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펜=이석원 문화미디어 전문기자] 배우 염혜란이 다시 한번 제주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관객들을 찾아온다. 오는 4월 15일 개봉을 앞둔 영화 '내 이름은'에서 주인공을 맡은 염혜란은 지난해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에 이어 또 한 번 '제주의 여인'을 연기하며 자신의 연기 인생에서 가장 뜨거운 정점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변신은 전작과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폭싹 속았수다'의 해녀 '광례'가 딸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억척스러운 삶의 상징이었다면, '내 이름은'의 그녀는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을 안고 살아가는 무용가로 분해 더욱 깊고 심오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두 작품에서 염혜란이 보여준 가장 흥미로운 차이점은 바로 '언어'와 '신분'의 대비다. 넷플릭스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에서 그녀는 외지에서 제주로 시집와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이었다. 설정상 외지인이었기에 제주 사투리가 다소 서툴고 투박하게 묘사되었으나, 이는 오히려 거친 풍파를 견디며 살아온 이방인 해녀의 고단함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장치가 되었다.
영화 '내 이름은'에서 염혜란은 9살의 기억을 가둬놓고 50년의 세월을 살아내는 그 시절 제주도 사람들의 다른 면을 보여준다. /사진=CJ CGV 제공
반면 영화 '내 이름은'에서의 염혜란은 완벽한 '제주 토박이'로 거듭났다. 그녀는 실제 제주도민조차 감탄할 만큼 찰지고 진한 제주 방언을 구사하며 극의 몰입도를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어린 시절의 비극의 기억을 봉인한 채 아들 하나에 기대어 살아가는 그녀의 정제된 몸짓은 제주 사투리가 주는 토속적인 질감과 묘한 대비를 이루며 캐릭터의 입체감을 더한다.
정서의 측면에서도 두 작품은 확연히 갈린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염혜란은 1950년대 제주를 배경으로 혹독히도 가난한 시절을 살아내야 하는 척박한 인생을 그렸다면, '내 이름은'에서 염혜란은 '폭싹 속았수다'의 바로 그 직전의 시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비극의 시대를 잊고 살면서도 그 기억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1998년을 무겁게 짊어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영화 '내 이름은'은 개인의 기억 상실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단면을 은유한다.
염혜란은 과거의 상처를 회피하며 아들 하나를 잘 키워내자는 삶을 영위하려 하지만, 결국 마주할 수밖에 없는 진실 앞에서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복합적인 감정선을 연기했다. 이는 단순한 생활 연기를 넘어, 한 시대를 관통하는 인간의 실존적 고뇌를 담아내야 하는 고난도의 작업이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뒤에 숨겨진 서늘한 역사의 통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미 '폭싹 속았수다'에서 거칠고 억척스런 해녀 '광례'를 연기했던 염혜란은 제주의 두 얼굴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넷플릭스 제공
'경이로운 소문', '더 글로리', '마스크걸'을 거쳐 지난해 '폭싹 속았수다'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에 이르기까지, 염혜란의 위상은 이제 '명품 조연'을 넘어 '신뢰의 주연'으로 완전히 격상되었다. 특히 박찬욱 감독과의 협업은 그녀의 연기 스펙트럼이 장르와 스타일을 가리지 않고 확장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 관객들이 염혜란의 연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녀는 어떤 비현실적인 상황 속에서도 캐릭터를 지독하리만큼 '현실적'으로 안착시키는 힘을 가졌다. 화려한 기교보다는 인물의 밑바닥에 깔린 진심을 먼저 건져 올리는 그녀의 태도는 관객들에게 깊은 정서적 유대감을 선사한다. 억척스러운 해녀의 손마디에서도, 무용가의 가녀린 어깨에서도 관객들은 각자의 삶이 투영된 진실된 조각을 발견한다.
염혜란의 '내 이름은'은 가장 낮고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묵직한 진동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제주의 바다보다 깊은 내면 연기를 선보일 염혜란이 이번 작품을 통해 한국 영화계에 어떤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할지, 오는 15일 그 베일이 벗겨진다.
[미디어펜=이석원 문화미디어 전문기자]