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조원 상속세 완납 삼성...'초격차' 혁신 위해 필요한 건 '오너십'
수정 2026-05-06 11:21:42
입력 2026-05-06 11:21:48
조우현 기자 | sweetwork@mediapen.com
전문경영인 체제 의존하는 빅테크, ‘혁신 정체’ 딜레마 직면
초격차 유지 위한 오너십 경영 가치 조명…상속세 개편 고조
초격차 유지 위한 오너십 경영 가치 조명…상속세 개편 고조
[미디어펜=조우현 기자] 고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이 남긴 유산 정리가 마무리 됐다. 이재용 삼성 회장을 비롯한 유족들은 12조 원 규모의 상속세를 5년여에 걸쳐 완납했다. 삼성은 이재용 회장 중심의 지배구조가 공고해진 가운데, 재계에선 여전히 과도한 수준의 상속세와 더불어 삼성의 오너 체계 유지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앞서 이 회장이 4세 경영 포기를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재계에선 반도체와 같은 첨단 제조업에서 초격차를 유지하기 위해선 오너 경영을 필수적으로 보고 있다. 문제는 천문학적인 상속세다. 과도한 세금 부담이 다음 세대의 안정적인 승계는 물론 기업의 영속성마저 가로막을 수 있다는 게 재계 관계자의 지적이다.
특히 대한민국 오너들의 자산이 지분에 쏠려 있는 점을 감안하면 상속세는 리스크에 가깝다. 대표적으로 한미약품의 경우 상속세 부과 당시 주가보다 크게 떨어진 사례가 있다. 현재 삼성 오너가는 최근 1년 새 주가가 폭발적으로 상승하면서 자산이 7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상속세 역시 현 수준보다 몇 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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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 이건희 삼성전자 선대회장의 유산에 부과된 12조 원 규모의 상속세가 5년여에 걸쳐 완납됐다. 이로써 이재용 회장 중심의 지배구조가 공고해졌지만, 재계의 시선은 ‘그 이후’를 향하고 있다. /사진=미디어펜 | ||
◆ 전문경영인 체제 딜레마… ‘안정’ 택한 대신 ‘혁신’ 잃나
오너 경영과 전문경영인 체제 중 어떤 방식이 옳은 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치열한 논란이 있다.
일각에서는 미국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사례를 들어 전문경영인 체제로도 충분한 혁신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가 떠난 후에도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가 세계적인 빅테크 기업의 명성을 잇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사회나 전문경영인 중심 체제로의 전환이 삼성과 같은 첨단 제조업에도 유효한 대안인지는 따져볼 문제다. 한국과 미국의 산업 환경 및 지배구조에는 뚜렷한 차이가 있어서다. 미국은 강력한 이사회 중심의 견제 문화와 풍부한 M&A 생태계, 그리고 상대적으로 위험 요소가 적은 소프트웨어 및 플랫폼 중심의 확장성이 뒷받침된다.
반면, 삼성전자 같은 첨단 제조업은 매년 수십조 원의 시설투자가 요구되는 장치 산업이자 설계·생산·패키징이 유기적으로 결합돼 있어 의사결정의 속도와 타이밍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더군다나 미국의 전문경영인 체제 역시 본질적인 ‘혁신 정체’라는 딜레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주주 이익 극대화와 임기 내 실적 평가에 민감한 전문경영인 체제에서는 모험적 결단이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미래보다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과에 매달리는 경향이 짙다.
실제로 애플은 공급망 최적화와 서비스 확장을 통해 최고 수준의 수익성을 달성했지만, 스티브 잡스 이후 10년 이상 새로운 혁신 제품을 내놓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역시 클라우드 전환에는 성공했으나, AI 제품의 성급한 통합을 추진하면서 보안 문제와 핵심 인력 이탈 등 내부 진통을 겪고 있다.
◆ 전문경영인 체제가 초래한 반도체 패권의 이동
이 같은 딜레마는 반도체 업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과거 압도적인 1위였던 인텔은 최고경영자(CEO) 체제로 전환한 이후 기술 혁신보다 단기적 수익성과 재무적 성과에 치중하며 경쟁력을 잃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또 전문경영인 체제를 고수해온 마이크론 역시 반도체 사이클에 따라 보수적으로 투자를 축소하는 전형적인 관리형 전략을 취해왔다.
