다는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 바른 역사 교육이다. 우남 이승만의 혜안, 이승만 정부의 업적은 분명히 밝혀야 한다./사진=연합뉴스


3.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의 이승만 대통령 및 이승만 정부에 대한 서술

도서출판 휴머니스트에서 발간한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의 이승만 대통령 및 이승만 정부에 관한 서술은 아래와 같다.

1) <우리는 이런 나라를 원한다>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가 탄핵을 받기도 한 인물인데 명성과는 다리 국내 조직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한민당(지주와 자본가 등 일제와 타협하여 생활하였던 사람들이 중심이 된 정당)과 손을 잡았다.(p.166)

◇ 1945년 12월 '선구회'의 “우리를 지도하여 줄 인물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와 “새 나라의 정치체제로 바람직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설문조사

; 여운형(36%)> 이승만(20%)> 김구(18%) > 박헌영 (17%) > 이관술 (16%)
; 민주주주의 정체(28%) > 입헌정체(21%) > 진보적 민주주의 정체(16%) > 사회적 민주주의 정체(15%) > 사회주의 정체(9%) > 신민주주의 정체(7%) > 기타(4%) (p.170)

2) <좌․우익 대립의 골이 깊어지다!>

“김구와 이승만 등 우익은 신탁 통치 결사반대를 외쳤다. 좌익은 …중략…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임시정부 수립에 중점이 두어져 있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p.169)

3) <남과 북, 서로 다른 길로 접어들다!>

“이승만은 해방된 지 1년도 채 안 되는 1946년 6월 “통일 정부를 바라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니, 우선 남한만이도 정부를 수립하여 38도선 이북에 있는 소련을 몰아내야 할 것”이라며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p.172)

4)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 정한 절차에 따라 간접선거를 통해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이 건국을 공포함으로써 대한민국이 수립되었다.” (p.174)

5) <한반도에 이는 전쟁의 먹구름>

“반공북진 통일을 외치던 이승만 정권은 미국에 무기와 물자 원조를 요구하였다. 3일이면 북한군을 제압하고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이기도 하였다.” (p.189)

6) <역사현장 - 반민특위 법정>

“위원회는 4개월 동안 약 300여 명을 반민족 행위자로 체포하였다. 그러나 이승만과 친일파들은 법률의 제정과 조사 위원회의 활동을 끈질기게 방해하였다.” (p.190)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였으며, 친일경력을 가진 경찰이 도리어 반민특위를 습격하는 일도 있었다. 결국 1년여 만인 1949년 8월 31일에 반민특위는 해체되고 말았다.” (p.191)

7) <미국, 전쟁에 개입하다>

“다급해진 이승만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미국은 신속하게 남한에 군대를 파견하였으며, 유엔을 움직여 유엔군 파견을 결정하였다. 7월 7일에 유엔군 사령부가 설치되었고, 미군 극동 사령관이 지휘를 맡았다. 7월 12일 이승만은 남한군의 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넘겼다.” (p.193)

“서울에 돌아온 이승만 정권은 내친 김에 미국의 힘을 빌려 북진통일을 달성 하고자 하였다.” (p.193)

8) <휴전, 전쟁은 끝나는가>

“이승만은 휴전에 반대하면서 여전히 북진통일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남한에 경제 원조 등을 약속하면서 휴전 쪽으로 유도하였다.” (p.194)

9) <이승만, 헌법을 바꾸어 권력 연장을 거듭하다!>

“2대 대통령 임기가 2년 정도 남은 1954년 6월, 이승만은 대통령을 두 번밖에 할 수 없다는 규정을 없애기 위한 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이를 어거지로 통과시켜 정권을 연장하려 들었다” (p.198)

10) <반대 세력을 제거하다!>

“이승만 정권을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 지도부를 체포하였다. 그러고는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았다. 결국 조봉암은 사형 당하였고 진보당은 완전히 무너졌다. 이렇게 이승만 정권은 반정부 세력들을 '빨갱이’ 혹은 '간첩’으로 몰아 정치적으로 억압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재권력을 지탱해가고 있었다.” (p.198)

