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온라인뉴스팀]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지도부가 7개월 만에 마주앉은 '청와대 5자 회동'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이 뒤덮은 가을 정국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108분에 걸친 이번 회동에서 박 대통령과 여야는 각자 '하고 싶은 말'만 쏟아내면서 견해 차이만 확인하는 자리가 되고 말았다. 합의문 한 장 없는 '빈손 회동'이었던 셈이다.

불붙은 '역사 전쟁'은 여야 대표가 상대방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비판하는 난타전이 됐다. 야권에선 정당의 경계를 뛰어넘어 여권의 교과서 국정화 '독주'를 견제하기 위한 연대 움직임도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미국이 핵심기술 이전을 거부한 한국형 전투기(KF-X) 개발 사업이 여권의 악재로 돌출했다. 외교·안보라인의 문책론이 불거진 것은 물론 박 대통령의 방미 성과도 일정부분 희석되고 말았다.

박 대통령은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 외교안보수석을 교체했다. 이와 함께 7개 정부 부처에 대한 장·차관급 인사를 단행, 국토교통부와 해양수산부의 '정치인 장관'이 여의도로 복귀하게 됐다. 이는 청와대 정무특보 사임과 맞물려 여권 권력지형에 변화를 가져올 신호탄으로 해석됐다.

'소문난 잔치'로 끝난 5자 회동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김무성·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 새누리당 원유철·새정치연합 이종걸 원내대표 등 여야 지도부는 지난 22일 청와대에서 만나 중·고교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와 내년도 예산안 및 민생·경제법안 처리 등 국정 현안 전반을 논의했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쟁점에 대한 견해차만 확인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해 박 대통령과 김 대표는 현행 검인정 교과서의 문제점을 지적, 국정화의 불가피성을 주장했다. 이에 문 대표는 강력히 반발하면서 정면 충돌, 연말 첨예한 대치 정국을 예고했다.

정부가 역점 추진하는 노동개혁 관련 법안과 경제 활성화 관련 법안에 대해서도 박 대통령은 조속한 처리를 당부했으나, 문 대표는 문제점을 제기하며 방향 수정을 촉구해 관련 법안의 올해 정기국회 처리에 암운을 드리웠다는 관측을 낳았다.

참석자들은 청년 일자리 창출, 내년도 예산안의 법정 시한 내 처리 등에는 원론적인 공감대를 형성했으나, 이마저도 구체적인 성과로 연결하지는 못했다.

여야 원내지도부가 정기국회 법안·예산안 등의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열기로 합의했던 이른바 '3+3 회동'도 무산 위기에 놓였다.

예산국회 막 올랐지만…여야는 '역사 전쟁'

내년도 대한민국의 살림살이를 결정할 국회 예산안 심의가 본격적인 막을 올렸지만, 여야는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전쟁에 온 힘을 쏟아부었다.

급기야 새누리당 김 대표와 새정치연합 문 대표가 상대방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하는 '감정싸움'의 양상도 전개됐다.

문 대표는 지난 18일 박 대통령과 김 대표를 겨냥해 "두 분의 선대가 친일·독재에 책임 있는 분들이다 보니 그 후예들이 친일과 독재의 역사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려는 것이 이번 교과서 사태의 배경이고 발단"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자 김 대표는 이튿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인신공격성 발언을 하는 것은 정치의 도를 벗어난 무례"라면서 "학부모를 호도하는 문 대표의 거짓 주장 속에서는 학생들을 위한 마음을 찾아볼 수 없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런 가운데 문 대표는 정의당 심상정 대표, 무소속 천정배 의원과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1천만 서명 시민 불복종 운동'을 함께 전개하기로 하면서 분열 양상을 보이던 야권이 역사 교과서를 놓고 연대하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교과서를 둘러싼 여야의 대치 정국이 장기화할 경우 내년도 예산안 심의가 차질을 빚는 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제기된다. 예산결산특별위원회는 오는 11월30일까지 감액·증액 심의를 거쳐 내년도 예산안을 확정해야 한다.

다만 지난해부터 '국회 선진화법'으로 불리는 개정 국회법에 따라 예산안의 법정 처리 시한(12월2일)은 지키게 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망된다.

KF-X 논란…野 "국정조사" 공세

박 대통령의 방미 기간 미국 정부가KF-X 사업의 4개 핵심기술을 이전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함에 따라 건국 이래 최대 무기개발 사업으로 불리는 이번 사업을 둘러싼 논란이 증폭됐다.

당장 야권에선 이를 정치 쟁점화하면서 진상 조사를 위한 국정조사 주장이 분출됐다.

지난 19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새정치연합 안규백 의원은 "미국에서 기술협력 방안을 공동모색하겠다는 립서비스 아닌 립서비스를 듣고 온 것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새정치연합 이종걸 원내대표는 지난 22일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한민구 장관에 대한 문책은 물론 KF-X 사업에 대한 국정조사까지 요구했다.

여권에서도 사업에 대한 원점 재검토와 문책론이 제기됐다.

김무성 대표는 지난 23일 기자들과 만나 "우선 그 일이 잘못된데 대해 책임질 사람은 져야 하고, 핵심 4개 기술을 자체 개발하는 노력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유승민 의원은 19일 국방위 전체회의에서 "KF-X 사업을 여기서 더 계속하면 예산도 계속 들고 더 취소할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 것"이라며 '원점 재검토'를 요구했다.

국토·해수장관 교체, 정무특보 사임…'친박'의 복귀

박 대통령은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지난 19일 국토부와 해수부 장관을 교체하고 기획재정부, 교육부, 외교부, 국방부, 보건복지부 차관을 새로 임명했다.

친박(친박근혜)계 핵심으로 불리는 유기준·유일호 장관이 각각 해수부 장관직과 국토부 장관직을 내려놓고 내년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여의도로 복귀한 것이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김희정 여성부 장관도 내년도 예산안이 마무리되는 오는 12월 중으로 교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힘을 받는다.

곧바로 친박계 핵심인 윤상현·김재원 대통령 정무특보가 이튿날인 20일 정무특보직을 사임, 당내 활동폭이 한층 넓어지게 됐다.

이로써 계파 분포나 중량감에서 비박(비박근혜)계와 비교해 열세를 보였던 친박계는 한층 두터워졌다. 이를 두고 여권에선 내년 총선 공천권을 놓고 비박계와 친박계의 본격적인 '파워 게임'이 전개될 것이라는 시각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