그 결과 두 기업 모두 선제적인 첨단 패키징 및 미세공정 전환 타이밍을 놓치며 TSMC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아시아 기업들에 주도권을 내주게 됐다.
반면, 대만 TSMC의 경우 2018년 창업주가 물러난 후에도 독보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어 전문경영인 체제가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는 TSMC가 파운드리라는 단일 사업에 극도로 집중된 ‘선택과 집중’ 모델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며, 국가적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이라는 든든한 방패막이가 뒷받침됐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이러한 TSMC식 전문경영인 모델을 삼성과 같은 대규모 복합기업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복잡한 사업 영역과 불확실한 시장 상황 속에서는 오너십을 통한 장기적이고 과감한 결단이 필수적이다.
여기에 예측하기 어려운 한국 정부의 정책과 규제 일변도의 환경까지 겹쳐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 반도체 기업에 오너십의 역할은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 핵심 경쟁력으로 작용한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반도체와 같은 첨단 제조업은 10년, 20년을 내다보는 대규모 선제 투자가 필수적인데, 기업 영속성을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되지 않는다면 핵심 사업 경쟁력을 훼손하거나 지배구조가 흔들리게 돼 기업의 미래는 물론 한국의 미래도 기약하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100년 기업의 조건 ‘오너십’… 일본의 장수 기업 생태계
이러한 전문경영인 체제의 한계와 대조적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100년 이상 장기적인 경쟁력을 유지하는 기업들은 강력한 오너십이나 안정적인 가문 중심 지배구조를 띠고 있다.
특히 장수 기업의 천국으로 불리는 일본의 경우, 업력 100년이 넘는 기업이 4만 곳에 달한다. 1300년 넘게 가문 대대로 운영 중인 ‘호시 료칸’ 등 가문 중심의 경영이 기업의 영속성을 뒷받침한 대표적인 사례다.
도요타는 도요다 가문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단기 실적에 흔들리지 않고 하이브리드 기술과 친환경차, 우븐 시티에 조 단위 투자를 단행했다. 산리오 역시 창업주 가문의 책임 있는 가업 승계를 바탕으로 디지털 전환과 신규 캐릭터 육성에 과감히 투자하며 글로벌 캐릭터·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진화했다.
일본이 이처럼 장수 기업을 많이 보유할 수 있는 배경에는 ‘가업 승계 세제 특례 제도’가 있다. 일본 정부는 후계자가 주식을 승계할 때 상속세와 증여세를 전액 유예해 주는 제도를 통해 세금을 내기 위해 기업의 지분을 쪼개거나 매각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다.
이밖에도 스웨덴의 유명한 발렌베리가가 있다. 발렌베리 가는 5대째 세습기업으로 100년 제국을 이룩한 대표적인 글로벌 기업이다. 투명 경영과 사회 공헌으로 신망을 얻고 있어 오너 경영의 긍정적 대표 사례로 꼽힌다.
◆ 과도한 상속세 부담, 기업 영속성 훼손으로 직결
반면 국내 대기업의 상속세 부담은 글로벌 경쟁력 약화와 경영권 위협을 초래하는 핵심 문제다. 현재 한국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최대주주 할증을 포함해 60%로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선대 회장의 지분을 상속받는 과정에서 오너 일가는 재원 마련을 위해 주식 담보 대출을 늘리거나 지분을 매각해야 하는 구조적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 이 과정에서 지분율이 희석돼 적대적 M&A나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결국 기업의 영속성과 초격차 유지를 위해서는 징벌적 수준의 상속세를 합리화하는 세제 개편이 필수적이다. 삼성이 12조 원의 상속세를 완납한 지금, 한국 첨단 산업의 미래를 지키기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최준선 교수는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12조 원이라는 상속세를 성실히 완납한 삼성의 행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책임 경영’의 가치를 실현한 모범적인 사례로 칭찬받아 마땅할 것”이라면서도 “다만 이런 방식의 상속세 납부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이재용 회장 이후의 기업승계는 삼성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국가적 문제”라며 “관리가 가능한 방향으로 상속세가 개편되지 않는다면 한국의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 대한민국 첨단 산업이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상속세 개편”이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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