11) <남한 경제와 주민생활>

“이승만 정권은 정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농산물을 수입하였고, 국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가격이 떨어지면서 국내 농업기반이 약해졌다.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 파산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p.199)

12) <북한 경제와 주민생활>

“북한 경제는 빠른 속도로 회복되었다. 주민들을 일사불란하게 동원한 강력한 계획경제정책이 효과를 본 것이다. 또한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원도 북한 경제를 회복시키는데 큰 힘이 되었다.” (p.201)

13) <부정선거의 결정판>

“이승만 독재 정권 아래, 민중들의 생활은 어려웠고 독재정치에 대한 불만은 높아만 갔다. 1960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자 85세의 고령이던 이승만이 다시 후보로 나왔다.” (p.208)

“1960년 3월 15일에 행해진 선서는 이승만과 이기붕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일부 지역에서는 자유당 표가 전체 유권자 수보다 많이 나올 정도여서 당황한 선거관리위원회는 이승만, 이기붕의 득표율을 낮추어 발표하였다.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 정권이 민주주의를 정면으로 부정한 사건이었다.” (p.209)

<자유의 종을 거세게 두드려라!>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나 미국으로 망명을 따났다. 이로써 12년에 걸친 제1공화국이 끝을 맺었다. 부패한 독재정권을 민중의 힘으로 무너뜨린 이 거대한 움직임을 4.19 혁명이라고 부른다.” (p.210)

이승만 대통령과 이승만 정부에 대한 일방적인 부정과 매도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과 매도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하루빨리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제이다. 이러한 과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종래의 이승만 대통령 및 이승만 정부에 대한 비판과 부정을 反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뜻을 이루기 어렵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승만 정부의 공적을 정당하게 평가하여 객관적인 자리매김을 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통성을 확립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4. 역사교과서의 대한민국 부정과 그 대책

이승만 대통령과 이승만 정부에 대한 일방적인 부정과 매도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과 매도로 연결된다는 점을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일생을 좌우할 수 있는 역사의식이 형성되는 중·고등학교 시기의 교과서에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수호한 이승만 대통령과 그 정부에 대해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매도하는 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심는 것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단순한 비판을 넘어 대한민국의 자체의 부정과 연결되는 내용이 다수 발견되고, 대한민국 건국의 최고 공로자이고 또 국가수반이 대한민국에 기여한 공로에 대해서는 거의 눈을 감고 있는 편향된 서술을 하고 있다.

미래엔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反통일, 反민족 및 친일파 옹호, 反 농민, 독재체제, 민중에 의해 추방된 대통령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한편,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는 反통일, 반공·전쟁옹호, 친민종속, 反농민, 국민탄합 독재 강화, 민주주의 부정-부정선거, 국민에 의해 추방된 반공·반민족·반민주 독재자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초대 대통령과 그 정부를 일방적으로 비판하고 매도하는 역사 서술의 문제를 바로잡아 학생들에게 바른 역사인식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대통령 및 이승만 정부에 대한 비판과 부정을 反비판하는 것만으로는 뜻을 이루기 어렵다. 이승만 대통령과 이승만 정부의 공적을 정당하게 평가하여 객관적인 자리매김을 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건국과 정통성을 확립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위 두 교과서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즉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는 사실과 공산세력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였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공적과 성취에 대해 주목하여야 한다. 필자는 이승만 대통령과 이승만 정부의 공로를 분명하고 객관적으로 규명하여 학생들로 하여금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해결의 방향이라고 확신한다.

필자는 이승만 대통령 및 이승만 정부의 공적으로 3가지를 꼽고자 한다. 첫째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 건국이고, 둘째는 국제공산제국주의와 김일성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수호하였으며, 셋째는 후일 산업화와 민주화의 동력이 된 의무교육제도의 확립하여 교육혁명을 달성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연구를 서두를 것을 제안한다. /이명희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

(이 글은 자유경제원 정책제안 게시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